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 반성 >
최치원마저 주머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이걸로 여론 물타기를 한 왕건의 책략이 통하긴 한 거 같았다.
"마후라 대사의 주머니를 한번 보여드릴까요?"
나는 최치원에게 말했다. 왕건이 하도 주머니로 요란을 떨어서 나도 이 주머니 속의 내용이 궁금했다.
'그런데 꼭 곤경에 처했을 때 보라고 마후라 대사도 당부했고, 왕건의 반응도 심상치 않아. 지금 열어버리면 효과가 없을까봐 열지도 못하겠어.'
그래서 나는 문득 최치원 같이 학식이 뛰어난 사람에게 이 주머니 속을 보여주고 싶었다.
'최치원이나 다른 사람의 반응을 보면 주머니 속의 내용에 대해 대강은 짐작할 수 있을 거 같아. 마후라 대사도 왕건이 이 주머니 속을 본 것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어. 다른 사람도 괜찮겠지?'
내가 넌지시 권하자 최치원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볼 수 있다면 한번 보고 싶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품속에서 주머니를 꺼내서 최치원에게 건넸다. 최치원은 주머니를 열어서 그 속의 종이를 펼쳤다.
나는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나도 나중에 그냥 확 열어볼까? 아니야 그러면 지금까지 참은 게 억울해.'
유심히 글귀를 바라보던 최치원은 조심스럽게 그 종이를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리고 나에게 주머니를 돌려주며 말했다.
"단순하지만 좋은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마후라 대사께서 개경 구산사에 계실 때 제가 만나러 갈 수도 있었는데 기회를 놓친 것이 아쉽군요."
나는 최치원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최치원을 통해 주머니 속 글귀에 대해 가늠해 보고 싶었다.
"마후라 대사의 주머니를 보니 저도 정윤비 마마께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사족일지도 모르지만……받으시겠습니까?"
최치원은 뜻밖의 말을 했다.
"주신다면 받겠습니다."
나는 얼떨떨한 상태로 대답했다. 이런 반응은 상상도 못했다.
최치원은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그 위에 뭔가를 적었다. 잠시 후 먹이 마르자 종이를 접어 작은 주머니 하나에 넣었다.
그리고 최치원은 그 주머니를 나에게 건넸다.
"꼭 큰 곤경에 처하셨을 때만 열어보십시오. 그전에 보면 효과가 없을 듯합니다. 마후라 대사의 주머니를 열 때 제 주머니도 함께 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최치원이 나를 보고 아리송한 말을 던졌다.
"알겠습니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호기심을 풀어보려고 최치원에게 주머니를 건넨 건데 오히려 주머니가 하나 더 늘었군. 2배로 궁금해지겠어.'
하지만 최치원이 저리 당부하는데 덜컥 주머니를 열어 볼 수도 없었다. 최치원과 몇 마디 더 나눈 나는 그대로 상산저를 나섰다.
나는 반니도에 주둔하느라 한동안 쉰 한림원에 다시 나갔다. 지금 왕건의 동태를 살피는 것도 중요했다.
내가 한림원 구석에 앉아서 상황을 살피는데 왕건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조선 기술과 관련된 서책이 있으면 찾아와라. 이거 큰일이야! 백제 수군이 조만간 오는데 쓸 만한 배를 만드는데 시간이 걸리니. 뭔가 방법을 찾아 봐."
왕건의 볼은 움푹 들어가 있었다. 속이 타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런 방법이 어딨어? 상선을 전투용으로 개조하려해도 몇 달은 걸릴 텐데. 백제 수군은 좀 쉬고 정비를 하고 나서 바로 다시 온다. 시간을 절대 못 맞춰. 그래도 유금필과 왕만세의 함대를 중심으로 육군이 해안에서 방어하면 피해는 줄일 수 있지.'
나는 그런 판단을 했는데 왕건은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 같았다. 어떻게든 배를 빨리 만들 방법을 찾아내라고 한림원 학사들을 닦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왕건은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내가 다가가자 왕건은 은밀한 어조로 물었다.
"서경유수는 또 언제 정윤에게 붙었어?"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나는 짐짓 놀란 척하며 대꾸하는데 왕건이 계속 캐물었다.
"나한테는 솔직하게 다 말해야지. 그래야 내가 연우 너와 무를 도울 수 있다. 아니 서경유수가 야망이 큰데 무슨 수로 끌어들였어?"
"그런 적 없습니다."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서경 소속 배들만 이번 난리를 피했다. 허허허. 여러 대호족들이 벽란도에서 배를 잃어서 손해를 입었는데 서경 유수만 멀쩡해. 응, 무슨 수를 썼는지 말해봐라. 궁금해 죽겠네."
"그냥 벽란도에서 배를 빼는 것이 좋다고 말씀만 드렸습니다. 그것뿐입니다."
내가 단호하게 대답하자 왕건도 헷갈리는 표정이었다.
"그럼 서경유수가 양다리를 걸치는 건가? 사촌이라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니."
왕건이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왕건의 모습을 보며 쾌재를 불렀다.
'왕건이 이리 궁금해 할 정도면 유긍달이나 황보제공 등은 엄청 의심하고 있을 걸?'
나는 왕식렴의 빈틈없어 보이는 얼굴을 떠올렸다. 왕식렴도 뛰어난 정치가고 서경에서 그 세력이 막강했다. 그리고 왕건의 말대로 표정도 잘 숨겼다. 왕식렴이 유긍달이나 황보제공 등에게 우리와 결탁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도 믿기 어려울 것이다.
'한동안은 왕식렴이 어떻게 나오나 헷갈려서 대호족들이 잠잠하겠군.'
그 사이 왕건이 홀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경 유수와 한번 얼굴을 보고 싶어도 백제 수군이 올 게 뻔하니 함부로 서경을 비우라 할 수도 없다. 백제 수군이 서경 인근을 칠지도 모르니. 흠, 곧 정윤이 돌아오는데 정윤에게 물어봐야지."
그 말을 들은 내 마음은 약간 무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왕무가 곧 돌아오네. 돌아오면 왕무가 어떻게 나올지? 그런데 오랜만에 얼굴을 다시 보니까 좋다. 간만에 친구를 보면 좋잖아.'
왕무가 온다는 소리를 들으니 내 기분이 오락가락했다.
왕무는 머지않아 개경으로 돌아왔다. 나는 개경 밖까지 마중을 나갈까 생각도 했지만 포기했다. 개경 전체가 지금 백제 수군을 막을 준비를 하느라 어수선했다.
육군 병력들도 백제 수군의 상륙을 막겠다고 해안에 배치되고 있었다.
'이 와중에 개경 교외까지 마중을 나간다고 호위군사를 내달라고 할 수도 없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주원에서 왕무를 기다리기로 했다.
"정윤 전하께서 우선 어전에 드셨습니다. 폐하와 말씀을 나누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궁의 동태를 살피라고 보낸 시녀들이 그런 보고를 올렸다.
'어전에 들어갔으면 곧 올텐데.'
나는 초조하게 왕무에게 할 말을 정리했다.
'이번에 백제 수군의 기습이라는 사태를 이용해서 나와 왕무가 얻은 성과에 대해서 이야기해줘야지. 그러면 왕무가 기뻐하겠지? 아니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이리 전전긍긍하는 거지? 내 지략으로 우리가 승승장구하게 됐는데.'
나는 문득 이리 전전긍긍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니야. 그래도 왠지 내가 잘못한 것 같아. 왕무와 별 일 없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간은 훌쩍 지나버렸다.
"정윤 전하께서 오십니다."
시녀들이 나에게 그리 보고하고 처소에서 나섰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그리고 왕무가 방안에 들어섰다.
'진짜 몇 달 만이야.'
나는 그 얼굴을 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왕무는 겉옷만 벗고 서탁 앞 의자에 앉았다. 나도 그런 왕무 곁에 앉았다.
"국선."
왕무는 차분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정윤 전하. 이번에 왕만세 장군이 큰 공을 세워 수군 내에서 중용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윤 전하께서 정무를 대행하실 때 취한 조치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번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민심이 정윤 전하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나는 일부러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모두 국선의 계책을 따른 덕입니다. 국선이 부족한 나를 위해 힘써줘서 고맙습니다. 거기에 국선이 이번에도 직접 왕만세 장군과 함께 전선에 올라, 백제 수군과 싸웠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왕무가 마침내 그 말을 꺼냈다.
"그건 그냥 잠깐 왕만세 장군의 기함에 탄 건데. 소문이 와전된 것 같습니다. 별로 위험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잠시 전장을 살피다가 벽란도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그렇게 둘러대었다.
'이걸 가지고 왕무가 나한테 뭐라 하면 호통을 쳐줘야지.'
나는 그런 결심을 하고 왕무의 얼굴을 살펴보는데 왕무는 뜻밖에 담담한 표정이었다.
"나라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국선은 옳은 선택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만 내 가슴이……"
왕무는 힘없이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정윤 전하!"
다음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왕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울어도 잘생기긴 했네.'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 뒤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왕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왜 우는 거야? 왕무가 울어. 어떡하지?'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울지 마!"
그래도 왕무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왕무에게 다가가 앉아있는 왕무를 껴안았다. 나는 서있는 상태에서 왕무를 껴안았다. 그래서 내 가슴팍에 왕무의 얼굴이 파묻혔다. 왕무가 계속 눈물을 흘리는 것이 가슴으로 느껴졌다.
'왕무가 딴 생각을 하게 해야 해.'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입을 왕무의 귀로 가져갔다. 그리고 살짝 왕무의 귀를 깨물었다. 혀로 왕무의 귀를 간지럽히기도 했다.
'된다. 통해.'
내가 한참 그러자 왕무가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제야 왕무가 내 가슴팍에서 얼굴을 떼고 말했다.
"연우야!"
왕무의 얼굴은 어느새 상기되어 있었다. 그러더니 왕무는 나를 힘껏 껴안으며 입을 맞춰왔다.
'됐다. 됐어. 평소의 왕무로 돌아왔어.'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왕무는 입을 맞추며 그대로 내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자연스레 나와 왕무가 같은 침상에 쓰러지듯 눕게 됐다.
"안 돼! 이건……"
내가 힘없이 중얼거리는데 왕무가 말했다.
"그냥 안고만 있으면……"
왕무는 그렇게 말하며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가만히 나를 껴안았다. 나는 멍하니 내 침상을 바라봤다. 정윤비의 침상이라 그런지 컸다.
'예전에 훈련소에 있을 때는 좁은 내무반에서도 수십 명이서 잤어. 지금 내 침상만한 공간에도 서너 명이 잔 거 같아. 이 큰 침상에서 왕무랑 같이 누워있어도 뭐 별 게 아니지.'
군대에서 고생한 경험을 떠올리니 갑자기 나는 부끄러워졌다.
'그동안 너무 사치를 한 거 같아. 공간을 아껴야 하는데! 이 널찍한 침상에서 혼자서 뒹굴다니. 전근대라 자원도 부족한데 앞으로는 나도 검소하게 살아야 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품에 안겨있는 왕무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앞으로는 전장에 함부로 안 나갈게요. 꼭 나갈 일이 생기면 정윤 전하와 함께 움직이고."
그리고 나는 그리 말했다. 허언이 아니었다. 나는 앞으로 최대한 그럴 작정이었다.
'왕무가 또 울어버리면 감당 못할 거 같아. 그리고 어쨌든 이번에 내가 상당한 세력을 확보해 놔서 앞으로는 몸을 사리며 움직여도 될 것 같아. 내 계획대로 된다면 한번 정도는 왕무와 함께 출진해야 할지도?'
내 말을 들은 왕무가 내 품 속에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 말에 찬성한다는 의미였다. 굳이 말을 안 하고 왕무를 품속에 안고만 있어도 모든 게 느껴졌다.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이 느껴져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 웃음소리를 듣고 왕무도 웃는 것 같았다. 내 가슴팍에 왕무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간지러워진 나는 더 크게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