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 만세 >
마후라 대사 이야기를 늘어놓던 왕건은 나를 보며 물었다.
"왕만세의 천우위 전선들이 활약한 것은 내가 직접 봤다. 그런데 서북쪽에서 갑자기 출현한 전선들은 무엇이냐? 대부분의 수군 기지가 이미 궤멸된 상태라서 그만한 전선들이 나올 곳이 없는데?"
"유금필 장군이 곡도에서 이끌고 온 전선들입니다."
내 대답을 듣자마자 왕건의 안색이 변했다.
"유금필?"
잠시 입맛을 다시던 왕건이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백제 수군이 벽란도에서 우선 물러났으니 모두 좀 쉬자. 쉬고 나서 앞으로 어찌할지 의논해야지. 군사들도 쉬게 하라."
천막에 있던 중신들과 장군들이 물러나자 왕건이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결국 유금필과 연우 너의 말이 다 맞았구나. 권력에 집착한 호족들이 유금필을 너무 핍박했다. 서라벌 구경을 하느라 유금필을 미처 구하지 못한 내 실수다. 허 참. 대호족들이 어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개경에만 있었어도 유금필이 유배를 가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왕건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연기력이 엄청나군. 속사정을 모두 아는 나니까 안 속지. 왕건의 표정이나 어조나 너무 실감 나. 사실상 자기가 유금필을 날려놓고선.'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왕건의 말을 믿는 척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연우 너의 역할이 막중하다. 네가 유배를 간 유금필을 돌봐줬지. 동양원 부인도 보살펴주고. 물론 다 내 언질을 받고 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유금필이 연우 너는 믿고 있을 것 아니냐?"
왕건이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언질을 줬다는 거지? 받은 기억이 없는데. 하지만 어찌 됐든 이러면 내 위상이 올라간다. 왕건이나 유금필이나 나를 가교로 삼아 관계를 회복시키려 하고 있어. 생색을 많이 낼 수 있겠는데.'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왕건이 본론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적당히 자기 변명을 늘어놓던 왕건이 마침내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래. 유금필의 심기는 지금 어떠하냐? 사람들에 대한 원망이 많겠지? 허허. 어쨌든 지금 유금필의 힘을 빌려야만 하는데. 유금필이 자기를 공격했던 대호족들에게 복수라도 한다고 나서면……내가 어찌해야 할지. 물론 대호족들이 잘못한 것은 맞는데 말이야."
"그런 일은 무조건 막아내겠습니다. 유금필 장군이 그런 마음을 품지 않도록 곁에서 잘 설득하겠습니다. 다만 유금필 장군에게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넉넉한 보상은 있어야……"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애초에 유금필도 상당히 정치적인 사람이라 대호족들에게 당장 복수를 할 마음은 없어. 나중에 가면 모르지만. 어쨌든 왕건은 유금필이 복수를 요구해서 난리가 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는 것 같군. 지금 내가 왕건과 유금필 사이를 오가며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는 시늉을 해서 숟가락을 얹어야겠다. 흐흐흐.'
"공을 세운 유금필에게 상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험험."
왕건의 말을 들은 나는 헛기침을 했다. 왕건은 헛기침의 의미를 기민하게 포착한 것 같았다.
"연우 너도 이번에 공이 크다.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너한테도 상을 내려야 하지. 근데 연우 너는 알아서 상을 챙겼잖니? 이제 왕만세가 고려 수군의 총수가 될텐데. 왕만세가 허우대만 멀쩡한 애였는데 일이 이리될 줄은 몰랐다. 결국 수군이 정윤 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명분상 합당하니 대호족들도 시비를 걸지 못할 것이다. 나도 인정할 거고. 그거면 상이 되지 않겠느냐?"
왕건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거야 내가 일이 그리 되도록 다 만들어 놓은 건데. 그걸로 퉁치려고 하네. 더 받아내야 하는데.'
나는 왕건의 말을 듣고도 아쉬웠다. 하지만 곤경에 몰려있는 왕건을 더 압박하는 것은 역효과가 날 수도 있었다. 나는 이쯤 받아내고 만족하기로 했다.
"저는 상 같은 것은 바란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폐하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내가 굽신거리자 왕건은 호탕하게 웃었다.
"연우 너와는 참 이야기가 잘 통해서 좋다. 날 많이 닮은 것 같아. 하하하."
그 말을 듣고 나는 약간 기분이 나빠졌다.
'내가 왕건을 닮았다고?'
그 사이 왕건은 다시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그렇고 연우 너는 또 뭐 없니? 지금 백제 수군의 일격으로 백성들의 사기가 말이 아니다. 뭔가 사람들의 시선을 돌릴 것이 필요한데."
아무래도 이번 백제 수군의 공격은 대비를 제대로 안 한 왕건의 잘못이 컸다. 왕건은 여론을 물타기 할 뭔가를 나에게 바라고 있었다.
"딱히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마후라 대사 이야기를 하신 것도?"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외쳤다. 이 급박한 와중에 왜 마후라 대사 이야기를 꺼냈는지 영문을 몰랐는데 이제야 이해가 갔다.
'사람들은 그런 신통한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중신들 앞에서 그랬으니 소문은 순식간에 퍼진다. 그리고 관심이 우선 그쪽으로 쏠리며 왕건에게 책임을 덜 묻겠지.'
내가 반쯤 감탄해서 왕건을 바라보는데 왕건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절대 아니다. 내가 마후라 대사에게 감탄한 것은 사실이야. 연우 너는 반드시 곤경에 처하면 그 주머니를 열어 봐라. 다만……그 이야기를 유포하면 민심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되긴 하겠구나."
며칠 뒤 패서 지역을 공격하던 백제 수군은 퇴각했다. 고려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유금필과 왕만세가 거느린 함대가 백제 수군 뒤를 쫓아다니며 견제해서 그 정도 피해만 입었다. 그런 견제마저 없었으면 큰일이 났을 것이다.
"유금필과 왕만세가 벽란도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전령이 그런 보고를 올리자 왕건은 긴장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그들을 맞이하러 나가야겠구나. 고려의 영웅들이니. 연우 너는 내 곁에 딱 붙어있어라. 유금필을 볼 때 네가 좀 중간에서 잘해줘라."
왕건도 이런 상황에서 유금필을 만나려니 민망한지 나에게 그런 당부를 했다.
왕건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벽란도로 나갔다. 선착장에 서서 잠시 기다리니 배에서 내리는 유금필과 왕만세의 모습이 보였다.
왕건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유금필을 보며 외쳤다.
"장인어른!"
왕건은 장인의 숫자가 워낙 많은 데다가 대부분의 장인들이 왕건보다 어렸다. 그래서 사석에서도 장인어른 타령을 안 했는데 이번에는 급하긴 급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유금필은 왕건을 보자마자 선착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쨌거나 유금필은 유배를 간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수군을 기르고 움직였다. 왕건이나 대호족들이 이걸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니 우선 무릎을 꿇은 것이다. 거기에 유금필은 궁지에 몰린 왕건의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허허허. 대장군 어서 일어나시오."
왕건은 약간 반색을 하며 말했다. 원래 유금필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는데 유금필이 이렇게 나와주니 기쁜 것이다.
나는 재빨리 유금필의 곁에 달려가 그를 부축하는 척하며 속삭였다.
"안심하십시오. 폐하께 내가 다 잘 말씀드렸습니다."
딱히 한 일은 없었지만 마치 내가 힘을 써서 일이 잘 풀린 것 마냥 말했다. 유금필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왕건은 그런 유금필에게 다가가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그 말을 듣고 유금필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됐다고 믿었는지 표정이 풀렸다.
한참 유금필을 위로한 왕건은 왕만세에게도 다가갔다.
"만세야. 내가 일찍이 너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군으로 삼았는데. 결국 큰일을 해내는구나."
왕건이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았다. 평소에 왕건이 왕만세를 어찌 평가했는지 아는 나로서는 웃음만 나왔다.
"과찬이십니다."
그 말에 왕만세는 감명을 받아 군례를 올렸다. 나는 또 숟가락을 올릴 기회를 포착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고려국 왕만세 장군이 어떻게 싸웠는지 모두 이 벽란도에서 보지 않았습니까? 고려국 왕만세 장군이 적을 막았습니다. 고려국왕만세입니다! 고려국왕만세!"
나는 마지막에는 두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일부러 중간에 숨도 안 쉬고 말을 이어 붙였다.
일찍부터 백제 수군의 기습을 예견한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다.
"맞습니다. 고려국 왕만세! 왕만세!"
"고려국왕만세!"
군사들과 백성들이 그렇게 외치기 시작했다.
"정윤비 마마. 그만하십시오. 민망합니다."
왕만세는 당황해서 나에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 곁에서 왕건은 흐뭇한 표정으로 군사와 백성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러다가 왕건은 왕만세의 한손을 잡고 들어 올리며 본인도 외쳤다.
"고려국왕만세!"
유금필과 왕만세가 복귀한 뒤에도 고려 조정은 어수선하게 돌아갔다.
"백제수군은 전력을 그대로 보존한 채 돌아갔습니다. 이에 반해 우리 고려 수군은 치명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우리 수군이 회복하기 전에 적이 한번 더 수군으로 공격할 것입니다. 이에 대비해야 합니다."
유금필은 그리 주장했다. 그리고 이젠 고려 조정에서 군사일에 관해 유금필의 의견을 무시할 사람이 없었다.
고려 조정은 수군을 재건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수군이 결국 다 나와 왕무의 기반이 된다 이 말씀이야. 왕만세 말고는 수군의 총수로 내세울 사람이 안 남았으니. 유금필이 수군을 거느리는 것은 왕건이나 대호족들 모두가 안 바랄걸? 왕만세가 정윤파인 것을 알면서도 밀 수밖에 없는 형국이지.'
나는 내가 계산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자 신이 나서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나는 먼저 부모님도 뵙고 자랑도 할 겸 상산저로 향했다.
"연우 네 말이 또 맞았구나. 30년간 패하지 않았던 우리 고려 수군이 이리 끝나다니."
상산저에서 임희는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유금필 장군도 이미 예측하신 일입니다. 관심만 가지면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유금필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유금필마냥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예측했다고 둘러댈 수 있는 것이다.
임희도 내 말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해도 충격이구나. 그래도 이번 일로 정윤 전하의 세력은 커졌다. 화재에 대비해 길을 닦고 대피훈련을 실시한 정윤 전하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개경 백성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다."
"여러 섬 목장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 사람들도 정윤 전하 덕에 살았다. 말들은 다소 잃었지만 관리들과 목동들은 다 땅굴에 숨어서 살았다. 목동들이 말들도 아예 섬 곳곳에 풀어놓고 땅굴로 달아나서 백제군들이 말들을 많이 약탈하지 못했다. 섬 곳곳을 수색할 시간은 그들도 없었을 테니. 다만 지금 섬 곳곳에 숨어있는 말들을 다시 수습하느라 일이 많다고 하더구나."
"다행입니다."
안면이 있는 교동도 사람들도 무사한 것 같아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연우 네 말을 따르면 정윤 전하나 우리 가문이나 걱정이 없겠구나."
임희는 문득 그런 말을 꺼냈다.
"그 정도는……"
나는 임희가 나를 너무 치켜세우니 민망해져서 어물거렸다.
"앞으로의 일은 차차 상황을 보고 논의하도록 하고. 아 최 선생께도 인사를 한번 드리고 가거라. 요사이 적적하신 모양이야."
임희의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산저에 온 김에 최치원도 보고 갈 작정이었다.
최치원의 처소에 들자마자 최치원은 웃으면서 말했다.
"문학공부는 그간 열심히 하셨습니까?"
"시간이 없어서."
대외적으로는 최치원의 제자인양 행세하는데 공부를 하나도 안 해서 나는 양심에 찔렸다.
"시간이 나면 한번 하십시오. 이번에 큰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저자에서는 다 정윤비 마마의 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정윤비 마마께서 천축고승이 준 신통한 주머니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파다합니다."
최치원도 그런 일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