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 후회 >
왕만세가 다른 지역을 걱정하는 와중에 군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교동도에도 불길이 오른다!"
내가 그쪽을 돌아보니 과연 거대한 불길과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백제수군의 별동대가 이젠 개경 인근의 섬과 항구를 돌아다니며 불을 놓고 있었다.
고려 수군의 주력은 사실상 궤멸된 상태라서 이걸 막을 수가 없었다.
'비룡성 관리들과 목동들이 미리 준비해 둔 땅굴을 잘 이용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사이 벽란도 앞바다의 해전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백제 수군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쪽은 왕만세의 함대를 뒤쫓고 다른 한쪽은 벽란도로 진입을 시도했다.
다만 벽란도 쪽의 저항도 격렬했다. 백제 수군이 벽란도에 들어서면 벽란도에 정박한 배들을 다 태울 수 있었다.
그 사태를 막기 위해 벽란도까지 헤엄쳐서 달아난 고려 수군 군졸들은 조운선들을 움직여 벽란도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조운선들을 희생해서라도 벽란도에 정박한 배 전체가 불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다만 백제수군도 그것을 알고 계속 불화살을 쏴서 다가오는 조운선들을 태우고 벽란도로 진입하려고 했다.
'왕만세가 시간을 벌어준 덕에 그나마 벽란도 입구를 막으려고 시도라도 할 수 있었던 거야. 왕만세가 등장하지 않았으면 벌써 벽란도를 다 태웠다.'
실제 역사를 아는 나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왕만세는 침통한 기색이었다.
"용의 후예를 자처한 우리 가문의 수군이 이리……"
사방에 불길이 타오르는 가운데 왕만세는 이마에서 땀을 줄줄 흘리며 함대를 움직이고 있었다. 초반에야 왕만세가 기습을 가해 백제 수군을 놀라게 하고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이제 완전히 함대를 둘로 나눈 백제 수군은 집요하게 왕만세를 뒤쫓고 있었다. 왕만세는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바람과 해류를 살펴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계속 땀을 흘리던 왕만세가 내쪽을 힐끔 바라봤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싸워주십시오. 지금 벽란도 앞바다에서 활동하는 고려 수군은 천우위 함대뿐입니다. 우리가 물러서면 벽란도가 그대로 불탈 것입니다."
나는 왕만세의 속내를 눈치채고 말했다.
'왕만세 입장에서는 정윤비인 내가 기함에 함께 타고 있으니 위험을 감수하고 계속 해전을 벌일지 말지 망설여지겠지. 그러나 지금은 내 안위를 살필 때가 아니다. 거기에 유금필은 반드시 시간에 맞춰 온다.'
나도 무섭긴 무서웠다. 배 위에서 백제 수군에 포위당하면 도망칠 곳도 없고 큰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유금필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한번 도박을 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왕만세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함대를 움직였다. 아슬아슬하게 백제수군에게 쫓기면서도 결코 벽란도 앞바다를 떠나지 않고 오락가락했다.
그러느라 왕만세와 천우위 함대 장졸들의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가을이라 추운데도 땀을 엄청 흘리고 있었다.
나도 목이 타는 것을 느꼈다.
"우리 육군이 출동했다!"
왕만세는 군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외쳤다. 과연 벽란도 주변 해안에 고려군의 깃발이 보였다.
개경 주변에는 중앙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혹여 백제 수군이 상륙을 시도할까봐 육군이 총출동한 것이다.
둥둥둥
해안에 배치된 고려 육군이 북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육군의 숫자가 많아서 그 소리가 바다를 메울 정도였다.
'그러나 소리만 질러봤자 뭐하겠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고려 수군의 잔존 세력이 백제수군의 벽란도 진입을 막기 위해 움직인 조운선도 거의 다 불탔다. 이제는 백제 수군이 그대로 벽란도로 들어갈 판이었다.
그때 군사들의 환성이 들렸다.
"서북에서 원군이 온다!"
내가 돌아보니 과연 수십 척의 전선들이 속속 벽란도 앞바다로 다가오고 있었다.
'유금필의 함대다! 그런데 저게 다야?'
나는 약간 실망했다. 50척의 전선이라고 해서 나는 상당히 기대를 했지만 유금필이 끌고 온 전선은 거의가 소형선이었다. 이외에 상선을 개조해서 만든 중형선이 약간 있었다.
'하긴 유금필이 끌고 간 평산의 사병과 하인들 숫자가 얼마나 되겠어? 거기에 곡도에 유배된 상태에서 큰 배를 모을 수가 없지.'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와아아아."
해안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고려 육군과 주민들이 엄청난 함성을 질러주었다. 어쨌든 소형선이라도 고려의 깃발을 매단 전선들이 바다를 메우니 사기가 오르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육군이 소리만 지르는 것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나는 왕만세나 다른 천우위 군졸들의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이 다시 힘을 되찾은 것 같았다.
"원군과 합류한다!"
왕만세가 외쳤다. 왕만세는 내 말을 듣고 이미 곡도에서 원군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백제 수군을 피해 후퇴하면서도 그걸 염두에 두고 함대를 움직였다.
그래서 천우위 함대는 순조롭게 유금필 함대와 합류했다. 그리고 상선을 개조한 중형선이 왕만세의 기함 가까이로 다가왔다.
"대장군!"
나는 배 난간에 기대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뱃머리에 유금필이 서있는 것이 보였다.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유금필은 뱃머리에서 가볍게 군례를 올렸다.
그리고 내 곁에서 왕만세도 다급하게 외쳤다.
"장군. 앞으로 어찌해야 합니까?"
왕만세는 나에게 그동안 사정에 대해 모두 들었다. 그 덕에 유금필이 이 모든 것을 예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향후 방책에 대해 묻는 것이다.
"우선은 벽란도 입구를 막고 개경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백제 수군도 굳이 벽란도에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항이 격렬한 이곳을 피해 다른 곳을 쳐서 불태우는 것이 더 이득이니."
유금필이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왕만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유금필과 함께 60여 척의 세력으로 벽란도로 향했다. 여전히 백제 수군의 세력이 더 강했지만 유금필의 말대로 백제 수군은 교전을 피하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틈을 타 천우위 함대와 유금필 함대는 벽란도 입구에 늘어서는데 성공했다.
"아이고."
내 곁에 서있던 왕만세가 그대로 갑판 위에 주저앉았다. 다른 군졸들도 마찬가지였다. 해전을 벌이느라 지친 모양이었다.
유금필이 끌고 온 함대의 군졸들도 그냥 배위에 드러눕기 시작했다. 별다른 해전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곡도에서 여기까지 전력을 다해 달려오느라 지친 것이다.
그리고 왕만세의 기함으로 유금필이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먼저 나를 보고 유금필이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이쯤해서 개경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직 상황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백제 무리들이 백주, 정주, 염주 같이 취약한 해안 고을들을 휩쓸고 다닐 것입니다. 우리가 이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군졸들이 힘을 회복하면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출진해야 합니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여기서 돌아가십시오."
"그래야겠지요."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함께 해봤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유금필이나 왕만세가 내 안위를 고려하며 함대를 움직여야 해서 부담만 될 것이다.
"정윤비 마마! 개경에 가서 폐하께 잘 말씀드려주십시오. 이 늙은이의 목숨이 정윤비 마마께 달려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유배지에서 수군을 기르고 이리 개경에 달려온 것인데……직접 폐하를 뵙고 싶은데 지금 제가 수군에서 손을 뗄 수 없는 상황이라서."
유금필은 간곡한 어조로 당부했다. 유금필은 왕건이 자신의 행동을 어찌 생각할지 걱정이 되는 것 같았다.
'왕건이 이 상황에서 유금필을 해할 정도로 막힌 사람이 아니야. 실제 역사에서도 유금필에게 고마워하며 일을 잘 풀어나가는데. 아니지? 이 기회에 내가 힘을 쓴 거 마냥 생색을 내야겠다.'
역사책을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자기를 도와준 장군을 해꼬지 하는 군주들이 훨씬 더 많았다. 유금필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당연했다. 보통 사람들 생각에는 고마워하는 게 상식 같았지만 역사를 보면 배은망덕한 사람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걱정마십시오. 폐하 곁에서 순리대로 일이 풀리도록 힘쓰겠습니다."
나는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다짐했다.
"제 말씀도 잘해주십시오."
유금필이 걱정을 하자 왕만세도 갑자기 덩달아 그런 소리를 했다.
'왕만세는 걱정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굳이?'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왕만세에게도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리고 나는 천우위 전선 한 척에 올라 벽란도 안쪽으로 향했다. 벽란도의 상황은 참혹했다. 군데군데 불탄 상선들의 모습이 보였다.
백제군의 본격적인 화공은 막았지만 불똥이 튀거나 바람을 타고 불화살이 깊숙이 날아와서 어느 정도 피해는 있었다.
'그래도 내가 없었으면 싹 다 불탔다. 이 정도면 양호해.'
내가 태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배가 부두에 정박했다. 그런데 막 배에서 내리려던 나는 움찔했다.
선착장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고려 육군 외에 주민들도 가득했다. 나는 무심코 그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와아아아
내 손짓에 호응해서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것을 즐기면서 배에서 내렸다. 내가 내리자마자 홍유, 배현경 두 장군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이 군사들을 이끌고 직접 해안 방어를 위해 출진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천우위 쪽에서 배 한척이 다가오자 직접 상황을 살펴보러 나온 것 같았다.
"정윤비 마마께서 어찌 배에서?"
두 장군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물었다. 한창 백제 수군과 교전을 벌인 배에서 정윤비인 내가 나타나니 놀란 것 같았다.
"천우위 함대와 함께 발해 유민들을 위한 물자를 나르던 중 백제 도적들이 쳐들어온 것을 보고 달려온 것입니다."
내가 미리 준비해둔 변명거리를 꺼냈다.
"참 천운입니다. 천우위가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다면 큰일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서북쪽에서 나타난 수군은 어디 소속인지?"
배현경이 나에게 물었다.
"유금필 장군이 키워놓은 수군입니다."
"유금필 장군? 흐음."
내 대답을 들은 홍유와 배현경은 난감한 기색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폐하께 안내해 주십시오. 폐하께 그간의 사정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폐하께서는 난리가 나자 직접 출진하셨습니다. 가까운 군영에 계십니다."
홍유와 배현경이 나를 직접 안내했다. 홍유나 배현경도 상황이 다급해서 초조한 것 같았다. 빠른 걸음걸이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곧 왕건이 머물고 있는 천막에 당도했다.
천막 안에는 왕건을 비롯해 고려의 장군, 중신들이 총출동해 있었다. 수도 코앞에서 이 난리가 났으니 다 달려나온 것이다.
나는 그 가운데 앉아있는 왕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며칠 사이에 살이 엄청 빠졌네.'
고창 전투 이후에는 살이 피둥피둥 올라서 살이 안 빠져서 걱정이라던 왕건이었는데, 지금을 얼굴이 핼쑥했다.
내가 불쑥 나타나자 왕건도 놀란 것 같았다.
"연우 네가 어찌? 하긴 너는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구나."
왕건이 평소와 달리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몸을 벌벌 떨더니 나를 향해 외쳤다.
"마후라 대사! 마후라 대사의 주머니를 다시 한번 보고싶다!"
나는 왕건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마후라 대사가 여기서 왜 나와? 왕건은 그 주머니 안을 이미 봤는데?'
내 예상을 벗어나는 왕건의 반응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그러나 나는 그 주머니를 품속에 항상 지니고 다녔다. 그래서 바로 그 주머니를 꺼내서 왕건에게 건넸다.
손을 덜덜 떨며 주머니를 연 왕건이 쪽지를 꺼내 읽고 한숨을 쉬었다.
"마후라 대사가 살아계실 때 더 잘해줬어야 했다. 과연 대사의 말대로 됐구나.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나에게 가르침을 주셨어. 그런데 그걸 흘려들었으니."
'그러고 보니 마후라 대사가 죽기 전에 주머니 속의 내용이 몰래 훔쳐 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도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라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왕건은 쪽지를 주머니 속에 넣더니 다시 나에게 건네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사의 말씀대로 연우 네가 곤경에 처했을 때 열어보도록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