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24화 (124/216)

< 124 : 해륙풍 >

공직을 위한 연회는 계속 이어졌다. 술을 마시다보니 발언의 수위도 점점 높아졌다.

"제가 기인으로 제 아들들을 개경에 두고 가도 폐하께서는 마음이 불안하실 것입니다. 저에게는 볼모가 아무 의미도 없으니 말입니다."

술에 많이 취한 공직의 입에서 그런 말까지 나왔다.

"그건 그렇지. 하하하."

왕건도 취했는지 공직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 나쁜 놈들!'

나는 속으로 왕건과 공직을 비난했다. 나같은 경우는 아버지인 임희가 확실하게 왕건을 따르는 사람이라서 마음 편하게 학관에 다녔다. 만약 임희가 공직같은 사람이었다면 나는 잠도 못 잤을 것이다.

나는 화가 나서 술을 한 잔 더 들이켰다. 앞으로 공직같은 호족들을 통솔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되고 갑갑했다.

공직 역시 술을 한잔 더 들이키더니 입을 열었다.

"폐하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소신이 계책 하나를 마련해 왔습니다."

"무엇인가?"

"매곡성 가까이에 일모산성이란 곳이 있습니다. 요충지라 주둔하는 백제군의 수가 많습니다. 폐하께서 군사를 지원해 주신다면 소신이 선봉에 서서 성을 치겠습니다. 소신이 일모산성을 치고 백제군을 죽인다면 다시는 백제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공직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허나 여름이라 군사를 움직이기 좋지 않은데…… 굳이?"

왕건이 말끝을 흐리자 공직이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소신이 매곡성의 군사들을 모두 동원하여 나갈 것입니다. 약간의 군사만 보태주십시오."

"그래. 그렇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매곡성주의 갸륵한 정성을 생각해서 출진하겠다. 내가 직접 나서겠다."

한번 튕기던 왕건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광경을 보던 나는 갑자기 술맛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술잔을 내려놓았다.

'저 인간들이 술에 취한 게 아니구나. 그냥 술에 취한 척 해서 자연스럽게 저런 얘기를 해보려고 그런 거야. 젠장 나만 심란해서 진짜 술을 마셨어. 진짜 음흉한 사람들이야.'

이 와중에 진짜 취한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서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왕건이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만 연회를 마치자!"

공직으로부터 원하는 말을 듣자마자 연회를 딱 끝내는 것만 봐도 술에 취한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왕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장내의 사람들은 흩어졌다. 나는 약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나주원을 향해 걸어갔다.

"국선 조심하십시오."

휘청거리는 나를 왕무가 재빨리 부축했다. 왕무도 꽤 술을 마셨는데 조금도 취한 것 같지 않았다.

"언덕이라서 걷기가 힘듭니다."

나는 왕무에게 그런 하소연을 했다. 왕궁이 언덕에 있으니 술을 마시고도 한참 걸어야 했다. 내 말을 들은 왕무는 내 어깨를 껴안고 나를 부축했다. 아니 부축이 아니라 그냥 나를 들고 간 수준이었다.

'왕무 힘이 워낙 세서 이게 되네. 한팔로 나를……'

어쨌든 그 덕에 나는 수월하게 처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처소 문을 닫자마자 왕무가 나를 껴안았다. 왕무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약간이지만 술을 마시고 또 나주원에 오는 동안 부축하느라 반쯤 껴안아서 그런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왕무에게 괜히 걷기가 힘들다고 말한 것 같았다. 왕무는 그대로 나에게 입을 맞춰왔다. 평소보다 급한 거 같았다.

'오늘은 좀 위험할 지도.'

그래서 나는 살짝 왕무를 밀어내며 말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목이 마릅니다. 다리도 아프고요. 조금 쉬었다가 하는 게……"

입맞춤을 해도 어느 정도 왕무가 진정을 하고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흐름을 끊었다.

"알겠습니다."

왕무는 내 말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탁자 쪽으로 걸어가서 물이 담긴 주전자를 가지고 왔다.

"고맙습니다."

나는 손을 내밀어 물주전자를 받아들려고 했다. 확실히 목이 마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왕무는 자기가 먼저 물주전자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왕무도 목이 말랐나? 그런데 아무리 급해도 물그릇에 부어서 마셔야지.'

나는 왕무에게 물그릇을 가져다주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왕무는 물을 입에 머금은 채로 그대로 침상에 앉았다. 그러더니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자연스레 나는 왕무의 무릎 위에 앉게 됐다.

"전하."

내가 당황해서 뭐라 말을 해보려는데 그대로 왕무가 입을 맞춰왔다. 자연스레 물이 내 입안으로 넘어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뭔가 더 민망하고 부끄러워.'

나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워낙 목이 타서 그런지 내 입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왕무에게서 넘어오는 물을 받아 마시기 위해 왕무의 입술에 저도 모르게 더 밀착됐다.

잠시 입을 뗀 왕무는 다시 한번 그런 식으로 물을 먹여주었다.

'물그릇에 받아 마시면 되는데.'

나는 이 말을 하고 싶었는데 왕무가 계속 입을 맞추고 있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한참동안 입맞춤만 했으니까. 왕무 입장에서는 입맞춤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싶을 거야. 어찌 보면 내 잘못인가?'

그러면서 나는 계속 목이 말라서 왕무의 입술에 묻어있는 물방울도 마셨다.

'하긴 딱히 진도를 더 나간 것도 아니잖아. 매일 정치적 동맹의 의미로 입맞춤을 나눴으니까. 물이 좀 오간 거 말고 달라진 게 없어. 괜히 더 부끄러워 한 내가 이상한 거야. 또 시녀들이 물그릇을 안 닦아도 되고. 시녀들 부담도 줄여주고 좋을지도.'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따져보니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는데 내가 과민한 거 같았다. 그런 판단을 내리고 나는 왕무의 무릎 위에 앉아 계속 입을 맞췄다.

별 다를 게 없이 또 하루가 밝았다.

'어제 왕무에게 물을 받아마시기는 했지만 달라진 건 없어.'

그래도 어제 물을 충분히 마시고 잔 덕인지 아침이 되니 기운이 났다.

'공직이며 여러 대호족들도 내 미래지식으로 다 제압한다.'

갑자기 그런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나는 당당하게 한림원에 나갔다.

"일모산성 주변의 지도며 기록들을 찾아와라."

한림원에서는 왕건이 그런 명을 내렸다. 왕건은 술자리에서 빈말을 한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군사를 일으켜 일모산성을 칠 작정인 것이다. 나도 한림원 학사들을 도와 일모산성과 관련된 기록들을 찾기 위해 책을 뒤적였다. 다만 그 와중에도 한 가지 고민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공직마저 항복했으니 이제는 백제 수군의 기습이 얼마 안 남았다. 2달쯤 뒤에는 난리가 날 거야. 왕만세를 움직여 나름 대비를 하고 있는데, 백제 수군이 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군사를 움직일 지는 하나도 모르겠다. 수군은 대체 어떻게 배치해야 해? 그냥 왕만세만 믿어야 하나? 왕만세가 믿을 만한 사람이긴 한데.'

왕만세와 자주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그 성품을 알게 됐다. 의전을 위한 천우위 장군이니 전선관리를 널널하게 해도 아무도 뭐라 안 할텐데, 왕만세는 항상 일을 성실하게 했다. 괜히 나중에 고려 수군을 총괄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왕만세만 막연히 믿고 있는 것도 불안해. 무엇보다 왕만세는 백제 수군의 기습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어. 내 사람이니 그저 내 명을 받아 전선 관리는 열심히 하고 있지만. 이럴 때는 그냥 유금필에게 물어보면 시원한데.'

나는 곡도에 가 있는 유금필을 떠올렸다.

'한번 곡도에 가서 유금필을 만나볼까? 아니야 그건 안 돼.'

어찌 됐든 유금필은 유배를 가 있는 죄인이었다. 물론 사병들과 하인들도 다 끌고 갔고 수군을 키우고 있지만 직접 찾아가는 것은 위험했다.

'오히려 내가 섣불리 찾아가서 대호족들의 관심을 끌게 되면, 유금필이 수군을 키우는 것마저 트집을 잡힐 수 있다. 지금 내 주위의 정보는 새고 있다고 봐야 해. 그냥 왕건의 허락을 받은 서신으로 유금필과 연락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 오늘 나주원에 가서 서신을 써서 보내야지.'

나는 그런 궁리를 했다.

한림원 일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시간을 보낸 나는 나주원으로 달려갔다.

'유금필에게 편지를 쓸 때는 어떻게 수군을 배치해야 하는지 직접 물을 수가 없어. 곡도까지 오가는 사이 서신이 유출될 수도 있으니 선문답하듯이 질문을 던져야 해. 유출돼도 트집이 잡히지 않게. 어떻게 묻지?'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데 나주원에 도착하자마자 시녀 경란이가 나에게 와서 말했다.

"곡도의 유금필 장군께서 정윤비 마마께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잘 됐구나. 어서 주렴."

나는 황급히 서신을 받아 펼쳤다. 경란이는 눈치 빠르게 내가 서신을 받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요사이 더위 때문에 정윤비 마마의 걱정이 크실 것 같습니다. 저는 곡도에서 바람을 쐬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해륙풍이 부는데 그 바람을 맞으며 섬을 거닐면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심심할 때가 많아서 근래 집에서 나무줄기로 바구니를 짜며 시간을 보내는데 크고 작은 바구니가 벌써 50개 가까이 됩니다. 나중에 개경으로 돌아가면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됐다. 됐어."

나는 서신을 다 읽고 그것을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경란이를 불러 명을 내렸다.

"왕만세 장군을 오늘 꼭 만나야겠다. 왕만세 장군의 저택에 사람을 보내라!"

"해륙풍이야 뭐 간단합니다. 아침나절부터 낮에는 바다에서 땅으로 바람이 불고 밤에는 바람이 반대로 붑니다."

나주원에 달려온 왕만세는 내 질문을 받고 대답했다. 내가 아는 해륙풍과 똑같았다.

"수군을 움직일 때는 이 바람이 중요하겠지요?"

"그야 당연히 그렇습니다. 수군은 그냥 바람이 싸움을 다합니다."

왕만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유금필이 괜히 서신에 해륙풍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이 바람을 이용해 백제군과 싸우라고 알려준 거야. 해륙풍을 고려하면 백제군이 언제 개경을 공격할지도 알 수 있다. 백제군 입장에서는 바다에서 땅으로 바람이 불 때 개경을 치는 것이 유리하다. 그러면 정박하고 있는 고려 수군은 역풍을 받으며 나와 싸워야 하니. 즉 백제수군은 새벽에 개경 앞에 당도해 오전 중에 해전을 벌이려 할 것이다.'

여기까지 계산하자 대강 수군을 어찌 배치해야 할지도 가늠이 됐다.

'그리고 유금필이 거론한 바구니 50개는 곡도에서 전선 50척을 모았다는 거야. 천우위의 15척과 합치면 65척. 유금필이 올 때까지 버티면 된다. 진짜 전투가 얼마 안 남았다.'

나는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내 앞에서 왕만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제는 왕만세에게도 내가 유금필과 논의한 바를 다 알려줘야 해. 그래야 구체적으로 수군을 운용할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듣는 왕만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져 갔다.

며칠 뒤

"그럼 나는 일모산성에 다녀오마."

개경 교외에서 왕건은 마중 나온 나와 왕무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공직과 함께 일모산성을 치러 출진하는 것이다. 나와 왕무는 남기로 했다.

"조심하십시오."

왕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공직과 함께 가면 일모산성이 바로 떨어질 텐데 무슨 걱정을 하느냐. 하하하. 지금 분위기를 봐라. 고려군의 깃발을 보는 순간 성이 무너질 것이다. 이젠 거의 다 끝났지. 내가 10일 내로 돌아올 것이다. 그동안 여러 일은 시중과 의논해서 잘 처리해라."

왕건이 웃으면서 왕무에게 대답했다. 말 위에 훌쩍 오른 왕건은 나와 왕무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군사들과 함께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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