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 낙타 >
"……그래서 아마 발해 유민들이 정윤 전하께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나는 나주원의 처소에서 왕무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역시 이번에도 국선의 생각대로 됐습니다."
왕무는 차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왕무의 모습을 보고 나는 약간 실망했다.
'3만의 발해 유민들을 휘하에 넣었는데 왜 이리 반응이 미지근하지? 그 중에서 군사로 쓸 수 있는 숫자만 수천 명은 될 텐데. 거기에 수도 개경 근처인 백주에 정착하니 더 좋고. 역시 중간중간 왕무에게 이와 관련해서 언질을 줘서 안 놀라는 건가?'
발해유민 정착촌을 시찰하러 갈 때 왕무와 함께 갔다. 왕무가 창고 건설을 지휘하기도 했다. 왕무도 발해유민과 관련된 일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왕무가 안 놀라니까 흥이 하나도 안 나네. 쳇.'
나는 시무룩해져서 침상에 누웠다. 그런데 왕무가 내 곁에 앉더니 말했다.
"발해 유민들과 관련해서 사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나는 왕무가 그리 말하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서 몸을 다시 일으키며 물었다.
"발해유민들이 거란을 피해 마음 편하게 살려고 고려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끌어들여 내 세력으로 삼으면 그 사람들이 어찌 살지? 마음 편하게 지낼 수는 없겠지요."
왕무가 약간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왕무의 말이 옳긴 옳아서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확실히 나와 왕무가 살겠다고 발해 유민들을 고려 내부의 권력투쟁에 끌어들이는 격이었다.
'그런데 발해 유민 아니면 우리가 딱히 끌어들일 세력이 없어. 이거 참.'
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왕무가 내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나중에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거란을 물리치고, 발해 사람들을 위해 고향땅을 회복시켜주면 됩니다. 그렇게 그들에게 보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왕무의 어조는 진지했다. 당황하는 나를 위로하려고 이런 말을 꺼낸 것 같았다. 그리고 왕건도 그렇고 왕무도 그렇고 진지하게 북벌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지금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기는 했지만 발해 땅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니. 하지만 결국은 안 되는데.'
미래에서 온 나는 결국 옛 고려의 땅을 회복하지 못한다는 역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왕무의 말을 들어도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나를 살피던 왕무가 나를 품속에 끌어안은 채 침상에 누웠다.
나는 자연스레 왕무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되었다. 왕무는 부드럽지만 강한 힘으로 나를 껴안았다.
그렇게 안겨있으니 나는 걱정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래 미래 지식이 있는 내가 있는데 역사가 그대로 진행되지는 않아. 내 실력으로 북방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회복해서 대광현에게 떼주면 되겠지. 거란족이야 뭐 대충 처리되겠지.'
나는 마음이 편해지자 눈이 감기는 것을 느꼈다. 왕무의 허리춤을 끌어안은 채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한림원에서 왕건이 말했다.
"연우 네가 정윤과 함께 발해태자 대광현을 위해 개경교외로 마중을 나가야겠다. 어전에서 정윤에게 이미 명을 내렸다. 나만 믿고 오는 사람들이니 따뜻하게 환대를 해야 마음을 놓지. 그러니 정윤과 네가 직접 나간다고 고깝게 생각하진 말고."
"고깝게 생각할 리가 있겠습니까? 발해 태자에게 예를 다하겠습니다."
나는 왕건 앞에서 굽신거리며 말했다.
"연우 너만 믿는다. 유민들이 오면 대호족들이며 백성들이 진짜 온갖 걸로 트집을 잡는다. 유민들이 이웃이 되니 싫은 거지. 발해 사람들과 우리가 말은 통하지만 풍속 같은 게 달라요. 예전에 발해인 하나가 왔을 때 절하는 횟수를 두고도 대호족들이 시비를 걸었어. 그러니 진짜 아무 일 없이 끝나게 연우 네가 힘을 좀 써라."
왕건이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매만지면서 말했다. 유민을 받는 것에는 온갖 복잡한 일이 수반되는 것이다.
"심려치 마십시오."
내가 믿음직스럽게 대답하는데 왕건이 또 은근히 어조로 말했다.
"내가 보고를 받아보니 발해 태자가 엄청 잘 생겼다더라. 흐흐흐. 그런 발해 태자를 한번 만나보면 연우 너에게도 이득 아니겠니?"
"……"
발해 유민들을 받는 결단을 내린 왕건을 존경할 뻔했는데 이러는 것을 보니 말이 안 나왔다. 그런 우리 곁에서 대내학사 김악이 말했다.
"안 그래도 그 소문이 퍼져서 개경의 백성들이 발해태자가 오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서경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발해태자의 얼굴을 보려고 모였다는 풍문을 들었습니다."
"아주 일이 잘 풀리는군. 발해 태자가 잘생겨서 다행이야. 그러면 백성들이 또 별 거부감 없이 유민들의 정착을 받아들이게 되거든. 이런 소문을 더 퍼뜨려야 해!"
왕건이 신이 나서 두 손을 치켜들며 말했다.
"그러다가 사람들 기대만큼 잘생긴 게 아니면 어떡하죠?"
김악이 걱정스레 말했다.
"그냥 소문을 퍼뜨리고 봐야지. 뒷일은 나중에 수습하면 돼. 당장은 기대감을 줘야 해. 다들 집에 가서 열심히 발해 태자가 잘생겼다고 해."
왕건은 아예 한림원 학사들을 둘러보며 명을 내렸다.
개경 교외에서 나와 왕무, 박술희는 군사들과 함께 발해 태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리 사람들이 많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발해유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겠다고 이리 나올 사람들이 아닌데?"
곁에 있는 박술희가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군영에서 지내는 장수라 그런지 정보에 어두운 것 같았다.
나는 박술희에게 돌고 있는 소문에 대해 이야기 해줄까 하다가 왕무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왠지 왕무 앞에서 다른 남자가 잘생겼다고 말하기는 싫어.'
박술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계속 주위를 둘러보다가 주머니에서 무슨 곤충 튀김을 꺼내서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멀리서 흙먼지가 휘날리는 것이 보였다. 발해 태자 대광현이 휘하 발해 중신들을 데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물론 무장병력이 포함된 3만 명의 발해유민들을 모두 이끌고 오는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발해인들은 이미 백주 곳곳에 분산 수용되었다.
다만 대광현은 자신들을 받아준 왕건에게 감사인사를 하기 위해 중신들과 소수의 군사들만 데리고 오는 것이다.
"오오오. 저건 뭐지?"
"꺄아악. 소문대로다. 저게 발해 태자다."
발해 태자를 보기 위해 몰려온 백성들이 그렇게 외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마침내 발해인들이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낙타를 탄 사람이 대광현인가?'
낙타를 타고 화려하게 치장한 청년이 발해 사람들을 선두에서 이끌고 있었다.
'특이하게 낙타를 타고 왔네. 하긴 이 시대에 거란족도 그렇고 북방에서 낙타를 전쟁에서 자주 썼어. 대광현은 북방에서 오래 싸웠으니.'
나와 왕무, 박술희도 말을 몰아 발해인들 가까이 갔다. 낙타를 탄 청년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발해 태자 대광현이라 합니다."
"고려 정윤 왕무."
왕무도 담담한 어조로 자기 소개를 했다.
"정윤비 임연우입니다."
나도 곁에서 인사를 했다.
'솔직히 잘생기긴 잘생겼는데. 뭐랄까? 피부가 너무 희고 입술도 너무 붉어. 귀걸이까지? 물론 이 시대는 남자도 취향에 따라 귀걸이를 했지만. 왠지 모르게 못마땅하네. 뭔가 불안한 얼굴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왕무를 힐끗 바라봤다. 왕무는 참 청순하고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얼굴이었다. 내가 흐뭇하게 웃는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꺄아아악. 발해 태자다!"
백성들이 은근슬쩍 가까이 다가와서 대광현의 얼굴을 보고 외치는 것이다. 그런 백성들의 반응을 보니 나는 약간 떨떠름해졌다.
"물러나시오."
박술희가 끌고 온 군사들이 몰려드는 백성들을 막았다. 그런데 왕무와 대광현 사이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왜 둘 다 말과 낙타에서 안 내리고 버티고 있어?'
이미 한쪽에 대광현과 발해인들을 위해 천막을 준비해 놨다. 그 안에서 간단히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개경에 입성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왕무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 대광현도 계속 웃으면서 낙타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안했다.
'설마 기싸움? 왠지 먼저 내리는 쪽이 지는 분위기 같네. 왜 이래?'
내 뇌리에 문득 발해인들이 절을 하는 횟수로도 논란이 일었다고 하던 왕건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아니 그래도 신세를 지러 온 대광현이 먼저 낙타에서 내려야지.'
나는 내심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유민들을 이끌고 거란과 맞서 싸운 대광현도 호락호락하지는 않는 거 같았다.
'이걸 잘 수습해야 하는데.'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대광현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이 동물은 무엇인가요? 말은 아닌데 말과 흡사하고."
나는 낙타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낙타라는 동물입니다."
"낙타라. 이게 그 낙타인가요? 책에서만 그 이름을 듣고 직접 보기는 처음이예요. 한번 타보고 싶은데 부탁드려도 될까요?"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대광현은 그대로 낙타에서 뛰어내렸다. 나도 그와 동시에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낙타에 가까이 다가가서 한번 타보려고 했다.
대광현이 지시하니 낙타가 무릎을 굽혔다.
그런데 낙타 등이 상당히 높아서 내가 올라타기가 만만치 않았다. 나는 난감한 기색으로 낙타를 바라봤다.
"흠 제가."
대광현이 헛기침을 하며 가까이 다가오는데 어느새 말에서 내린 왕무가 내 곁으로 달려왔다.
"국선."
그러더니 왕무가 나를 받쳐줘서 나는 낙타에 올라탈 수 있었다. 애초에 나는 왕무와 대광현의 기싸움을 끝내려고 낙타에 한번 타겠다고 한 것이다.
잠깐 올라타 있다가 나는 금방 낙타에서 내렸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대광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태자 전하 덕에 귀한 경험을 해봤습니다. 발해 군사들은 낙타를 많이 이용합니까?"
"낙타가 싸울 때 유용해서 즐겨 쓰고 있습니다."
대광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그럼 저쪽에서 차나 마시며 이야기를 더."
나는 미리 설치해둔 천막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연스레 사람들이 천막으로 향하는데 내 곁에 있던 왕무가 불쑥 말했다.
"국선. 우리 고려의 목장에도 낙타를 기르고 있습니다. 교동도의 목장은 남쪽에 있어서 낙타가 없었던 겁니다. 북방의 목장에는 수가 많지는 않지만 낙타들도 기르고 있습니다."
왕무가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나도 이미 알고 있는데.'
그런데 왕무가 저리 말하니 왠지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저도 처음 들었습니다. 나중에 꼭 전하와 함께 우리 고려의 낙타를 구경하고 싶습니다."
내가 왕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대광현이 곁에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말했다.
"정윤비 마마의 명성은 저도 어렴풋이 들었는데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좀 어이가 없어서 대꾸했다.
'내가 어느 정도 명성이 있더라도 거의 남쪽에서 활약한 거 같아. 그런데 북방에서 온 대광현이 내 이름을 들었다고?'
그런데 대광현이 말을 이었다.
"평양 사람들이 정윤비 마마의 신통력 덕에 상선을 잃지 않았다고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거기에 더해 수탉으로 변한 암탉을 되돌리셨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평양에서는 그 이야기를 듣고 믿지 않았습니다만. 하하하."
대광현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대광현이 거짓말을 친 건 아닌가? 확실히 서경 사람들은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테니. 서경을 거쳐 온 대광현이 내 이름을 들어봤겠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왕무가 내 손을 더 세게 쥐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