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 반니도 >
왕건은 자신의 호언장담대로 10일 안에 돌아왔다. 조용히 돌아온 왕건은 한림원에 나와서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하하하. 일모산성 주변의 보급로를 다 끊고 돌아왔다."
그 웃음소리가 왠지 어색했다. 한쪽에 있던 대내학사 김악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입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 얘기를 왜 지금 하지?"
왕건이 안색을 약간 굳히며 김악에게 물었다.
"일모산성이 안 떨어졌으니 폐하께서 근심하실까봐……어쨌든 분위기는 여전히 우리 고려에게 좋습니다."
김악이 굽신거리며 대답하는데 격노한 왕건이 서탁을 치며 말했다.
"아니 주변 보급로를 다 끊고 공직을 남겨두고 왔으니 일모산성은 함락된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리니 내가 바빠서 돌아온 것일 뿐!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니? 내가 패했다는 거야?"
"소신이 책만 읽어서 군사일에 대해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나름 왕건을 위로하기 위해 나섰다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김악이 당황해서 말했다.
"음, 그건 그렇군. 어쨌든 사실상 일모산성은 함락된 것이나 다름없다."
왕건은 헛기침을 하며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견훤이 특별히 공직 등을 감시하기 위해 일모산성에 정예들을 보낸 것 같아. 이 상황에서도 왕건의 공격을 버텨내다니.'
나는 새삼 견훤의 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내 귀에 혼자 앉아 있는 왕건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삼한 땅에는 험한 산이 많아서 지키고 있으면 공격이 워낙 어려우니."
왕건도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분위기가 좋아도 일모산성이 버티고 있었다. 견훤이 마음먹고 시간을 끌면 삼한통일이 어려워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왕건도 하는 듯했다.
'견훤이 역시 군사적 능력 자체는 우수하다. 그런데 그 견훤이 보낸 수군을 상대로 일전을 벌어야 하니. 그것도 다른 사람들은 나를 돕지도 않고. 이제는 두달도 안 남았다.'
나는 목이 타서 침을 꿀꺽 삼켰다.
이 후삼국 시대에 떨어진 이래 내가 주도적으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요 근래 왕만세는 매일 나주원에 오고 있었다. 내가 유금필과 나누었던 모든 이야기를 알려주었지만 왕만세는 여전히 백제수군의 기습에 대해 긴가민가한 기색이었다.
다만 내가 워낙 강력하게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니 왕만세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만약 백제수군이 개경 앞에 당도해서 해륙풍을 타고 공격을 가한다면, 우리 함대는 그런 백제수군의 배후에 위치해 있어야 합니다. 바다에서 땅으로 바람이 부니 우리 함대가 백제수군 배후에 위치해 있으면 순풍을 탈 수 있습니다. 다만 아무 것도 없는 바다에 오래 정박할 순 없으니 적당한 섬에 주둔해 있어야 합니다. 반니도가 좋을 것 같습니다."
개경 주변의 바다와 섬들을 그린 지도를 가져온 왕만세가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반니도라."
나는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반니도는 바위섬이라 백제수군도 공격 대상으로 삼지 않고 지나갈 것입니다. 반니도 근처에 전함을 숨겨두고 있다가 백제수군이 개경을 급습할 때 그 뒤를 치면 바람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백제 수군이 온다면 말입니다."
수군전술에 조예가 있는 왕만세가 말했다.
"좋습니다. 8월 말부터는 천우위 함대들을 이끌고 반니도 인근에 주둔해야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왕만세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수군을 움직이려면 폐하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군사와 전선들이 원래 주둔지를 떠나 함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폐하께 직접 말씀드려 허락을 얻어내겠습니다."
나는 왕만세를 안심시키기 위해 자신감 있게 말했다. 다만 내 마음도 심란했다.
'확실히 개경 근처에서 군사를 움직이려면 왕건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나 참. 뭐 하나 속시원하게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그래도 왕건과는 거의 매일 한림원에서 얼굴을 보는 사이니 어찌 되겠지.'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한림원에 나갔다. 이제는 시간도 없고 왕건에게 오늘 내일 내로 허락을 받아내야 했다. 천우위 함대가 반니도 인근에서 훈련을 할 시간도 필요했다.
그런데 한림원에 오자마자 왕건이 나를 불렀다.
"연우야. 아마 정윤이 조만간 북방을 둘러보고 올 것이다. 오늘 어전에서 정윤에게 명을 내렸다. 정윤도 북방을 둘러보며 그곳의 장수들과 인연을 더 다져야지. 어떠냐? 내가 약속을 잘 지키지?"
왕건이 말했다. 지난번 왕무에게 정무 대행을 맡길 때도 그렇고 왕무에게 뭘 해줄 때마다 왕건은 꼭 나한테 생색을 냈다.
'하필 이런 시기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왕무가 북방국경을 시찰하면 한두달 안에 돌아올 수 없었다. 결국 개경에 백제 수군이 오면 나 홀로 대응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왕건이 기껏 호의를 베풀어 왕무를 북방에 보내는 것인데 이를 거절할 순 없었다.
"감사드립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면서 왕건의 눈치를 봤다. 왕건의 기분이 좋아보였다. 좋은 기회라 여긴 나는 말을 이었다.
"백주에 살고 있는 발해유민 문제와 관련해서 폐하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 뭐냐? 발해유민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말해라."
왕건은 북방 진출이나 발해유민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 말에 반색을 하며 답했다.
"제가 표천현의 은광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발해유민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표천현에서 은광석을 개경까지 보내면, 개경에서 은을 제련하고 물자를 사서 백주의 발해유민에게 보냅니다. 그 물량이 많아 배로 실어 나르는데 요새 배편이 부족합니다. 헤헤, 그러니 천우위 해령의 전선들을 제가 좀 이용할 수 있게 해주시면……발해 유민들을 돌보는 것도 나랏일이니."
"허허, 요새 우리 연우가 돈을 좀 만지는 모양이구나. 하긴 그 독특한 은제련법을 사용하니 수입이 많겠지."
왕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전선을 쓰게 해주시는 것입니까?"
왕건이 허락을 해줄 분위기라서 나는 설레는 표정으로 외쳤다.
"그런데 천우위가 아무리 의전을 위한 부대라도 엄연히 수군인데. 함부로 움직일 수가……"
그러다가 왕건이 짐짓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이, 이러면 안 돼.'
속으로 절규하는데 왕건이 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수군을 운영하는데 돈이 워낙 많이 드는데 배들을 그냥 정박만 시켜두는 것도 아깝고. 허허허. 이를 어쩐다. 수군전선을 활용해 돈을 번다면 나라에 유익할텐데."
그제서야 나는 왕건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연히 천우위 전선들을 사용하면 표천현에서 나는 은 일부를 그 사용료로 바쳐야죠."
"그래, 그래 잘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왕만세가 너랑 친하지. 사용료를 두둑히 내도 네 손해는 아니다. 오히려 너한테 이득이지. 그 사용료를 내가 쓰겠니? 수군 강화에 쓰지. 즉 왕만세도 덕을 본다는 거야."
왕건이 흡족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이 시대는 백제와의 전쟁 때문에 엄청난 숫자의 육군을 유지해야 했다. 여기에 수군까지 따로 두니 왕건은 돈이 달릴 수밖에 없었다. 평시에는 수군 전선들이 상선 역할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이리 저리 뛰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돈을 낸다고 하자 수군전선을 이리 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나마 수군병력이니 이렇게라도 움직이게 허락해줬지. 육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허락 안 해줬을 거다. 수군을 동원해 반란 같은 걸 벌일 수는 없으니.'
나는 겨우 가슴을 쓸어내렸다. 왕건의 허락을 받아냈으니 이제 천우위 함대는 공식적으로 개경 인근 바다를 오락가락 할 수 있었다.
'표천현에서 물자를 실어 백주까지 오다가 잠시 반니도에 정박하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다. 그 핑계로 반니도에 천우위 수군을 주둔시켜야지.'
겨우 큰 고비를 넘긴 나는 터덜터덜 나주원으로 돌아왔다. 왕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일이 바쁜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왕무가 북방을 시찰하기 위해 떠난다고 했지. 그 일을 준비하느라 바쁘겠네.'
그러다가 나는 한순간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한동안 왕무를 못 보는 거네.'
나는 저도 모르게 내 입술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멍하니 서탁 앞에 앉아있는데 왕무가 처소에 들어왔다.
"북방시찰을 위해 개경을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왕무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국선. 국선과는 잠시 떨어지게 됐습니다."
왕무가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이리 싫지? 따지고 보면 왕무가 북방시찰을 가는 것이 처음도 아니고. 하긴 조만간 백제수군이 기습하는데 무장으로서 능력이 뛰어난 왕무가 개경을 비우니 그렇지. 왕무가 개경에 있으면 큰 도움이 될텐데.'
그 사이 왕무는 자연스럽게 나를 껴안더니 입을 맞춰왔다. 나도 이제는 익숙하게 왕무에게 기댔다. 그러다가 문득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내가 잠시 왕무의 어깨를 밀어냈다.
"국선?"
잠시 뒤로 물러나며 왕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하께서 북방을 시찰하실 때 서경도 들리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서경이 북방의 중심이니 그곳에 한동안 머무를 것입니다."
"그때 전하께서 서경유수 왕식렴을 만나 부탁 하나를 해주십시오."
나는 왕평달이 세상을 떠날 때를 떠올렸다. 그때 왕평달이 힘을 써줘서 서경유수 왕식렴은 나와 왕무의 부탁 하나를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그걸 이번에 사용할 작정이었다.
"내가 무슨 부탁을 하면 됩니까?"
"왕식렴에게 개경에 정박해 있는 서경 소속 상선과 선박들을 9월 한달 동안만 빼라고 부탁해주십시오."
서경도 이제 큰 도시고 왕건이 중시해서 몇 번이나 다녀가는 곳이었다. 상업이 발달해서 서경의 수많은 상선들이 개경을 오가고 있었다. 벽란도에 머물러 있는 서경 소속 배들이 많았다.
'그 많은 배들을 빼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긴 하지만 왕식렴은 아마 우리 부탁을 받아들일 것이다.'
왕식렴 입장에서는 왕평달 때문에 우리와 그런 약속을 한 것이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번거롭긴 해도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는 이런 부탁을 받으면 기뻐하며 들어줄 게 뻔했다.
내 말을 들은 왕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제 수군이 올 확률이 있으니 그 부탁을 이용해 서경 사람들의 배가 화를 피할 수 있게 해주려는 것이군요. 국선의 마음씨가 참 곱습니다."
왕무가 나를 그리 칭찬했다.
'그게 아니야. 백제 수군이 왔을 때 서경 배들만 싹 빠져서 피해를 안 입어 봐. 유긍달, 황보제공 등이 왕식렴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걸? 물론 그 한방으로 그들의 연합을 와해시킬 수는 없지만. 약간이라도 의심을 품으면 예전 같은 결속력은 보일 수 없다.'
나는 왕무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해주려고 했다. 그런데 왕무는 그럴 여유를 안 주고 다시 입을 맞춰왔다.
'일 얘기를 해야 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왕무가 굳이 내 의도를 알고 왕식렴에게 부탁을 할 필요는 없어. 그냥 부탁만 하고 오면 되니. 아니 오히려 왕무가 내 의도를 모르고 선량한 표정으로 말을 해야 왕식렴이 의심을 안 하지. 그래 일 얘기는 더 할 필요 없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나는 두 팔로 힘껏 왕무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진짜 왕무를 몇 달간 못 보는구나.'
갑자기 내 눈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왕무도 없이 백제수군과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해서 긴장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왕무의 입술이 내 눈물을 닦아줘서 나는 긴장을 풀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