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26화 (126/216)

< 126 : 불타는 벽란도 >

"정윤비 마마 괜찮으십니까?"

왕만세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배를 타고 교동도를 오간 경험도 있습니다. 선상 생활을 꽤 해봤습니다"

"그래도 바다에 이리 오래 나와 계시니……송구스럽습니다. 소장 때문에."

"그런 생각 마십시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왕만세를 안심시켰다. 갑판 위에서 허리를 쭉 피면서 나는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위섬인 반니도 주변으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드디어 9월. 백제수군이 온다.'

백제 수군이 오는 만큼 왕만세는 아예 천우위 함대를 이끌고 반니도에 머물러 있었다. 나도 그런 왕만세의 기함에 동승했다.

나는 백제 수군의 기습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왕만세는 여전히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함부로 수군을 움직이는 것을 왕만세는 부담스러워했다.

"발해유민들을 위한 물자를 실어 나른다는 명분으로 전선을 움직였는데……그러지 않고 반니도에 계속 머무른 것을 혹여 다른 이들이 알게 된다면……"

왕만세가 나에게 어물거리면서 말했다.

나중에 일이 잘못 돌아가서 혼자 책임을 질까봐 불안해하는 왕만세의 심정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왕만세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내가 왕만세의 기함에 타 있으면 왕만세는 그저 내 명에 따랐다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한림원에는 과감히 휴가를 냈다.

'휴가를 이리 자주내면 결국 한림원에서 잘리려나? 에라 모르겠다. 정세가 급박하니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어. 그건 그렇고 왕만세가 좀 소심한 면이 있네. 아니지. 역시나 수군이긴 해도 군사를 개경 인근에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거니 왕만세가 불안해하는 것이 정상인가? 내가 같이 움직여줘야 왕만세의 마음이 편하지. 왕무는 뭐, 나를 이해해 줄거야.'

왕무를 떠올리자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왕무는 백제 수군이 기습해도 나는 궁에 있고 왕만세 등이 직접 군사를 지휘해 실전을 치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확실하게 그에 대해 입 밖에 꺼낸 것은 아니지만 왕무가 그리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은연중에 느껴졌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덜컥 왕만세의 기함에 탔다. 백제수군과의 전투가 벌어지면 나도 휘말릴 것이다.

'그러나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이번에 백제 수군의 기습을 기회로 나와 왕무의 입지를 확고하게 해놔야 한다. 내가 왕만세의 기함에 타고 있어야 숟가락을 올리기 좋아.'

그런 계산 끝에 나는 8월 말부터 왕만세와 함께 반니도에 주둔하고 있었다. 바위섬에 주둔하고 있으니 식수를 구하기도 힘들고 고생스럽긴 했다.

'지금이 9월 초인데 백제 수군은 언제 올까? 역사서에는 9월에 오는 것은 적혀있는데 날짜는 안 적혀있어. 설마 9월 말에 오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걱정되는 것이 있어서 왕만세에게 물었다.

"천우위 군사들의 사기는 어떻습니까? 추수가 끝난 시기에 이리 반니도에 나와 있어서 불만이 많지는 않습니까?"

9월 초면 추수가 끝나서 일이 없고 창고에 식량도 풍족했다. 1년 중 제일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군사들도 이 시기에 푹 쉬었다.

그런데 천우위 군사들은 반니도에 주둔하며 백제 수군이 올 것에 대비한 훈련을 하고 있었다. 군사들이 이 상황에 대해 어찌 생각할지 근심이 됐다.

"그런 것이야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나중에 따로 휴가를 주든지 해서 군사들을 달래면 됩니다."

왕만세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믿음직스럽게 대답해서 나도 안심할 수 있었다. 왕만세는 이 밖에도 매일 정찰선을 보내 개경 인근의 해역을 살피게 했다. 그런데 한동안 아무 일이 없었다.

"9월이 지나도 아무 일이 없으면 그대로 개경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왕만세가 나에게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지레 찔려서 그리 말했다. 그런데 배에 걸린 깃발을 살피던 왕만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사이 가을이라 그런지 북서풍이 거세게 붑니다. 만에 하나 정윤비 마마의 예견대로 일이 터지면 이럴 때 터질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왕만세의 말이 옳았다. 새벽녘에 왕만세가 보냈던 정찰선이 황급히 반니도로 돌아왔다.

웅성웅성

반니도에 주둔한 수군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정찰선에 불에 탄 자국이 보이는데?"

"왜 저러지?"

멀리서 정찰선을 살펴본 천우위 군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데 왕만세의 기함에 올라온 정찰선의 선장이 외쳤다.

"크, 큰일났습니다! 백제 수군이 개경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적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 세어보려고 했지만 백제 수군이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불화살을 쏘며 나포하려고 해서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다만 백제 수군 전선의 숫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벽란도 앞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진짜 일이 터지다니! 전군 출격준비를 하라!"

왕만세는 경악하면서도 함대를 움직일 준비를 했다. 그러더니 내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고려 수군이 정찰선을 항시 운용하고 있는데……"

"여러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백제 수군은 우리 눈을 피해서 요동까지 가서 거란 사신을 태워 와서 다시 돌려보내는 일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풍랑 때문에 한번 난파해서 우리에게 걸린 것입니다. 우리 고려 수군의 경계망은 이미 무력화된 지 오래입니다."

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막상 일이 닥치니 떨렸다. 천우위 함대 15척으로 우선 백제 수군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래도. 설마 이리될 줄은."

왕만세는 내 설명을 들어도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지 홀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나에게 언질을 받은 왕만세가 이 정도면 다른 고려 수군 대장들은 더 공황상태일 것이다. 서둘러 가야했다.

"장군!"

나는 왕만세에게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로 고함을 질렀다.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은 왕만세가 명을 내렸다.

"미리 준비해둔 어선을 곡도에 보내라! 적습을 알려라. 우리는 벽란도에 나간다. 아군 함대를 구하고 재편성을 돕는다!"

왕만세의 지휘에 따라 기함에 출진을 알리는 깃발이 올랐다. 천우위 전선들은 전투 대형을 갖춘 채 벽란도로 나아갔다.

그리고 멀리서 벽란도 앞바다가 보이기 시작하자 군졸들이 동요해서 외치기 시작했다.

"불길이다! 불길!"

"적이 화공을 쓰고 있다."

백제 수군과 고려 수군은 이미 교전을 시작한 것 같았다. 멀리서 불길이 보이는데 하나같이 고려 수군 전선들이 불타고 있었다.

"바람! 바람이 너무 안 좋습니다!"

왕만세는 내 곁에서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가을이라 북서풍이 불고 있었고 유금필의 예견대로 아침이라 해륙풍이 바다에서 땅 쪽으로 불고 있었다. 이 바람을 이용해 백제 수군이 화공을 가하자 고려 수군은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나도 막상 군사들의 고함소리를 듣고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니 정신이 얼떨떨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이제부터는 왕만세를 믿을 수밖에 없어. 곡도에서 유금필이 빨리 와야 할 텐데.'

나는 곡도 쪽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마침내 천우위 함대는 해전이 벌어지는 벽란도 앞바다에 도착했다. 백제 수군의 규모는 족히 100척은 넘어 보였다. 고려 수군은 비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우선 백제 수군의 대규모 습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고려 수군은 평상시처럼 벽란도 및 개경 인근의 섬들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100여 척에 이르는 백제 수군은 새벽녘에 개경 앞바다에 출현해서 똘똘 뭉쳐서 고려 수군을 각개격파하고 있었다.

거기에 바람이 너무 불리했다. 해륙풍이 부는 상황에서 고려 수군은 허겁지겁 기지에서 나와 백제 수군을 막으려고 했지만 역풍이라서 배의 속력이 안 났다. 이에 반해 수도 많고 순풍을 타고 있는 백제 수군은 마구 화살을 쏘아댔다.

"배를 버려라! 탈출하라!"

고려의 수군 장수들은 비통하게 외쳤다. 군졸들이라도 살리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벽란도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배를 버리고 헤엄쳐서 벽란도에 도착하면 살 수 있었다. 고려 수군 장수들도 기함을 버리고 작은 배에 올라타 달아났다.

다만 벽란도에 있는 수많은 주민들은 코앞에서 고려 수군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격이었다.

"꺄아아아악."

벽란도에서 절규하는 주민들의 비명소리가 바다에 가득했다.

'백제 수군이 벽란도에 정박해 있는 상선이며 조운선을 태우면 그 타격은 어마어마하다. 하필 추수가 끝난 직후라 조운선들이 많이 와 있는데. 그래도 나와 왕무가 내려놨던 조치가 통하긴 통했군.'

벽란도의 주민들이 겁먹은 상태에서도 왕무가 닦아놓은 큰길을 따라 도망치는 광경이 보였다. 몇 개월 전 왕무가 정무를 대행할 때 벽란도의 길을 정비하고 화재 대피 훈련도 실시했다.

주민들은 비명을 계속 지르면서도 그 길을 따라 빠져나가고 있었다.

"백제 수군의 뒤를 친다! 풍세가 바뀔 때까지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적이 마음 놓고 벽란도를 공격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조금만 더 버티면 서북에서 50척의 원군이 온다! 동요하지 마라."

벽란도에 오기 전까지는 동요하던 왕만세도 전투가 임박하자 결연한 표정으로 수군을 지휘했다.

지난 며칠간 반니도에서 집중적으로 훈련을 받은 천우위 함대는 그대로 교전에 돌입했다. 천우위 함대가 차례로 백제 수군의 전선들을 격파했다.

왕만세의 함대는 반니도에 대기하고 있다가 백제수군의 뒤에서 출현했다. 그래서 순풍을 타고 백제수군의 후방을 덮치는 셈이었다.

'거기다가 고려 수군 주력과 싸우느라 지금 백제 수군은 모두 뱃머리를 벽란도 쪽으로 향해 놓았다. 백제 수군이 왕만세의 함대와 싸우려면 뱃머리를 우선 돌려야 하는데 이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역시 유금필의 말대로 해륙풍을 이용해 싸우는 게 답이었어.'

왕만세는 침착하게 바람을 타고 백제 수군을 치면서도 적의 대열에 깊숙이 들어가는 일은 피했다.

수적으로 너무 열세라서 순풍을 타고 신이 나서 공격을 하다가 백제 수군에게 포위당하면 끝이었다.

왕만세에게 기습을 당한 백제 수군은 벽란도로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왕만세의 함대는 불과 15척밖에 되지 않지만 그 중 대선이 7척이나 됐다.

백제 수군이 100여 척에 이르긴 해도 대선의 수는 20여 척 정도였다. 왕만세가 거느린 전력을 백제 수군이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백제수군이 벽란도에 그대로 진입했다가 왕만세의 함대가 항구 입구를 막으면 백제 입장에서도 난리가 나는 것이다.

백제 수군 일부가 왕만세를 공격하기 위해 뱃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느라 백제 수군의 공격이 느슨해졌다.

"벽란도로 후퇴하라! 거기서 재정비한다."

백제 수군에게 각개격파 당하던 고려 수군 전선 일부가 그 틈을 타 후퇴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도대로 고려 수군을 일부라도 구한 왕만세가 명을 내렸다.

"조심스레 물러난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한다."

왕만세의 함대가 물러나자 백제 수군 일부도 느릿느릿 쫓아오기 시작했다. 백제 수군 입장에서는 역풍을 맞으며 왕만세의 뒤를 쫓는 것이라 조심스러웠다. 이러다가 왕만세가 순풍을 타고 다시 급습하면 백제 수군이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와아아아

그리고 벽란도 주변에서 다시 함성소리가 들렸다. 아까처럼 비명만은 아니었다. 천우위 함대는 의전을 위한 부대라서 깃발도 화려하고 배에도 색이 칠해져 있었다. 멀리서도 잘 보였다. 천우위 함대 일부가 등장해서 백제수군을 요격하는 모습이 벽란도에서도 보일 것이다. 고려 사람들은 천우위 함대의 출현에 어느 정도 사기를 회복한 것 같았다.

"정윤비 마마께서 백제 수군이 이게 다가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던 것 같습니다만. 맞습니까?"

왕만세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나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도 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이때 백제 수군이 개경뿐만 아니라 패서 지역의 여러 항구와 섬을 동시에 공격했다.

"그쪽은 어찌 됐을지?"

왕만세가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