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30화 (130/216)

< 130 : 고뇌 >

"백제 수군이 또 개경에 왔어! 견훤이는 대체 언제 죽는 거야! 언제까지 나를 괴롭힐 건지?"

한림원에서 왕건이 그렇게 외치며 서성거렸다. 얼마나 초조한 지 자리에 앉아있지도 못하고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전황은 썩 좋지 않았다.

'백제 수군의 첫번째 기습으로 고려 수군이 궤멸한 상태라서 유금필, 왕만세가 열심히 막아도 한계가 있지.'

물론 개경 인근은 어찌저찌 방어해냈다. 하지만 백제 수군이 다른 곳을 요격하는 것은 막지 못하고 있었다.

왕건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왕건 본인의 근거지인 개경이 위험하니 심리적으로 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실질적 피해는 적은 편이야. 우선 백제군이 상륙을 못하고 있으니.'

고려 중앙군과 패서 호족들의 군사들이 해안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래서 백제수군도 감히 육군을 상륙시키지 못하고 상선이나 어선을 불태우는 일에 주력하고 있었다.

"전선들의 건조는 언제 다 끝나느냐?"

왕건은 한림원 학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내년 가을은 돼야 한숨 돌릴 것 같습니다. 일을 맡은 사람들이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지금 현재 백제 수군이 개경 인근 바다를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전선건조 작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사들이 그런 보고를 올렸다.

"어허, 이거 참."

왕건은 힘이 빠졌는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연우 너는 뭐 뾰족한 수가 없느냐? 아쉬운 대로 전선 100척만 있으면 당장의 고비는 넘기는데. 어디 구해올 곳이 없겠니?"

"저도 열심히 궁리해 봤지만 방도가 없어서."

나는 어이없는 심정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길래 진작 내 말을 들었으면 좋았잖아. 그러면 손쉽게 백제 수군을 막아냈을 텐데. 전선 100척을 무슨 수로 단기간에 마련해?'

거기에 나는 요즘 수군 문제 같은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오늘도 아침에 일어나보니 왕무가 나를 껴안고 있었어. 떨어져서 자자고 했는데 잠버릇인가?'

공간을 아끼기 위해 한 침상을 쓰기로 했지만 나는 침상 위에서 서로 붙어있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이야 왕무가 울어서 안고 잠든 거고.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자고 분명 말했는데.'

나는 군대 내무반에서처럼 큰 침상 위에서 왕무와 간격을 두고 나란히 누웠다. 그러다가 잠들고 나면 어느새 왕무의 품속에서 눈을 떴다.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런데 확실히 붙어있으니 따뜻하긴 해. 겨울이라 추운데 하나도 안 느껴지니. 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나도 자원을 아껴야 하는데. 시녀들에게 화로에 넣는 숯을 아끼라고 명을 내려야 하나? 아니지. 아니야. 왕무에게 꼭 잠버릇을 고치라고 신신당부해야지. 더 이상은 안 돼.'

나는 몽롱한 기분에 잠겨있는데 왕건이 외치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뭔가 방법을 찾아봐!"

나는 한림원과 나주원을 오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요새는 잠도 잘 왔다.

'오늘도 결국 껴안고 잤네.'

나는 왕무의 품속에서 눈을 떴다. 왕무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잠시 왕무의 자는 얼굴을 바라봤다.

'부럽다. 내가 현대에 있을 때 이 얼굴이었으면 인생이 바뀌었을 텐데.'

나는 습관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부러워하고 있는 게 맞나? 예전과 뭔가 느낌이 달라. 왕무 얼굴을 보면 뿌듯해지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 잠에서 깬 왕무가 졸린 눈빛으로 말했다.

"연우야."

그러더니 나를 더 강하게 껴안았다.

"정윤 전하.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잠버릇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기면 몰라도 이렇게 깨어있을 때 안기는 것은 뭔가 아니란 생각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그러니 왕무도 잠이 깼는지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냥 외면하고 한림원에 나갈 준비를 했다.

여느 때처럼 왕건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림원에 앉아있었다.

"백제 수군이 우선 물러나긴 했는데 이거 미치겠군. 견훤의 군세가 생각 외로 막강하다. 고창 전투 이후 그대로 무너질 줄 알았는데."

자리에 앉아있는 왕건이 머리를 감싸쥐고 외쳤다.

'어전에서 이러지는 않겠지? 하긴 어전에서는 대호족들이 버티고 있으니 약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하지. 한림원이야 측근들과 만만한 학사들만 있으니 감정토로를 솔직히 하는 거고.'

왕건은 멍하니 서탁 위의 지도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대내학사 김악이 그런 왕건을 보고 안타깝게 외쳤다. 당장 왕건을 도울 방법이 측근들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이걸 다 이겨내고 삼한통일이 되긴 하니까.'

미래 역사를 아는 나는 태연할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왕건의 눈치를 보며 한림원 구석에 앉아있었는데 왕건이 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나랑 같이 동양원에 좀 가자."

"동양원이라면?"

내가 뜬금없는 말을 꺼낸 왕건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왕건이 불길한 어조로 말했다.

"유금필이 동양원에서 나를 만나자고 했다. 유금필이 연우 너도 보고 싶다고 했고. 무슨 말을 할지 나도 걱정이다. 유금필이 또 무슨 난리가 난다는 예측을 하는 것은 아닌지? 연우 너는 뭐 아는 게 없니?"

동양원에서 왕건의 고함소리가 터졌다.

"뭐! 조만간 백제가 대군을 일으켜 서라벌로 진군할 거라고?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제가 백제군의 움직임을 살펴보니 분명 그럴 것입니다."

유금필은 담담한 어조로 왕건에게 말했다.

'음 그러고 보니 역사서를 보면 그런 일이 있긴 있었어. 그런데 유금필은 어떻게 이 사실을 또 예상한 거지? 나처럼 빙의자 아니야?'

나는 한쪽에서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유금필을 바라보았다.

"백제 수군이 개경 앞바다를 오락가락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상륙할까봐 두려워 중앙군 및 패서의 병력들은 모두 해안을 경비하고 있습니다. 수군이 재건되는 내년까지 패서군은 꼼짝도 못합니다. 백제와 견훤은 그 틈을 노려 자신의 주력을 서라벌로 진출시킬 것입니다."

유금필은 자신이 그런 예측을 한 이유를 설명했다.

'역시 유금필!'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견훤 이 못된 것! 감히 그런, 그런 얄미운 수를 쓸까?"

왕건은 유금필의 말을 듣자마자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다만 그동안 유금필의 말이 계속 들어맞았고 이번 분석은 워낙 그럴 듯했다.

왕건도 유금필의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장군의 예측이 맞겠지. 그러나 이미 서라벌 주변 동남 3주의 100개가 넘는 성이 나에게 귀부했다. 동남에 주둔해 있는 고려 군사들과 인근 호족들의 병력만 합쳐도 1만은 될 터. 백제 도적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대장군이 미리 알려줬으니 대비를 할 수 있겠군. 강주, 양주의 호족들에게 군사를 동원할 준비를 하라고 연락을 보내야겠어. 이러면 견훤도 막아내겠지?"

왕건이 유금필을 보며 다그치듯이 말했다.

"지금 패서의 군사들을 움직일 수 없으니 그게 최선이긴 합니다만……승리는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유금필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이긴다고 말해야지! 어쨌든 한시라도 빨리 호족들에게 동원령을 내려야겠다."

왕건은 벌떡 일어나서 달려나갔다.

'근데 유금필이 나는 왜 부른 거지? 그냥 왕건에게 어전에서 말해도 될 일인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유금필이 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윤비 마마. 일이 어렵게 돌아갈 수도 있어서 정윤비 마마를 불렀습니다. 일이 돌아가는 사정을 정윤비 마마도 알고 계셔야 나중에 일을 논의할 때 편하기도 하고. 저와 긴 여행을 하실 수도 있으니 준비를 미리 하십시오."

그 말을 듣자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금필은 이번에 백제의 침공을 방어할 때 나를 데려갈 생각이야.'

그 순간 내 뇌리에 왕무가 울던 모습이 스쳐지나갔다.

'또 그런 위험한 곳에 갈 수는 없어.'

나는 유금필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내가 간다고 한들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장군만 가도 능히 백제 무리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유금필이 혼자 이 위기를 돌파해낸다.

"저를 그리 믿어주시니 고맙습니다."

유금필은 절박한 내 말을 듣고도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 말만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런 유금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유금필의 예견대로 일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백제 태자 신검이 대장으로 나서 군사들을 이끌고 서라벌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전령들이 사방에서 백제군의 침공 소식을 알렸다.

"강주와 양주의 호족들을 총동원해서 신검을 막아라! 견훤이 직접 나서지도 않았군. 막아낼 수 있다. 미리 병력동원 준비까지 했는데."

왕건은 재빨리 그런 지시를 내렸다.

개경 사람들은 초조하게 전투 결과를 기다렸다. 그리고 참혹한 소식이 개경에 당도했다.

"강주, 양주 호족 연합군이 백제군에게 크게 패했습니다! 신검의 기세를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상산저에서 임희는 혀를 차며 나에게 말했다.

"강주와 양주 호족들도 적고적의 난을 평정하고 군사를 열심히 기른 사람들인데 백제군에겐 상대가 안 되는구나. 역시 지금 삼한 땅에서 견훤과 호각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은 폐하와 패서군 뿐임이 확인됐다. 7~8개월만 버티면 우리가 원군을 보낼 수 있는데 시간도 못 끌고 무너지다니. 패서군은 꼼짝 못하고 나와 유긍달 등도 군사를 못 움직인다. 일모산성 포위를 돕고 공직을 견제해야 한다. 공직은 빈틈을 보이면 안 되는 사람이니. 백제가 절묘한 수를 뒀구나. 우리가 주력을 움직일 수 없는 순간을 찌르다니."

나는 정세가 심상치 않은 만큼 아버지인 임희와 상담을 하러 달려왔다. 한참 작금의 상황에 대해 논평을 늘어놓는 임희의 말을 끊고 내가 외쳤다.

"상황이 어려우니 폐하께서는 유금필 장군을 출진시킬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금필 장군이 저와 함께 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장에 나갈 판이예요."

"그야 그럴 수밖에. 연우 너는 서라벌 인근에서 큰 명성을 지니고 있지 않니? 화엄종의 무리들이 너를 우러러보고 있고, 고창 아니 안동이라 불러야 하나? 안동의 군민들도 너를 믿고 있다. 연우 네가 가있으면 민심이 안정된다는 거지."

한가하게 그런 소리를 하는 임희를 보고 나는 발을 구르며 외쳤다.

"이번에는 출진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님. 무슨 수를 써야합니다."

그러자 임희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연우 너는 여태 전장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에게 이리 달려와서 이러다니. 앗. 설마? 외손주가?"

임희는 오해를 하는 것 같았다.

"아닙니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저 지금은 개경에서 제가 정세를 살피는 게 유리한 것 같아서."

나는 손사래를 치며 임희에게 말했다.

'왕무가 또 울어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달래?'

그런데 이 말을 임희에게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니 사사로운 이익을 살필 수 없다. 폐하께서 군령으로 연우 너의 출진을 명하시면 네가 정윤비라 해도 거스를 수 없어. 아니 그런데 뭔가 이상한데. 진짜 외손주가 아니냐? 그 문제라면 폐하께서도 연우 너를 쉬게 하실 거다."

계속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는 임희를 보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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