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39화 (139/216)

< 139 : 초조 >

"태자는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거란족과 싸워봤나?"

왕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거란의 군세가 막강해서 정면으로 싸우기는 어려웠습니다. 그저 거란군 소부대 몇몇과 싸우며 겨우 사람들을 구해서 이리 내려왔습니다."

대광현이 무거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발해국 기병들로는 거란족과 아예 상대가 안 될 정도인가?"

"그건 아닙니다. 충분히 준비를 하고 말갈 기병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거란 군사들과도 맞설 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쟁 초반 너무 허무하게 수도인 상경을 내줬습니다. 그 이후에는 거란 군사들을 상대할만한 규모의 기병을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란군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광현의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다.

"자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왕건은 그런 대광현에게 술을 한잔 따라주었다.

"다시 한번 저희들을 받아주신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술을 받은 대광현은 왕건에게 절을 하려했다.

"그냥 가족모임에 초대한 것이니 너무 예를 차리지 말도록."

왕건은 손을 휘저으며 그런 대광현을 말렸다.

'왕건에게는 저리 굽신거리면서 왕무와 만날 때는 왜 그랬어?'

나는 떨떠름하게 대광현을 바라보았다. 대광현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커흠."

한쪽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황보제공이 헛기침을 했다. 황보제공도 왕건의 장인이니 당연히 가족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지금 개경에 있는 왕건의 장인들은 다 모여있었다. 유금필도 참석해서 대광현을 따라온 발해의 장군 신덕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슬쩍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유금필도 거란군사들에 대해 묻고 있었다. 그쪽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이게 무슨 가족모임이야? 사실상 고려 조정이지. 아버님도 사돈이라고 이 자리에 참석하셨으니.'

임희는 발해의 좌우위장군을 역임한 대심리란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발해인들과의 화합을 다지자고 왕건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폐하."

그리고 장내에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귀여운 소년 하나가 왕건에게 다가갔다.

"오. 심심하냐? 이리 오너라."

왕건은 웃으면서 그 소년을 자기 옆에 앉혔다.

"내 아들이요. 왕요. 왕요라 하지."

그리고 왕건은 웃으면서 대광현에게 왕요를 소개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니 진정이 안 돼서 물을 들이켰다.

'저 소년이 고려 3대왕이 되는 정종 왕요다. 왕무가 죽자마자 냉큼 왕식렴과 유긍달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차지하지. 벌써 12살이나 되다니.'

12살이면 이런 모임에 나와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왕건이 왕요도 부른 것이다.

"하하하."

왕요가 뭐라고 속닥거리자 왕건이 웃는 모습이 보였다.

'왕건 이 배신자! 그건 그렇고 12살밖에 안 됐는데 쟤는 말을 왜 이렇게 잘해? 그리고 귀엽긴 귀엽네. 왕건 나이가 이미 50대인데. 저런 어린아이가 애교를 떨면 넘어갈 수밖에.'

나는 왕요의 등장에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왕요의 뒤에는 막강한 충주 세력이 있었다.

나는 힐끔 왕무 쪽을 바라보았다. 왕무도 왕요의 등장에 심기가 불편한 것 같았다. 상당히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왕무도 왕건에게 애교를 좀 떨어야 하나? 아니야. 이미 왕무 키가 왕건보다 큰데. 그건 무리고. 하아. 미치겠네.'

나는 화가 나서 술을 퍼마셨다.

왕건이 발해인들을 위해 연 가족 모임은 별 탈 없이 끝났다. 왕건은 웃으면서 대광현을 전송하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나도 나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내 곁에는 왕무와 몇몇 시녀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화가 난 상태에서 술을 먹어서 그런지 너무 취한 것 같았다. 거기에 왕궁 자체가 언덕비탈에 지어져서 올라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내가 휘청거리며 걸으니 곁에서 왕무가 걱정스레 외쳤다.

"국선."

그러면서 왕무가 다가오는데 그 순간 나는 발목이 꺾이는 것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악."

"정윤비 마마."

놀란 시녀들이 부르짖었다.

"내가 국선을 데리고 가겠다. 너희들은 나주원에 먼저 가서 약을 준비해라."

왕무가 그런 명을 내렸다.

"예."

시녀들은 고개를 숙이고 나주원으로 달려갔다.

'술에 취한 채로 언덕길을 오를 때는 조심해야 해.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있었어. 진작 왕무에게 부축을 받고 가야 했는데.'

내가 후회하는 사이 왕무는 나를 아예 업고 나주원까지 달려왔다.

'역시 전장에서 활약하는 사람이라 힘이 좋아.'

나는 왕무의 등판에서 느긋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데 왕무는 매우 초조한 것 같았다.

"내가 직접 국선을 치료하겠다. 약과 부목, 면포를 들여라!"

시녀들은 왕무의 표정을 보고 심상치 않다고 여겼는지 빠르게 움직였다.

'부목을 거론하는 걸 보니 왕무는 내 발목이 부러진 줄 아는 것 같아. 좀 민망하네. 그 정도는 아닌데.'

처음 발목이 꺾였을 때는 엄청 아팠는데 왕무에게 업혀 오는 와중에 서서히 통증이 가라앉았다. 약간 삔 정도지 많이 다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왕무가 너무 요란을 떨고 있었다.

다급하게 처소로 들어온 왕무는 재빨리 나를 침상에 눕혔다.

"전하. 너무……"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려 하는데 왕무는 신속하게 움직였다. 빠르게 내 신발과 버선을 벗긴 왕무는 내 치마를 걷어 올리고 발목과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강하게 힘을 줘서 이곳저곳을 누르며 물었다.

"아픕니까?"

"안 아픕니다."

내가 대답하자 왕무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뼈가 부러지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약만 좀 바르면 닷새 안에 나을 것입니다. 나는 군영에서 오래 지내서 이런 치료는……"

그러다가 왕무가 순간 말을 멈추었다. 왕무의 얼굴이 점점 상기되고 있었다. 나도 뭔가 상황이 묘하다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는 치료를 위한 것이라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 모습이……'

나는 침상에 누워서 치마를 걷어 올려 맨다리를 드러낸 상태였다. 왕무는 그런 내 다리를 부여잡고 발목을 살피고 있었다.

"약을 우선 바르겠습니다."

왕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약을 발목에 바르기 시작했다.

'갑자기 발목이 저릿저릿하고 다리도 떨려.'

하지만 그 증상에 관해서 왕무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발목이 꺾여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나는 어느 정도 왕무를 좋아하는 거야.'

나는 서라벌 구원전 때 그것을 실감했다. 왕무가 곁에 없으니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왕무가 내 곁에 있어야 해! 나한테 이 정도까지 해준 사람이 왕무 말고 있었나?'

가족을 빼면 김선우일 때나 임연우일 때나 그런 사람은 없었다.

'아니지. 왕무는 내 남편이니까 가족이구나. 그런데 아직 진정한 부부가 된 느낌은 아니야. 역시 진짜 부부가 되려면……'

그런 내 뇌리에 왕요를 곁에 앉히고 웃던 왕건의 얼굴도 떠올랐다. 물론 왕건이 옆에서 어린 아들이 재롱을 피운다고 왕무를 버릴 사람은 아니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왕건은 왕무를 어느 정도 밀어주고 왕위도 확실하게 물려줘. 하지만 밀어줘도 충분히 밀어주지 못해서 왕무가 결국 그리되지. 이 역사를 바꾸려면 왕건의 총애를 더 받아내야 해. 그러기 위해선 왕무와 나 사이의 아이가 필요하다. 왕건에게 재롱도 피우고 우리의 후계자가 돼 줄.'

미래의 역사를 아는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답을 실천할 수는 없었다.

'사서를 보면 왕무와 임연우 사이에 확실히 아이가 있었어. 결국 내가 결심만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란 거야. 그런데……'

술에 취해서 그런지 그다음 생각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왕무가 상기된 표정으로 외쳤다.

"국선."

그러더니 왕무가 그대로 내 위에 올라타 입을 맞추었다. 나는 내 입 안에 들어오는 왕무의 혀를 느꼈다.

'때가 온 건가?'

그동안 여러 번 입맞춤을 했지만 이런 자세는 처음인 것 같았다. 나는 온몸으로 왕무의 몸을 느끼고 있었다. 왕무의 육중한 몸에 깔려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기분좋은 압박감이었다.

'입맞춤이나 껴안는 것은 남자끼리도 풍습상 그러는 곳이 있어. 그래 그동안은 그런 지식을 떠올리며 방패막이로 삼았는데. 하지만 남자끼리 마지막까지 가는 것은……끌리고 좋아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거기까지 떠올리자 나는 잠시 서글퍼졌다. 하지만 내 위에서 입을 맞추는 왕무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한참 입을 맞추던 왕무가 입술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이제 옷을 벗는 건가?'

나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 그런데 왕무가 약간 쑥스러워하는 어조로 말했다.

"오늘은 국선이 발목을 다쳤으니 침상을 따로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자다가 발목을 건드릴 수도 있고."

머리를 긁적이며 내 곁에 잠시 서 있던 왕무는 이불을 정리하고 자기 침상으로 가버렸다.

'이걸 참을 수 있다니.'

나는 멍하니 그런 왕무를 바라보았다. 나는 같은 남자라서 지금 상황에서 참는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무에게 어디까지 신세를 지는 건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이 가벼워지긴 했다.

다음날 나는 절뚝거리며 한림원으로 향했다.

"아니 연우야! 다쳤니?"

왕건이 그런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한림원 학사들도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어제 좀 삐었습니다."

"부러진 건 아니고? 말을 오래 못 타는 것 아니냐?"

왕건이 꼬치꼬치 캐물었다.

"닷새면 나을 것입니다."

나는 왕무를 굳게 믿고 있어서 왕무가 해준 말을 왕건에게 그대로 해줬다.

"참 다행이다. 조만간 출전해야 하는데. 연우 너도 가야지. 하마터면 가마를 타고 갈 뻔했다."

왕건의 그말에 주변에서 동요가 일었다.

"출전이라면?"

김악이 묻자 왕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앉아서 견훤이 죽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몇년이 걸리든 계속 백제를 몰아쳐서 이젠 끝내야겠다. 곧 운주성을 공격할 것이다. 운주성에 대한 자료를 좀 모아와라."

왕건이 학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왕건의 명을 받은 학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정윤도 이번에 함께 출전할 것이다. 정윤도 이번 기회에 웅천주 일대의 지리를 익혀둬야지. 원래는 내일 어전에서 말하고 한림원에도 명을 내리려고 했는데 연우 네가 다친 것을 보고 말을 하게 됐구나. 다친 너를 데려간다고 서운해하는 것은 아니겠지?"

왕건이 나를 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저희들을 생각하시는 폐하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왕건은 확실히 왕무를 밀어주려 하고 있었다. 이번 일도 왕무가 백제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울 수 있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나까지 함께 출전하면 왕무의 공이 더 커지는 거야. 그래서 왕건이 굳이 나도 데리고 가려는 거고. 그동안 내 활약 때문에 대호족들도 내 출전을 막을 명분은 없다. 그건 그렇고 어느덧 운주성 전투까지 왔다. 이젠 시간이 별로 없어.'

그동안은 항상 어느 정도 시간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새 삼한통일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이제 삼한통일까지 2년밖에 안 남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엄청난 사건들이 계속 터져. 그것들을 적절히 이용해야지. 나도 확실히 결단을 내려야 해.'

나는 그런 다짐을 하며 한림원의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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