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37화 (137/216)

< 137 : 청출어람 >

"발해국 사람들이 온다는 징조라?"

그리 중얼거리던 왕건은 나와 왕만세가 온 것을 발견하고 반색을 하며 다가왔다.

"만세야. 이렇게 궁 안에서 보게 되다니 반갑구나. 그런데 왜 왔니?"

"정윤비 마마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궁에 왔다가 영물이 등장했다는 소식을 듣고 와봤습니다. 그런데 저런 토룡은 처음 봅니다."

왕만세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지렁이를 보며 말했다. 확실히 보기 드문 길이의 지렁이이긴 했다.

왕만세도 이 시대 사람이라 그런지 영물, 점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허허허."

왕건은 왕만세의 표정을 보고 왠지 모르게 흡족한 기색이었다. 그러던 왕건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말했다.

"안 그래도 연우 너를 부를 참이었다. 네가 그동안 발해 유민과 관련된 일을 도맡아 했지. 그러니 백주의 발해 정착촌과 관련된 보고서를 좀 준비해서 나한테 주렴. 구체적인 상황을 내가 알아야겠다. 식량이나 여러 물자들이 상당히 필요할 수 있어. 모자라는 게 있으면 내가 좀 보태마."

왕건의 말을 듣고 나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왕건이 자기 물자를 보탠다고 말하다니. 뭔가 일이 물밑에서 엄청 진행됐나보군. 발해 유민들이 대규모로 오는 게 확실한 것 같다.'

수염을 쓰다듬던 왕건은 시종들을 향해 명을 내렸다.

"저 토룡을 저리 그대로 둘 수는 없다. 나무 상자라도 하나 가져와서 흙과 함께 토룡을 담아 보살펴라. 백성들에게도 좀 구경시켜줘야지."

왕건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시종들은 어디선가 긴 나무상자 하나를 가져와서 흙과 함께 지렁이를 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왕건이 말하자마자 딱 알맞은 나무상자가 나왔어. 저런 나무상자는 평소에 잘 안 쓰는 형태라서 목수에게 새로 만들라고 명을 내려야 할 텐데. 왕건이 어디 밖에서 저런 지렁이를 구해다가 궁에다 묻어두고 이런 일을 꾸민 게 확실하다.'

확실히 이 시대에는 지렁이를 이용한 정치공작이 횡행했다.

'용과 비슷하다고 뱀 같은 걸 이런 공작에 이용하면 구하기도 힘들고 사람이 다칠 수도 있고. 지렁이는 징그럽긴 해도 어쨌든 안전하고 농사에 도움이 되는 존재니. 커다란 지렁이를 구해다가 이런 식으로 이용해 먹으면 유용하겠지. 나도 이런 방식의 정치공작을 연구해서 나중에 써먹어야지.'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 사이 시종들은 지렁이를 흙과 함께 나무상자에 담아 한쪽으로 가져갔다. 볼거리가 사라지니 구경꾼들도 흩어지기 시작했다.

왕건도 자신의 처소 쪽으로 돌아가다가 왕만세 앞에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우리 고려국 왕만세. 계속 수고해."

"고려국 왕만세.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그러자 왕만세가 충직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왕만세는 뭘 알고 저러는 걸까?'

곁에서 지켜보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어쨌든 나는 궁에서 지렁이를 보고 즉시 상산저로 달려갔다. 일을 마친 임희도 마침 딱 저택에 있었다.

"아버님. 북방에 사람을 보내야겠습니다. 발해 유민들과 관련해서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습니다. 그쪽 사정을 살펴야 합니다."

그리 말하고 나서 나는 방금 전 궁에서 있었던 일을 임희에게 말해주었다. 임희도 왕건의 오랜 친구라 왕건이 즐겨 쓰는 수법에 대해 잘 알았다.

"폐하께서 그리 운을 띄우셨다면 네 말대로 북방에 일이 생기겠구나. 우리 쪽 사람이 이미 서경에 있다. 그 사람들이 조만간 무슨 연락을 해올 거다."

정윤파도 상산의 합류로 어느 정도 세력과 재력을 갖추고 활동하고 있었다. 권력 투쟁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였다. 그래서 임희는 진작 서경에 사람을 심어둔 것이다.

'아마 다른 대호족들도 궁에서 생긴 일을 듣고 일제히 북방으로 사람을 보낼 것이다. 북방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는지 조만간 파악할 수 있겠군. 나도 미래 지식이 있어서 대광현이 온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 규모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역사서에는 수만명 정도로만 적혀있으니.'

다음날 나는 의기양양하게 왕건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발해 정착촌에 비축한 식량, 물자, 우물의 수를 자세히 적은 보고서였다.

왕건은 유심히 그 보고서를 읽더니 떨떠름하게 말했다.

"혹여 내 신임을 얻으려고 당장 수치만 그럴 듯하게 적은 거면……나중에 큰일난다. 정직하게 말해야지."

"아니 제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니 그런데 이렇게 알맞게 막대한 식량을 비축해놨다고? 어떻게? 이제까지는 발해유민들이 수백 명씩 왔다. 그런데 연우 너는 족히 수만 명을 감당할 식량을 준비했어. 물론 이게 사실이면 좋긴 하다만. 일이 이리 좋게 풀릴 리가?"

왕건이 계속 나를 의심하며 말했다.

'왕건이 막대한 식량을 준비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대광현이 엄청난 규모의 유민들과 귀부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 그전에 사전공작으로 지렁이 일을 꾸민 거고. 왕건의 말을 들으니 더 확실하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준비해놨던 말을 꺼냈다.

"발해유민이 온다는 징조가 있었습니다."

"토룡이야 어제 등장했다. 어제 징조가 등장했는데 어떻게 지난 몇 년간 이런 준비를 할 수 있다는 말이냐?"

"사천감의 일관이 점괘 해석을 잘못한 것입니다. 토룡의 등장은 발해유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귀부를 가리키는 징조입니다. 하늘이 사람들에게 징조를 내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 터질 때 대비할 수 있는 시간 여유를 주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터지기 몇 년 전에 하늘의 징조가 있는 법입니다. 토룡도 몇 년 후에 어떤 사람이 고려에 온다는 징조입니다. 설혹 몇 달 뒤에 발해 유민이 고려에 귀부한다고 해도 그것은 토룡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나는 능청스럽게 열변을 토했다.

"아니 그럴 리가 있니? 토룡이야 내가 일부러 구해오라고 시킨……"

왕건이 뭐라 말을 하려다가 얼버무렸다. 다만 입이 간지럽다는 표정을 계속 지었다.

'내가 억지를 쓰니 왕건도 진실을 알려주고 싶겠지. 발해 유민이 온다는 걸 알고 밑밥을 깔려고 왕건 본인이 지렁이를 준비했다는 사실을.'

그러나 왕건 입장에서는 기껏 준비한 계략이 어그러질까봐 속 시원하게 진상을 말할 수도 없었다.

내 앞에서 왕건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앉아있는데 나는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몇 년 전에 몸뚱이가 두 개인 돼지가 태어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옛 고려의 수도였던 서경에서 몸뚱이가 둘인 돼지가 탄생한 것은, 역시 옛 고려의 후예를 자처하는 발해의 귀부를 뜻하는 것입니다. 돼지같이 뚱뚱한 동물로 하늘의 징조가 내린 것은 엄청난 수의 발해 유민들이 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그 이후 제가 식량을 많이 비축해놨습니다."

이런 개소리를 길게 늘어놓으려니 나도 민망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내 통찰력을 자랑하려면 이런 적당한 개소리가 필요해. 대뜸 미래를 예측하면 사람들이 오히려 의심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기이한 동식물이나 풍수를 보고 미래를 예측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긴가민가해 하면서도 받아들이거든. 나중에 예측이 맞으면 하늘의 징조를 잘 읽는다고 현인으로 칭송받고.'

내가 고려 정치판에서 몇 년 구르며 터득한 이치였다. 이런 수법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 왕건이었다. 그 왕건 곁에 있다 보니 어느새 나도 이런 그럴 듯한 궤변을 늘어놓을 수 있게 됐다.

"그런 돼지가 있었나?"

왕건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분명 있었습니다. 고창 전투가 있기 전에 돼지가 태어났습니다."

나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왕건을 보니 속이 터졌다. 그때 연전연패하던 왕건이 괴상한 돼지가 태어난 일로 어떻게 선동을 해보려고 나에게 뭐 없냐고 압박한 기억이 생생했다.

'그때 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데 왕건은 그걸 까먹고.'

그리고 나와 왕건의 대화를 듣던 대내학사 김악이 일지를 꺼내오더니 말했다.

"확실히 정윤비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런 돼지가 태어난 일이 있습니다."

내가 기고만장해져서 어깨를 쭉 펴는데 왕건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말했다.

"돼지가 발해유민이 온다는 징조였으면, 토룡은 누가 온다는 징조냐? 허허 정말 토룡이 하늘의 뜻이라고? 그럴 리가?"

왕건 본인이 발해유민이 온다는 것을 알고 토룡을 준비했는데 내가 아니라고 하니 아니꼬워하는 것 같았다.

"설사 어떤 사람이 의도를 갖고 토룡을 준비한 것이라 해도 그것 역시 하늘의 뜻입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폐하께서도 깨달으실 것입니다."

나는 위엄있는 어조로 왕건에게 말했다. 내가 암시하는 바는 명확했다.

'앞으로 몇 년만 있으면 견훤이 고려에 항복한다. 그 사건이 터지면 왕건은 필시 오늘의 일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토룡의 등장을 견훤과 연결시킬 수밖에 없어. 견훤 본인이 토룡과 인연이 깊기도 하고. 그러면 내 통찰력에 사람들이 놀라고 왕건도 앞으로 내 말을 더 믿을 수밖에 없겠지.'

다만 지금은 그 누구도 견훤이 고려에 항복할 거라고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얼마 전에 견훤이 수군을 일으켜 개경을 요격했다. 견훤이 한동안 더 버틸 힘이 있다고 모두가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도 노골적으로 견훤의 이름을 꺼내지 않고 교묘히 암시만 줬다.

내가 워낙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니 왕건도 움찔한 기색이었다. 우리의 대화를 듣던 한림원 학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래. 연우 네가 점괘며 징조에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줄 여태 몰랐구나. 누가 또 귀부하면 나에게 좋은 일이지. 어쨌든 연우 네가 이만한 식량을 준비한 것이 사실이라면 잘된 일이다. 네 공을 내가 잊지 않으마."

왕건이 그렇게 얼렁뚱땅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머지않아 개경 곳곳에 발해유민과 관련된 소문이 번지기 시작했다.

"발해태자 대광현이 따르는 무리 3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었다는군. 우리 국경 코앞에서 폐하께 귀부를 청했대."

"한참 동안 거란족들과 싸우다가 곤경에 몰려 남하했다는군."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역시 왕건은 대광현과 진작부터 연락을 하고 있었어. 왕건이 책임질 테니 오라고 해서 그 사람들이 압록강을 넘어온 거야.'

3만 명의 인원이 이동하면 비용이 엄청 소모된다. 왕건이 받아준다는 확신이 없었으면 대광현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궁에서 70척이나 토룡이 등장하더니 과연 발해인들이 오는군. 나무상자에 담긴 토룡을 한동안 거리에 전시했잖아? 자네는 그걸 봤나?"

"봤지 암. 징그럽고 설마 진짜 발해인들이 올까 생각했는데 신통하게 들어맞는군."

개경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다. 왕건의 정치 공작이 통한 것이다. 나는 발해 유민들의 귀부와 관련된 일을 의논하기 위해 상산저로 달려갔다.

"잘 됐다. 잘 됐어. 그 많은 발해유민들이 먹고 살려면 연우 네가 준비한 식량과 물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발해유민들에게 은혜를 베풀어두면 나중에 필시 우리에게 힘이 될 것이다. 허허허."

임희는 나를 보자마자 기뻐하며 말했다.

"어전에서 대호족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당연히 아니지. 황보제공은 예전에 신라에 귀부한 보덕국의 일까지 거론하며 반대를 하다가 폐하께 꾸중을 들었다. 발해 유민들을 받으려는 폐하의 뜻은 굉장히 확고하시다. 대호족들도 막을 수 없다!"

신중한 임희가 그 정도로 말할 정도면 일이 정말 확실한 것 같았다. 나는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 예상대로 됐군. 비로소 왕무가 유의미하게 세력을 늘렸어. 왕만세의 수군에 발해유민의 세력이 더해진다면야. 아직 대호족들을 압도하지는 못하지만 무시 못 할 세력이다.'

내 책략이 성공한 것은 왕건이 발해유민들을 받고자 하는 생각이 확고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국사시간에 책상에 앉아서 왕건이 발해유민 수만 명을 받았다는 것을 배우면 별 것 아닌 것 같고 당연한 일 같다. 그러나 이때 왕건의 결단은 엄청난 것이었다. 현대에도 만약 난민 3만 명을 받겠다고 정부가 발표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신라가 옛 고려 즉 고구려의 유민들을 받아준 일이 있었다. 그리고 신라 조정은 고구려 유민들이 자신들 영토 내에 보덕국이란 나라를 세우도록 허락해줬다.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보덕국은 한동안 신라와 협력해 당나라에 맞섰다. 그러다가 당나라를 몰아낸 이후에는 신라와 보덕국 사이에 결국 전쟁이 터져서 보덕국이 멸망하며 사태가 마무리 된다.

이처럼 무장한 유민들을 받아주는 일에는 상당한 위험이 따랐다.

'그럼에도 왕건은 평생 옛 고려의 땅을 회복하는 일과 발해 유민들을 구하는 일에는 진심이었어. 대호족들은 보덕국 이야기를 하며 왕건에게 반대하면 어느 정도 통할 거라 믿었겠지만…… 이 일 만큼은 대호족들이 반대해도 소용없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