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 이별 >
나와 왕무는 침상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침상 위에서 나는 차분한 어조로 왕건과 나눈 대화를 왕무에게 알려주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제가 유금필 장군의 뒤를 따라 서라벌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말을 마무리 지은 나는 조심스레 왕무의 눈치를 살폈다.
"국선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왕무는 약간 슬픈 기색으로 말했다.
"미안하다니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순간 이해가 안 가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선도 군령에 매여있는 처지인데, 괜히 내가 국선 앞에서 울어서 국선이 나까지 신경쓰게 만든 것 같습니다. 다 내 잘못인데."
왕무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정윤 전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축 처진 왕무의 어깨를 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국선이 서라벌을 구원하기 위해 출진해야 한다면 나도 함께 하고 싶습니다. 폐하께 내일이라도 말씀을……"
"그러지 마십시오. 절대 그러시면 안 됩니다. 지금 유금필 장군에게 많은 군사를 딸려 보낼 수 없는 상황입니다. 폐하께서 그런 곳에 정윤 전하를 보내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는 왕무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국선은 소수의 군사와 위험한 곳으로 가도 되고 나는 안 된다니! 폐하께 한번 청이라도 올려보고 싶습니다."
나를 생각하는 왕무의 애잔한 마음이 느껴졌다.
"전하께서 그러시면 폐하께서 전하께 실망하실 것입니다."
나는 너무 다급해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나는 한림원에서 왕건과 자주 대화를 나눠서 그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왕무가 나 때문에 굳이 출진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을 보면, 왕건은 왕무를 한심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면 바로 왕건의 눈 밖에 나는 것이다.
'나 때문에 오히려 왕무에게 불리한 쪽으로 역사가 변할 수 있어.'
왕무도 내가 초조해 한다는 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왕무가 나를 자연스레 자기 품속에 끌어안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울지 마세요. 국선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내가 왕이 되면 이 모든 일이 해결될까요?"
"……"
나는 왕무의 푸념 섞인 질문에 답을 해줄 수 없었다.
'왕무가 왕이 된다 한 들 위기가 끝날까? 왕이 되고 나서도 곤경이 끝이 없을 텐데. 나는, 나는 정말 힘든 길에 들어섰구나.'
그런데 나는 그런 상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왕무가 나를 껴안은 채 그대로 침상에 누웠다. 나 역시 자연스레 왕무 품속에서 함께 눕게 됐다.
"헉."
내가 놀라서 왕무를 바라보는데 왕무가 말했다.
"서라벌로 가게 되면 못 보니까. 이대로."
그러더니 왕무는 그냥 나를 품속에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이대로 자자는 의미 같았다. 더 이상 뭔가를 안 하고 나를 안고 있는 왕무를 보며 나는 마음이 든든했다.
'참기 힘들텐데도 참아주고.'
나는 가볍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나도 한숨 푹 자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왕무 품속에서 한숨도 못 자고 일어나야 했다. 피로한 상태로 한림원을 향해 걸어가며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왜 이리 심장이 두근거려? 왕무와 껴안은 게 한두번이 아닌데. 왜 유독 어제는 이랬는지. 이건 큰일인데? 조만간 출진하게 될 지도 모르는데. 오늘이라도 왕건이 출진하라고 하면 어쩌지?'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왕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어제만 해도 당장 나를 출진시킬 기세였던 왕건은 그사이에 마음이 바뀐 모양이었다.
"연우야. 우선 언제든 출진할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으면서, 또 출진 안 할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왕건이 내 앞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왕건도 갈팡질팡하고 있는 거 같았다.
'진짜 유금필을 동남으로 보내기 싫은 모양이네.'
왕건은 자기 앞에 놓인 지도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아불진과 혜산에서 그곳 호족들이 알아서 신검을 막는 게 제일 좋은데."
어쨌든 나는 왕건이 결단을 못 내린 덕에 시간을 벌었다.
'출진에 대비해 오늘은 진짜 푹 자야지.'
출진을 할지 말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며칠 간 이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급보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폐하, 서라벌의 신라 조정에서 쉴 새 없이 급보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하나 같이 원군을 보내달라는 내용입니다. 누구라도 내려 보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전령들이 한림원까지 달려와서 왕건에게 서신을 바쳤다.
"이 철면피 같은 서라벌 녀석들. 항복은 안 하고 그리 시간을 끌면서, 막상 위기가 닥치면 도와달라고 하고! 아니 내가 뭐 받지도 못하면서 돕기만 해야 한다는 거 아니야?"
왕건은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왕건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백제군이 만약 다시 한번 서라벌에 입성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신라 조정에서 난리가 난 것도 당연한 일이긴 해. 체면 같은 거 차릴 때가 아니지.'
나도 급박하게 돌아가는 정세를 곁에서 느끼니 목이 탔다.
"폐하! 서라벌에 주둔하고 있는 호족들이 연명으로 급보를 올렸습니다."
왕건이 서라벌로 보낸 선필, 이총언, 안동 삼태사 같은 호족들도 서신을 올린 것이다. 그 서신을 열어본 왕건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서라벌을 지킬 수 없으니 어떻게 해달라고 난리구나."
사벌주 호족들의 요청에 왕건도 더 버틸 수 없는 것 같았다. 사벌주 호족들은 견훤과 싸울 때도 끝까지 항전하던 사람들이었는데, 다급해 하는 것을 보면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당장 유금필을 출진시켜야겠다. 연우 너도 준비하거라. 군사들도 준비시켜."
왕건은 체념하는 기색으로 명을 내렸다.
왕건이 결단을 내리자마자 출진준비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구정에 유금필과 군사들이 모였다.
나 역시 한림원에 앉아있다가 왕건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미리 준비해 둔 행낭을 메고 구정에 나왔다.
'이게 현실인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정도로 얼떨떨했다. 내 곁에서 임연객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이 그냥 잘 풀리길 바랐는데. 결국 출진을 해야 하구나."
임연객도 이번에 유금필과 함께 가게 됐다.
'임연객이 이번에 출진하는 것은 사실 나 때문인데. 미안하긴 하네. 하지만 곁에 임연객이 있어야 내가 편하니까.'
여러 고려 중신들과 장군들도 출진하는 유금필을 전송하기 위해 구정에 모이기 시작했다.
왕건은 유금필의 손을 잡고 구정에 도열한 기병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800명의 군졸들에 비견되는 80명의 정병. 아니야. 이들은 정병이라는 말로도 부족하지. 그래 장사! 장사라고 불러야 해. 홀로 능히 10명 몫을 하는 장사 80명을 준비했다. 이들과 함께 가서 장군이 서라벌을 구원하도록 하라. 이런 천하장사들 80명이면 800명을 넘어 천명 몫도 하지. 암."
왕건이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다.
결국 왕건이 유금필을 위해 내주는 군사 수는 80명이었다. 지금 왕건이나 대호족들이 백제 수군 때문에 서로 군사들을 안 빼려고 해서 동원할 수 있는 군사가 이 정도였다.
왕건도 너무 양심에 찔려서 유금필에게 말을 장황하게 하고 있었다.
'신검이 끌고 온 군사들이 1만 명은 될텐데. 물론 80명으로 1만명을 이기라는 건 아니야. 80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서라벌에서 사벌주 호족들의 군사와 합류하면 되니.'
내가 입맛을 다시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곁에서 임연객이 자기 목을 쓰다듬으며 나에게 속삭였다.
"왜 이리 목이 간지럽지? 옛 백제의 왕 중에 성왕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호위군사 50기만 거느리고 이동하다가 신라군 급습으로 죽지 않았나? 옛날에 삼국사를 읽었을 때가 기억나네."
말을 마친 임연객은 손으로 자기 목을 감쌌다. 나는 분기탱천해서 임연객의 입을 틀어막으며 말했다.
"왜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임연객의 경솔한 말을 듣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진짜 이런 인간들은 군율로 다스려야 해. 옛날 장군들이 왜 이런 인간들을 처벌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네. 어떻게 그런 말을 입 밖에 내고 있어? 그런 생각이 떠올라도 혼자만 고통 받으면 되지. 나까지.'
나는 현대의 역사학도라서 임연객보다 역사에 더 해박했다. 백제 성왕 같은 사례를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원래 나는 아까 전까지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임연객의 말을 듣고 나니 그 사례들이 연이어 떠올라 마음이 불안해졌다.
'분명 원래 역사에서는 유금필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별 탈이 안 나. 그래 확신을 가지면 돼.'
그런데 막상 나 자신이 이런 위험에 직접 뛰어들게 되자 진정이 안 됐다.
'내가 끼는 바람에 무슨 변수가 생겨서 역사가 어긋나면?'
내가 임연객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사이 유금필이 담담하게 말했다.
"기필코 신검을 격파하고 돌아오겠습니다."
곧 출진할 것 같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중신들과 함께 마중 나온 왕무를 바라보았다. 나는 살짝 손을 들어 그쪽을 향해 흔들었다. 왕무 역시 바로 손을 들었다. 나는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잠깐 가서 왕무와 이야기 좀 하고 올까? 하필 왕건이 우물쭈물하다가 급보를 받고 출진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제대로 작별인사도 못하고 떨어지게 되네. 아니 그냥 진작 결단을 내리고 날짜를 지정해서 출진시키면 될 것을. 그럼 그 전날 실컷 얘기를 하다가 올 수 있는데.'
나는 일을 이리 처리한 왕건을 원망했다. 하지만 나는 왕무 쪽으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유금필도 그렇고 임연객도 그렇고 다른 군사들도 하나같이 갑작스레 소집됐는데. 나만 왕무에게 가서 실컷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군심이 흔들리지 않을까? 그러면 위험해진다.'
왕무 역시 군영에서 오래 일해서 이 이치를 아는 것 같았다. 계속 손만 흔들고 있었다. 왕무가 보이는데 다가갈 수는 없는 상황이라 가슴이 먹먹했다.
'왕무는 어떤 심정일까?'
나는 그것이 알고 싶어서 멀리서나마 왕무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왕건과 말을 마친 유금필이 외쳤다.
"출진한다!"
그리고 서라벌로 떠날 군사들을 마중나온 천우위 군사들이 북을 치기 시작했다. 기병들이 움직이며 흙먼지가 일어나 왕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정윤비 마마.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유금필이 나를 위해 붙여준 기병들이 다가와서 말했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쉬며 말을 몰았다.
'정신 안 차리면 영영 왕무를 못 본다. 우선은 딴 생각을 하자. 차라리 백제 성왕과 비슷하게 죽은 사람들 사례를 찾아보자. 그러니까 고려의 윤관도 소수의 군사로 움직이다가 급습당한 적 있고. 그런데 이 사람은 살아.'
그런데 신기한 게 아무리 이런 불길한 사례들을 떠올려도 뇌리에서 계속 왕무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참 미치겠네.'
서라벌을 구원하기 위해 편성된 유금필과 80명의 군사들은 쉴 새 없이 달렸다. 그만큼 상황이 다급했다.
그러나 이 군사들이 막 계립령 앞에 당도했을 때 전령이 달려와 급보를 알렸다.
"아불진과 혜산이 신검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백제 대군에 맞서던 강주, 양주의 호족들은 완전히 와해됐습니다! 폐하께서 이 소식을 급히 알리라 하셨습니다. 아불진으로 가면 안 됩니다."
웅성웅성
그 소식을 들은 군사들은 크게 놀랐다. 내 곁에서 임연객은 얼굴이 시퍼렇게 돼서 연신 자기 목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나는 무덤덤하게 그 소식을 들었다.
'미치겠군. 이 소식을 들어도 왕무 얼굴만 생각나. 마지막에 왕무 표정이 슬펐었나? 아니면 좀 진정한 표정이었나? 막판에 흙먼지 때문에 제대로 못 봤어.'
나는 멍하니 그런 상념에 잠겼다.
그런데 갑자기 내 곁에 유금필이 다가오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역시 정윤비 마마께서는 대단하십니다. 병법에 조예가 깊으셔서 그렇습니까? 허허허. 이 소식을 듣고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으시니 저는 감탄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