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33화 (133/216)

< 133 : 쌍검 >

나는 유금필의 칭찬을 듣고도 뭐라 대꾸를 할 기력이 없었다.

'너무 힘들다.'

왕무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왕무와 헤어질 때 광경이 계속 떠올랐다.

'그때 일어났던 흙먼지의 모양도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왕무의 표정만은 흐릿하니.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알면 좋겠다.'

나는 유금필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부끄럽습니다. 정윤비 마마께서도 이리 침착하신데. 저희들이 이리 동요하다니."

"정윤비 마마와 대장군께 송구스럽습니다."

그러자 주변의 군사들이 나와 유금필을 향해 그리 말했다. 군사들은 하나같이 결연한 눈빛으로 몸을 일으켰다.

"비록 아불진과 혜산이 떨어졌다고는 하나 서라벌도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지형에 의지해 백제군과 겨루어볼만 하다. 허허허. 또한 서라벌에 모인 사벌주 호족들도 우리들을 맞이하러 나올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 광경을 보고 유금필은 흐뭇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백제군과 싸우자!"

군사들은 유금필의 설명을 듣고 함성을 질렀다.

'유금필은 이걸 노리고 나를 칭찬한 거군. 유금필은 사소한 뭐라도 이용할 게 있으면 다 써먹어. 참 알뜰해.'

나는 일이 돌아가는 것을 보고 유금필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 그럼 가자. 백제군이 서라벌 인근에 완벽한 포위망을 만들기 전에 돌파해야 한다!"

유금필의 명에 따라 군사들은 일제히 계립령을 넘기 시작했다.

나는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와중에도 말을 몰았다. 다행히 임연객과 호위군사들이 나를 살피고 있었다. 그래서 정신이 산만한 와중에도 나는 그럭저럭 일행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임연객이 감탄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고창성 전투 때 연우 네가 적지 않게 동요하지 않았니? 그런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서 이리 침착하니? 지금은 우리가 의지할 성도 없고 군사수는 더 적은데."

"음, 우리가 이겨."

나는 길게 대꾸할 힘이 없어서 대강 둘러댔다. 그러다가 임연객에게 묻고 싶은 것이 생겨 말을 이었다.

"혹시 구정에서 정윤 전하께서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는지 기억나?"

"정윤 전하께서 나오셨나? 폐하께서 나오신 것은 기억나는데. 설마 연모하는 정윤 전하 생각에 이리 침착한 거니?"

임연객은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소리!"

나는 뜨끔해져서 외치는데 임연객이 말 위에서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야. 농담. 지금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그럴 리가 없지."

임연객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더 심란해졌다.

'지금 내가……내가 왜?'

계립령을 넘은 유금필과 군사들은 그대로 서라벌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갔다. 지금 백제군은 서라벌을 공략하기 위해 부대를 나누어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그냥 백제군을 안 만나고 그대로 서라벌에 도착할 수 있다.'

나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다만 일이 그리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백제군이다!"

그런 고함 소리와 함께 임연객과 호위 군사들이 나를 둘러쌌다. 과연 멀리서 백제군의 깃발이 보였다.

백제군 주력은 아니었다. 정찰 아니면 포위망 구축을 위해 고지를 점령하러 나온 200명 정도 되는 부대였다.

그러나 200명이라고 해도 지금 고려군의 2배가 넘었다. 나는 백제군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에 하나 죽으면 영영 왕무를 못 본다! 이 애매한 관계를 어떻게 해결하지도 못하고.'

이제까지 나를 괴롭히던 상념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 공포가 느껴졌다.

"돌격하라!"

그런데 유금필은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그런 명을 내렸다. 유금필은 자신이 차고 있던 쌍검을 뽑아들고 선두에 섰다.

"쳐라!"

백제군도 기병들을 선두에 내세우고 달려왔다.

유금필은 말 위에서 교묘하게 몸을 움츠렸다. 그러더니 검을 휘둘러 백제군의 창을 튕겨내고 다른 손의 검으로 찔렀다. 유금필에게 맞서 싸우던 백제 기병은 그대로 떨어졌다.

'과연 대단한 솜씨다.'

나는 상당히 감탄했다. 그러나 싸움이 이어지면서 나는 서서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어떻게 저걸 계속?'

유금필은 말 위에서 몸을 움츠리고 어깨를 엉거주춤 구부린 채 계속 쌍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적을 막고 찌르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백제군 기병이 한명씩 굴러 떨어졌다. 고려 기병들은 그저 그런 유금필의 좌우와 뒤를 지키고만 있었다.

유금필의 손에 의해 10명이 넘는 백제군 기병들이 잠깐 사이에 쓰러졌다.

"어.어?"

백제군도 당황해서 감히 정면으로 고려군을 막지 못했다. 백제군은 진형을 좌우로 펼쳐서 고려군 대열의 측면을 찌르려고 했다.

정면의 유금필과 싸우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데 유금필은 그런 백제군의 움직임을 짐작이라도 한 것 같았다.

"좌로 튼다!"

유금필이 그리 외치며 말머리를 왼편으로 돌렸다. 고려 기병들도 그런 유금필의 뒤를 따랐다. 급하게 대형을 좌우로 펼치던 백제군은 고려군이 왼편을 치자 한 날개가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려군의 선두에서는 유금필이 특유의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저건 뭐 너무 얄미워 보이는데?'

유금필과 같은 편인 나도 순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유금필은 화려하게 검술을 펼치지도 않았다. 그저 쌍검으로 콕콕 쑤시기만 하는데 그때마다 백제군사들이 무너졌다.

어쨌든 유금필의 지휘 아래 고려군은 순식간에 적지 않은 백제군을 격파하고 길을 뚫었다.

"잠깐만 숨을 돌리자."

백제군을 돌파하고 거리를 벌리자 유금필은 쌍검을 집어넣으며 명을 내렸다.

"대장군!"

80명의 군사들은 모두 경악하는 표정으로 유금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곁에서 임연객도 나에게 몰래 속삭였다.

"아버님이 왜 대장군을 두려워하게 됐는지 오늘에야 알겠어. 고창에서도 대장군이 저랬구나. 대장군과 싸운다면 우리 상산 군사들도 잠시도 못 버티겠어."

임연객이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음."

나도 입맛만 다시고 아무 대답도 못했다.

'왕건이 왜 유금필을 보내는 것을 망설였는지 알겠군. 고창 전투 때는 유금필이 이것보다 더 크게 활약했을 거야. 그걸 왕건이 두 눈으로 보고도 유금필을 결국 믿고 보냈네. 왕건이 대단한 건가?'

나마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금필이 군사들을 향해 말했다.

"방금 전에 마주쳤던 백제군이 우리와 싸운 사실을 신검에게 보고할 거다. 그러면 신검이 군사들을 움직여 우리를 막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너무 염려하지 마라. 아마 서라벌에서 버티고 있는 호족들의 군사들도 백제군의 움직임을 보고 대응하러 나올 것이니."

유금필이 지세를 살피며 잠시 생각을 하다가 명을 내렸다.

"이쪽으로 간다."

고려군은 유금필의 뒤를 따라 나아갔다. 그리고 상당히 높아서 사방이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갔다. 거기서 잠시 쉬고 있을 때 군사들이 외쳤다.

"재암성주 선필과 안동 김선평의 깃발이 보입니다."

멀리서 휘날리는 깃발을 눈이 좋은 군사들이 본 것이다. 과연 말을 타고 달려오는 선필, 김선평의 모습이 보였다.

선필과 김선평은 군사들을 이끌고 우리가 주둔하고 있는 언덕으로 올라왔다.

"백제군의 깃발이 흔들리고 움직이는 것을 보고 무슨 변고가 생긴 것 같아 나와 봤습니다. 과연 대장군께서 오셨습니다. 정윤비 마마께서도 여기 오셨습니까? 이거 참.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오를 것입니다."

김선평이 우리를 보자 손을 흔들며 외쳤다. 선필도 곁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거느리고 온 군사가 꽤 많았다.

'이들과 합류했으니 안전은 확보 됐다. 이대로 서라벌에 입성할 수 있겠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유금필 곁으로 다가갔다. 앞으로 어찌할지 논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폐하의 명을 받고 우리들이 서라벌을 지키기 위해 모이긴 했지만 누구를 주장으로 세울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늙고 재주 없는 제가 주제넘게 나설 수도 없고. 이리 대장군이 와주시니 다행입니다."

선필이 그리 말했다.

"맞습니다. 서라벌에 군사들이 5천명이나 모였지만 주장을 세울 수 없으니 제각각 사방을 막고만 있었습니다. 대장군께서 서라벌에 입성하셔서 편제를 정해주십시오."

김선평도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서라벌에 모인 사벌주 호족들도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았다. 서라벌에 우선 들어가자는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서라벌 후방에서 내 안전을 좀 확보해 놔야겠어. 진짜 서라벌에서 왕건 말대로 화엄종 승려들이랑 만나서 정치 활동이나 해야지. 싸움은 유금필에게 맡기고.'

전투를 한번 겪고 나니 나를 괴롭히던 그동안의 몽롱한 상념이 싹 사라졌다. 예전의 나로 딱 돌아왔다. 목숨을 부지할 장소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유금필은 턱을 쓰다듬더니 물었다.

"지금 두 분이 거느리고 오신 군사들이 얼마나 됩니까?"

"700기 정도 됩니다."

선필이 대답했다.

"그럼 저기 보이는 저 개울의 이름은 뭡니까?"

"사탄이라고 합니다."

신라 승부에서 일을 한 경험 덕에 주변 지리에 익숙한 선필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우리가 저 개울을 넘어 백제군을 깨뜨리면 백제군 전체가 분단됩니다."

유금필이 사탄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럼 서라벌에서 정비를 한 뒤 저쪽으로 진출해야……"

김선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데 유금필이 가볍게 말했다.

"지금 당장 쳐야 합니다."

"예? 지금 당장이라면?"

선필이 당황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유금필이 말했다.

"여러분이 이끌고 오신 군사와 합치면 지금 공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선두에는 제가 설테니 뒤만 받쳐주십시오."

"대장군께서 멀리서 막 오셨는데 이리……"

선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묻는데 유금필이 말했다.

"백제 태자 신검도 군사를 상당히 잘 다룹니다. 우리가 지금 서라벌에 입성하면 반나절은 시간을 낭비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검은 아마 그 사이에 포위망을 단단히 할 것입니다. 지금이 신검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시기입니다."

"아니 그래도."

김선평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오자마자 싸우자고?'

나도 좀 황당했다. 무슨 이유는 없었지만 막연히 당장 싸우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정윤비 마마."

선필과 김선평 두 사람이 일제히 내쪽을 쳐다봤다. 내 의견을 묻는 것이다.

'고창 전투야 워낙 유명한 전투라 당시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어서 진군하자는 유금필의 말이 옳다는 걸 나도 알았어. 그런데 이 전투는 기록이 부실해. 유금필이 성공했다는 내용만 간략히 남아있어서. 에라 모르겠다. 유금필 말이 얼핏 듣기에는 이상해도 다 들어맞았잖아.'

그래서 나는 유금필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대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 진군해야 합니다. 다만 나는……"

나는 후방의 서라벌에 좀 가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유금필은 손뼉을 치더니 외쳤다.

"역시 정윤비 마마의 식견이 대단하십니다. 백제군이 준비하기 전에 나아가야 합니다. 준비해주십시오."

유금필은 내가 무슨 말을 꺼낼 틈도 안 주고 막 밀어붙였다.

'뭐야. 나도 데리고 공격하게? 나는 빼줘야지. 어어. 이러면.'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어느새 고려군과 선필, 김선평의 군사들은 돌격대형을 펼치고 있었다. 나도 그 가운데 있었다.

다만 선필과 김선평의 군사들은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냥 고려에서 오는 원군을 마중나가는 거라 들었는데."

"군장도 다 갖추고 나온 게 아닌데 싸운다고?"

그런 수런거림이 들렸다. 유금필도 약간은 난감한 기색이었다. 나도 떨렸다. 졸지에 백제군을 공격하는 대형에 끼게 됐는데 군사들이 이리 동요하면 나도 위험해지는 것이다.

"백제군은 견훤 때문에 지렁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비오는 날 물이 스며들면 지렁이가 다 튀어나오듯 지금 백제군이 사탄 물가에 있을 때 쳐야 한다. 지렁이가 땅속에 숨듯 백제군이 숨어버리면 칠 수가 없다."

다급해진 내가 적당히 말을 꾸며냈다.

'고창성에서는 이게 통했는데. 또 통할까? 몰라 안 통해도 내 잘못은 아니야.'

"오오. 그렇습니다. 그 간단한 이치를 왜 몰랐을까요?"

"물이 있어야 지렁이를 잡기 쉽죠."

그런데 내 말을 들은 군사들, 특히 고창성 전투에서 함께 했던 안동군사들은 그대로 내 말에 넘어가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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