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 고육지책 >
요근래 내가 매일 나가는 한림원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양주와 강주의 호족들을 아불진과 혜산진에 우선 집결시키기로 했다. 여러 장군들 말이 그 두 곳을 지키면 서라벌을 수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학사들은 그 두 곳과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와라! 내가 좀 보고 호족들을 지휘해야겠다."
왕건이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학사들에게 그런 명을 내렸다. 고창 전투 전에 봤던 그 얼굴이었다.
"명을 받듭니다."
학사들도 상황이 다급한 것을 알고 바쁘게 움직였다. 나도 그사이에 껴서 자료를 찾았다. 다만 자료를 찾으면서도 이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왕건이 지금 백제 수군 때문에 직접 군사를 이끌고 서라벌 쪽으로 갈 수가 없다. 양주나 강주 호족들이 그냥 싸우면 백제의 상대가 안 되고, 그래서 지도를 보고 멀리서 호족들을 지휘하겠다는 건데……'
현대의 위성지도를 보고 작전을 세워도 막상 현장에 가보면 상황이 다르다. 이 시대에 지도만 보고 멀리서 작전 지휘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왕건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에라 모르겠다. 어쨌든 왕건이 유금필을 그쪽으로 보낼 마음은 당장 없는 것 같아 다행이야. 실제 역사를 봐도 왕건은 늦게 유금필을 보낸다. 그사이에 나는 전장에 나가지 않을 방법을 모색해봐야지. 아버님의 방법은 절대 안 돼!'
나는 얼굴을 붉히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왕무와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닌데 참.'
다음날에도 왕건은 한림원에 와서 앓는 소리를 내었다.
"대호족이란 작자들은 어쩜 이리 이기적인지? 서라벌 방어를 위해 동남 호족들의 구심점 역할을 해줄 군사들을 2천 명만 보내자니 다 발을 빼고 있어! 어허 이런."
왕건은 한림원에 나와서 자기 앞에 놓인 서탁을 두드리며 말했다. 어전에서 대호족들 면전에서는 차마 못한 소리를 한림원에 와서 하고 있었다.
'한림원에서 공공연히 하는 이야기들은 대호족들 귀에도 반드시 들어간다. 학사들 중에 대호족들과 끈을 대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간접적으로나마 대호족들이 들으라고 저러는 거지.'
뒤에서 뭐라 하는 왕건이 좀 없어 보이긴 했다.
"백제 수군이 패서 앞바다를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상륙할지 모르니 상륙할만한 해안선 전체에 육군을 배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대호족들도 뺄 수 있는 군사가 없을 것입니다."
최언위가 흥분한 왕건을 달랬다.
"어허. 그래도 나라가 이리 위급한데 자기 영지를 지키겠다고 이러다니! 만약 백제군이 다시 서라벌에 입성하면 삼한 전체가 다시 흔들린다. 그 사람들은 일의 경중을 모르고 있어! 약간의 백제 수군에 겁먹어서 이 긴 해안선을 다 지키고 있으니."
왕건은 애가 타서 부르짖었다.
"폐하. 정 급하시면 개경의 중앙군을 2천 명이라도 빼서 보내시는 게……"
곁에서 왕건의 고통을 보고 있던 대내학사 김악이 계책을 건의했다. 왕건의 측근인 만큼 왕건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럴 순 없다! 그러다가 백제 수군이 개경을 치면 어쩌란 말이냐?"
왕건은 그러자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예? 그러나 그건 대호족들의 논리……"
김악이 어벙하게 대답하는데 왕건이 크게 노해서 외쳤다.
"나는 왕이고 호족들은 그냥 호족인데 뭐가 같아! 상황이 다르지! 개경은 수도라고 수도! 개경과 호족들 영지가 어떻게 똑같아? 개경은 도선 대사도 감탄한 명당이야!"
"소신이 군사 일에 어두워서 그랬습니다."
놀란 김악은 또 그렇게 빠져나왔다.
"그냥 아불진과 혜산 인근의 자료나 더 찾아와."
왕건도 더 화를 안 내고 그런 지시를 내렸다.
'흐음, 왕건과 대호족들 모두 이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어. 자기들 영지가 털리면 아무도 손해배상을 안 해주니. 자기 영지를 우선 지키려고 하지. 수군이 있으면 바다에서 백제 수군을 견제할 수 있으니, 이렇게 미련스러운 해안 방어를 안 해도 되는데. 어쨌든 실제 역사에선 유금필을 보내서 이 고비를 넘긴다. 그런데 지금 왕건은 유금필을 보낼 생각도 안 하는데? 나도 몰라. 왕건이 알아서 하겠지.'
동남쪽에서 들려오는 전황은 점점 어려워졌다.
"지금 신검이 이끄는 백제군이 아불진과 혜산에 이르렀다는구나. 신검도 참 만만한 사람은 아니야. 멀리서 폐하의 지시를 받은 호족들이 막고는 있는데 어찌 될지? 그래 연우 너는 매일 한림원에 나가는데 폐하의 심기는 어떠냐?"
간만에 나주원에 찾아온 임희가 물었다. 임희 입장에서도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가니 약간의 정보라도 더 얻으려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근심이 많으십니다. 이미 사벌주의 호족들에게도 동원령을 내리셨습니다. 상보 선필, 안동의 세 호족, 이총언 등 사벌주의 호족들에게 명을 내려 서라벌로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임희에게 말했다.
"서라벌을 지키라고 사벌주 호족까지 움직이신 것을 보면, 폐하께서도 아불진과 혜산에서 버틴다는 확신이 없으신 거다. 결국 유금필 대장군을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왜 폐하께서 머뭇거리실까?"
임희가 내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속으로 그 이야기를 들으며 비명을 질렀다.
'유금필이 출전하게 되면 반드시 나를 데려가려고 할 거야. 그나마 왕건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결단을 못 내려서 시간이 있어서 다행이다. 차라리 아픈 척이라도 해야겠어. 낙마한 시늉이라도 할까?'
나는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빨리 수를 내지 않으면 왕무의 눈물을 또 보게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굳이 내가 끼지 않아도 유금필 혼자 이번 위기도 잘 해결해냈어. 역사서에 다 나와.'
나는 조만간 적당히 아픈 척할 마음을 품고 한림원에 나갔다. 갑자기 아프다고 하면 의심을 사니 밑밥을 깔다가 그럴 작정이었다.
그런데 내가 한림원에 들어서자마자 왕건이 정색을 하며 나를 불렀다.
"연우 너에게 긴히 할 말이 있다. 한림원령 집무실을 좀 빌리자."
평소에 최언위가 따로 쓰는 집무실로 나를 부르는 것을 보고 나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밖에 새어나가면 안 되는 지시를 내리려고 저러는 것이다.
'내가 너무 늦었나? 아니야. 왕건이 나더러 출진을 명하면 진짜 다리뼈라도 부러뜨려서 가지 말아야 해.'
나는 그런 각오를 하고 왕건을 따라갔다. 왕건은 직접 집무실 창문이나 문 주변을 꼼꼼하게 살폈다. 엿듣는 사람이 없나 확인하는 것 같았다.
왕건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그러더니 툭 명을 내렸다.
"아무래도 연우 네가 유금필과 같이 서라벌에 좀 내려가야겠다. 아불진과 혜산이 곧 무너질 것 같다. 내가 서라벌에 모이라 한 사벌주 호족들도 전투력은 강주, 양주 호족들과 비슷하다. 그들만으로는 백제군을 막을 수 없다. 결국 유금필을 보내서 인근 호족들을 지휘하라고 하는 방법만 남았다. 연우 네가 좀 같이 가줘야겠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런 말이 나왔다.
"폐하, 유금필 장군 혼자의 힘만으로 이번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가도 별 도움이 안 됩니다. 이번에는 개경에 머물러 있겠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하하하. 우리 연우는 참 장사를 잘해. 알뜰해서 우리 집안이 안 망하겠어. 그래 내가 뭘 해줄까? 정윤에게 개경 중앙군 부대를 몇 개 더 맡기마."
왕건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왕건은 내가 왕무를 위해 뭘 더 얻어내려고 튕긴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이번에는 쉬려고 합니다. 백제군은 유금필 장군이 홀로 막아낼 수 있습니다."
"연우 네가 이러는 것을 보니 설마 손주가? 하지만 임신 초기면 말을 타고 내려가도 큰 지장이 없을 텐데?"
왕건이 자신의 입을 막으며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폐하!"
나는 기가 막혔다. 임희의 예상과는 달리 왕건은 내가 임신을 해도 출진시킬 각오였다. 나는 그런 왕건의 태도에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왕건도 그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왕건이 은밀하게 말했다.
"연우야. 정윤에게 삼한 땅 전체를 물려주려면 네가 힘들어도 좀 출진해야지. 물론 연우 네가 안 가도 유금필 홀로 백제를 막아낼 수 있을 거다. 허나 내가 연우 너를 내려보내려는 것은 유금필을 막기 위해서야."
"예? 그게 무슨?"
"이미 고창 전투 때 사벌주며 인근 호족들이 유금필의 실력을 봤다. 지금 내가 유금필을 다시 한번 동남으로 내려보내서 인근 호족들을 지휘하게 해야 한다. 만약 유금필이 신라 왕실을 끼고 신라를 보위한다는 명분으로 호족들을 규합해 옛 신라 땅에서 할거하면 난리가 난다."
왕건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폐하. 그럴 리가 없습니다. 유금필 장군은 백제만 격파하고 나면 조용히 개경으로 돌아올 사람입니다."
"유금필이 그 정도로 비정상적인 사람일까?"
"비정상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예전에 전국책이 상당히 재밌다고 말했는데 한번 훑어봤느냐?"
왕건이 물었다.
"좀 읽다가 말았습니다. 요새 시간이 없어서."
민망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나주원에서 왕무와 시간을 보내느라고 책을 멀리한 지 오래였다. 나에게 공부를 권하는 사람들 앞에서 면목이 없었다.
"전국책을 굳이 안 읽어도 뻔한 일이다. 견훤은 신라 조정이 무진주를 지키라고 보낸 장수였는데 할거해 나라를 세웠고, 폐주 궁예도 원래 양길이의 부하였는데 독립했다. 막말로 나도 폐주의 부하였어. 그런데 유금필만 안 그런다는 확신이 있느냐? 서라벌의 철면피들은 또 변수를 만들겠다고 유금필을 부추길 게 뻔하다."
왕건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유금필이 충성스럽다는 확신이 있어. 미래에서 다 보고 왔으니. 그러나 왕건에게는 확신이 없구나.'
비로소 왕건의 의중을 어느 정도 눈치챈 내가 말했다.
"그러면 적당한 무장 하나를 보내서 유금필 장군을 견제하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그럼 유금필을 보내지 않는 것만 못하다. 다른 장군도 같이 보내면 지휘권이 분산되고 갈등이 심해져서 백제군을 못 막아. 그런데 연우 네가 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연우 네가 유금필과 지휘권을 두고 싸울 일은 없다. 게다가 연우 너는 유금필과 친하기도 하고 명망은 높다. 서라벌로 내려가서 화엄종 사람들이나 선필, 안동 호족들과 만나고 그래라. 그러면 유금필도 감히 할거할 생각은 못 할 거다."
정치 고수답게 왕건의 논리에는 빈틈이 없었다. 하마터면 나도 그 언변에 넘어갈 뻔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내가 말했다.
"아니 만약 제가 없었다면 어쩌실 요량이셨습니까? 그러면 유금필 장군을 안 보내셨을 것입니까?"
원래 역사에서 임연우는 지금의 나처럼 활약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왕건이 유금필을 홀로 보낸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왕건이 어떤 대답을 할지 궁금했다.
"네가 없더라도 나는 유금필을 서라벌로 보냈을 것이다. 어쨌든 백제를 막는 것이 중요하니. 그런데 그 대신 몇 달간 잠도 못 자고 밥도 잘 못 먹었지. 그래 이 늙은 시아비가 잠도 못 자게 하고 싶으냐?"
왕건이 애원하듯이 말했다. 나는 속으로 한탄했다.
'이거 빠져나갈 수가 없구나. 다리가 부러졌다고 해도 가마에 태워서 유금필을 따라 가게 만들 것 같아. 이걸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