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40화 (140/216)

< 140 : 운주 >

왕건은 멀리서 흩날리는 흙먼지를 보고 약간 위축된 기색으로 말했다.

"견훤이 오는구나. 음, 나는 견훤이 못 나올 줄 알았다. 그저 시간을 끌기 위해 운주성 안에서 백제군이 농성을 할 줄 알았어. 그런데 견훤이 바로 출진하다니. 견훤이 빠르긴 빠르구나."

고려의 다른 장수들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모산성에서처럼 백제군이 수비만 할 것이라 생각하고 공성기구들을 준비하고 보군들을 많이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견훤이 이리 올 줄은 몰랐습니다."

홍유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판단하고 군사를 준비했다. 그런데 견훤이 이리 나오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기병만 데려올 걸 그랬다. 그래 견훤의 군세는 얼마나 되는가?"

왕건이 복잡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척후들이 수를 세어보니 거의 5천에 이르는 대군이라 합니다."

"아니 고창에서도 패하고 사탄에서도 패했는데 그만한 군사를 동원하다니! 지금 우리 군사들과 큰 차이가 없군. 나도 견훤의 허를 찌르기 위해 대광현이 온 직후 손님을 환영하는 척하다가 바로 군사를 준비해서 내려온 건데. 허허."

왕건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군사회의가 열리는 막사 한쪽에 앉아있었다. 내 곁에는 왕무가 든든하게 앉아있었다. 나는 상당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지만, 억지로 자세를 바로하고 앉아 있었다.

'왕건이 허를 찌른다고 부랴부랴 내려와서 힘들어 죽겠네.'

나는 대광현이 망명한 이후 상당히 바빴다. 발해 유민과 관련된 일은 거의 내가 처리해야 했다. 왕건이야 대광현과 만나 인사만 하면 됐지만, 그 아래서 식량을 분배하고 정착촌에 발해 유민을 분산수용하는 일은 내 손을 거쳐야 했다.

한창 그 일을 하다가 이렇게 갑자기 운주성 전투에 출전하니 피로할 수밖에 없었다.

'왕무만 아니면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 성격도 아닌데.'

나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왕무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내가 함께 출전해야 왕무의 공이 커져서 힘들어도 참고 내려온 것이다.

'왕무가 왕건과 장수들의 이야기에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말도 못 걸겠네.'

나는 하품을 참으며 억지로 왕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야 미래에서 와서 이 전투의 결과를 훤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왕건의 이야기가 지루했다.

"어떻게 할까? 견훤과 싸워볼까? 말까? 그런데 5천이 넘는 군사들을 동원해서 야전에 돌입했다가 지면 후폭풍이 크다. 다시 견훤 쪽으로 분위기가 흐를 수 있어. 지금 우리가 전략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니 싸우지 말고 그냥 대치만 하다가 돌아갈까?"

왕건은 깊은 고민에 빠져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며 중얼거렸다.

"견훤의 동태를 살피며 계속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척후들을 많이 풀어서 견훤군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홍유가 그리 권했다.

"그래. 그래야지."

왕건이 고개를 끄덕일 때 막사 밖에서 군사 하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백제 쪽에서 전령이 왔습니다. 견훤의 서신을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서둘러 들어오게 하라!"

왕건은 다급하게 외쳤다. 견훤이 무슨 서신을 보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백제군의 복색을 한 전령이 들어와 서신을 건넸다.

"백제군 전령은 쌀을 좀 주고 즉시 돌려보내라."

왕건은 그리 명을 내렸다. 백제군 전령이 예를 올리고 막사에서 물러나자마자 왕건은 견훤이 보낸 서신을 펼쳤다.

왕건은 서신을 읽고 약간 난감한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막사 안의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게 소리내어 견훤의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백성들을 생각해서 그만 싸웁시다. 각자의 땅에 돌아가서 백성들이 쉴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건이 견훤의 짧은 서신을 읽자마자 장내에 동요가 일었다.

"허허, 이거 참."

홍유나 다른 고려 장수들도 혀를 찼다.

"견훤이 갑자기 백성 걱정을 하고 휴전을 하자는데. 아무래도 이건 견훤이 이 싸움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왕건이 당황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견훤이 진짜 불리하면 저런 서신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홍유가 말했다.

"내 생각도 같다. 내가 사방에서 각지의 호족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도 그랬어. 저런 식으로 약한 척 하는 서신을 보낸 자들이 꼭 끝까지 애를 먹였다. 손자병법에도 나와 있는 내용이야. 견훤이 준비를 많이 하고 나온 모양인데. 이거 견훤이 준비를 하고 있는데 거기로 들어가야 하나?"

왕건도 흔들리는 기색이었다.

'음 확실히 왕건 말이 맞긴 맞아. 현대에도 대개 들어맞는다. 정치가들이나 기업가들이 궁지에 몰려도 약한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아.'

왕건도 그렇고 고려 장수들도 수많은 전투를 경험해 봐서 이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 순간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유금필이 입을 열었다.

"진격해야 합니다. 이번에 진격하면 견훤을 패배시킬 수 있습니다."

유금필이 그리 말하자 왕건과 여러 장수들은 크게 당황했다.

물론 그동안 유금필의 말이 백발백중 계속 들어맞았다. 그래서 고창 전투에서처럼 유금필에게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장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장수들은 납득을 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대장군. 대장군도 병법에 능하니 알지 않습니까? 진짜 궁지에 몰리면 절대 겉으로 약한 소리를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군영에 오래 있어봐서 압니다. 견훤이 저런 서신을 보낸 것은 여유가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장군은 결전을 벌이자고 하니."

홍유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왕건도 곁에서 홍유를 거들었다.

"내가 나라를 다스려보고 군사도 지휘해 봐서 안다. 훙유의 말이 옳다. 책상 앞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라. 전투 중에는 아무리 힘든 처지에 놓여도 겉으로는 절대 약한 말을 할 수 없다."

왕건은 아무래도 이번 싸움을 피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 것 같았다.

"저로서도 참 난감합니다. 폐하와 여러 장군들의 말이 옳습니다. 100번 중에 99번은 폐하와 장군들의 말대로 일이 흘러갑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다릅니다. 뭐랄까? 허허허 이걸 어찌 설명해야 할지. 어쨌든 이번에 우리가 진군하면 백제군을 이길 수 있습니다. 물론 후퇴해도 딱히 손해될 일은 없습니다."

유금필이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음."

유금필이 그러니 왕건도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참 이런 걸 보면 왕건도 전장에서는 견훤에게 항상 밀렸어. 그래도 유금필이 곁에 있어서 이겼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내가 은근슬쩍 숟가락을 올려도 되겠는데? 원래 이번 전투는 내가 끼어들 공간이 없을 줄 알았는데.'

지금 유금필은 진군하면 이긴다는 확신이 있었다. 다만 그 이유를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래의 사학도인 나는 유금필의 직관에 다른 사람들도 납득할만한 그럴듯한 설명을 덧붙일 수 있었다.

"대장군의 말씀대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가 불쑥 그리 말했다.

"정윤비 마마."

다른 장수들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왕무도 깜짝 놀라서 나를 바라보았다.

"대장군의 말씀이 이전에도 옳았으니 이번에도 옳을 거라는 것이 아닙니다. 견훤의 몹시 독특한 성정을 고려하면 복잡한 수 싸움은 필요 없습니다. 견훤이 약한 소리를 하면 백제군의 상황이 진짜 안 좋다는 것입니다. 불과 몇 년 전 거란의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멸망시켰을 때도 발해국왕을 포로로 삼고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통상적으로는 설사 종족이 다른 나라라 하더라도 그런 법입니다. 그런데 견훤은 서라벌에 들어가서 굳이 신라국왕을 죽였습니다. 결국 견훤은 본인 마음대로 하는 사람이지 복잡한 수싸움을 하거나 뒷일을 생각하는 성격은 아닙니다. 통상적인 경우와 다릅니다. 고창 전투에서도 정석은 퇴로를 확보하고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고려가 정석을 어기고 진군해서 그 전투에서 이겼습니다. 견훤을 상대할 때는 정석에 구애받아서는 안 됩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 장내의 장수들을 향해 열변을 토했다. 미래의 사학도라서 나는 내 말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견훤 말년의 행보를 보면 더 확실해진다. 결국 견훤이 몇 년 뒤에 고려군 대장이 돼서 백제를 친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그런데 그 일이 벌어질 정도니 견훤의 성격이 몹시 별나지.'

어쨌든 내가 확실하다고 하자 장수들도 솔깃해 하는 표정이었다. 한쪽에 있던 유금필도 박수를 치며 말했다.

"소장의 생각을 정윤비 마마께서 잘 표현해주셨습니다. 정윤비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리고 왕건도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그래 한번 싸워보자.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이고. 대장군! 대장군이 선봉에 서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망설이던 다른 장수들도 왕건의 결단이 떨어지자 일제히 군례를 올렸다.

'음 졸지에 내 말을 듣고 왕건이 결단을 내린 것 같은 상황이 됐네. 원래는 유금필 말만 듣고도 왕건이 고민하다가 진격하는데. 잘 됐다. 멋지게 숟가락을 올렸어.'

왕건의 명을 받은 고려군사들은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물론 나는 후방의 군영에서 일부 문관, 군사들과 머물게 되었다.

"만에 하나 전세가 불리해져 후퇴해야 하면 망설이지 말고 바로 달아나세요. 국선. 내가 유금필 장군과 함께 선봉에 서게 돼서 후방의 국선을 살필 수가 없습니다."

왕무는 걱정이 되는지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전하와 함께 저도 선봉에 설까요? 폐하께 청을 드리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전하께서 저를 보살펴주시면."

나는 반쯤 농담삼아 말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국선은 후방에서 전황을 잘 살피다가 움직이면 됩니다."

왕무가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투구를 써도 수려한 왕무의 얼굴이 굳어있었다.

"알겠습니다. 후방에 있다가 전세가 불리해지면 즉시 빠져나가겠습니다. 그런데 그럴 일은 없습니다. 백제군은 쉽사리 무너질 것입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견훤이 이번에 군사 5천명을 짜내서 나온 것은 상당히 무리를 한 것이었다. 그래서 막상 전투에 돌입하자 순식간에 백제군이 무너졌다고 사서에 나와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 대장 중에 다치거나 죽은 사람도 없어. 즉 난 왕무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거. 그런데 왕무는 미래를 모르니 걱정을 할 수밖에 없지.'

나를 걱정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왕무를 보니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알겠습니다."

왕무는 내 격려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 올랐다. 그리고 전투를 위해 기병들과 함께 군영을 나섰다.

나는 군영에 세워진 망루 위에 올라가서 고려군과 백제군을 내려다봤다. 전투 상황이 한눈에 보였다.

양측이 진형을 갖추는 데만 시간이 한참 소요되었다.

'저기 왕무다! 깃발이 보여.'

나는 수많은 고려군 깃발 중 겨우 왕무의 깃발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깃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겨우 진형을 갖춘 양군은 충돌하기 시작했다. 유금필의 깃발이 선두에서 백제군을 향해 돌격했다. 그 뒤를 왕무의 깃발이 바로 따라갔다.

그러더니 잠시도 못 버티고 백제군 쪽 깃발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금필의 깃발은 계속 전진하며 백제군을 대형을 뚫고 있었다.

'사실상 전투는 끝난 거나 다름없어. 사서에 나온대로 고려군의 대승리야.'

그런데 막상 깃발들이 나부끼는 것을 바라보니 내 가슴은 몹시 뛰었다.

'왕무는 무사하겠지? 당연히 무사하지. 모든 게 역사대로 흘러가니까. 그런데 내 가슴이 왜 이럴까?'

"헉헉."

나는 가슴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왕무가 전장에 서있다고 생각하니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다치지도 않고 죽지도 않지만 참전하는 거 자체가 고통이지. 나처럼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왕무는 얼마나 힘들까? 공포도 느끼고 조마조마하기도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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