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 : 인생 >
시끄러운 격구단 문제를 대강 수습하고 나서도 나는 바빴다. 앞으로 닥칠 일을 막기 위해 이리 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이게 천우위의 전함들인가요? 예상 외로 큰 배들이 꽤 있습니다."
나는 왕만세를 돌아보며 물었다.
"당연히 의전을 할 때는 큰배로 해야 합니다. 작은 배로 하면 멋이 안 나니. 제가 관리도 잘 해놨습니다."
왕만세가 나름 자부심을 담아 대답했다. 벽란도 선착장 한쪽에는 천우위 소속 전함 15척이 정박해 있었다. 대선 7척에 소선 8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제 백제 수군의 기습도 몇 달 안 남았다.
'왕건이나 다른 사람들은 내 말을 들어주지도 않고, 결국 난리가 나면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함대는 이 15척이군. 이 천우위의 함대를 이용해 시간을 끌어야 해. 그래도 큰 배가 7척이나 돼서 다행이다. 그나저나 곡도에서 유금필은 전선을 얼마나 만들었을까?'
나는 유금필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 받고 있었다. 하지만 서신에 구체적인 내용은 쓰지 않았다. 기밀이 유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나 유금필이나 그저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애매한 내용만 적어서 서신을 교환했다.
'유금필에게 은을 꽤 보냈으니 상당한 숫자의 전함을 건조했겠지. 이리 돈 나갈 데가 많은데 격구단에 내가 상당한 돈을 썼어. 왜 그랬지?'
갑자기 격구단 선수들에게 지급한 은 장식이 떠올라서 나는 속이 쓰렸다. 그때는 너무 다급해서 판단력이 흐려진 것 같았다. 나는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만간 큰일이 날 수도 있으니 전선들에 더 신경을 써주십시오."
내 말을 들은 왕만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물었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정말 백제 수군이 개경을 칠 거라고 믿으십니까? 제가 그런 소문을 얼핏 들어서."
"백제수군이 조만간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그동안 내 노력으로 왕만세는 정윤파가 됐다. 개경 정계에서도 왕만세를 정윤파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왕만세에게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딴 사람들은 내가 백제 수군 이야기만 꺼내면 비웃고 정치적으로 공격을 하니. 말도 못 꺼내지.'
내 대답을 들은 왕만세는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저야 정윤 전하와 정윤비 마마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정윤비 마마의 명에 따르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믿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난 30년간 우리 고려 수군이 백제를 압도했습니다. 거기에 우리 수군이 벽란도를 지키면서 평시에도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백제 수군이 여기까지 온다는 것이……"
나는 왕만세의 그런 반응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버님도 내 말을 못 믿었는데 왕만세야 당연하지. 아버님과 거의 비슷한 반응이네.'
나는 싱긋 웃으면서 왕만세에게 말했다.
"백제 수군이 오지 않으면 더 좋은 일입니다. 어찌됐든 우리가 대비를 해놓는다 해서 나라에 손해는 아닙니다. 약간 고생스럽긴 하겠지만."
"그건 정윤비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명대로 전선을 철저히 관리해놓겠습니다. 원래 그게 제 임무입니다."
왕만세는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천우위 수군 시찰을 마친 나는 홀로 호위 병력들을 이끌고 발해 유민들의 정착촌을 방문했다. 왕건에겐 발해유민들을 돌봐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휴가를 냈다.
"발해유민. 그래. 나도 잊고 있었는데 연우 네가 진짜 정성을 쏟는구나. 그래야지. 내가 나중에 다 기억하마."
왕건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발해유민 시찰을 허락했다.
'발해유민들은 개경 옆의 백주에 많이 사는데 백제 수군이 기습할 때 이곳도 요격한다.'
기록을 보면 백제 수군이 개경에 와서 개경만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인근 고을도 휩쓸고 갔다. 백주도 서해에 닿아있는 고을이라 백제 수군의 표적이 됐다. 내 영향력이 미치는 발해유민들을 동원해 방비 태세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발해 정착촌들을 둘러보며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난번에 왕무 등과 함께 방문해서 내린 명령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수십 개의 우물이 완성되어 있었고 거대한 식량창고도 지어졌다. 그 안에 내가 보낸 식량이 조금씩 비축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발해 태자 대광현이 와도 얼추 감당이 가능하다.'
나는 발해정착촌의 지도자들을 칭찬하며 해안에도 보루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발해유민들에게 전함까지 건조하라고 하면 유민들의 부담이 너무 커. 그냥 백주 해안만 방어하게 해야지. 발해유민들은 거란과 싸우다가 망명한 사람들이라 전투력이 있어. 보루 정도만 짓고 해안 방어태세를 철저히 갖추면 백제 수군이 감히 상륙하지 못할 거야. 백제수군도 단시간에 최대한 피해를 입히고 철수해야 하니 저항이 센 곳은 피하게 돼 있어.'
나는 내 세력을 모두 동원해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해놓고 개경에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돌아오자마자 임희가 나주원에 달려와서 말했다.
"연우 네가 백주로 가있는 동안 개경에는 난리가 났다. 매곡성의 공직이 항복한다고 한다! 아들들을 데리고 직접 개경에 올라온다고 하는구나. 설마 이런 일이 터질 줄은."
나는 이미 아는 사실이었는데 임희는 진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급한 정보를 딸에게 알려주겠다고 바로 달려온 것이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도 임희에게 호응해줄 겸 나는 짐짓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연우 너는 놀라지 않는구나. 하긴 연우 너는 어려서 폐하와 공직 사이에 있었던 일을 잘 모를 것이다. 원래 공직은 폐주 궁예를 따르던 자였다. 그러다가 폐하께서 반란을 도모한 경종을 참수했지. 근데 그 경종이 공직의 처남이야. 그래서 공직이 처남의 죽음에 노해서 견훤에게 붙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야 별 수 있느냐? 기인으로 와 있던 공직의 아들은……어쨌든 그런 공직이 다시 항복해오다니."
임희가 음산한 표정으로 옛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는 미래에서 온 만큼 이걸 다 알고 있어. 다만 이 시대의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그런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을 넘어 체감하게 되는군.'
집에 앉아서 역사서에서 이걸 읽으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게 된다. 그런데 그 사실을 다 목격한 임희가 말해주니 새삼 이게 대단한 일이란 것을 느꼈다.
'왕건이 공직의 처남과 아들을 죽여 버렸는데 공직은 또 왕건에게 항복을 한다고 개경에 올라오고 있고.'
"그런 공직을 설득하다니 폐하께서 대단한 분이긴 합니다."
나는 한림원에서 편지를 열심히 쓰던 왕건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확실히 그렇다. 어쨌든 조만간 공직이 올라오니 구정에서 대대적으로 환영회를 열기로 했다. 정윤 전하와 너도 나가게 될 것이다. 고려 중신 모두가 환영하는 모양새를 취해야 공직이 안심할 테니. 허허허. 진짜 곧 삼한이 통일되겠구나. 공직마저 항복하면 이제 견훤의 본거지 완산도 타격할 수 있다. 허허허."
임희는 연신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아버님."
평소보다 임희가 감정을 더 드러내는 것 같았다. 나는 왠지 모르게 걱정이 돼서 임희의 손을 잡았다.
"내가 어렸을 때 이 나라가 갈라지고 사방에서 호걸들이 일어났다. 진짜 생전에 통일이 될까 걱정했는데 일통삼한의 대업이 진짜 이루어지는구나."
임희는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왕건이나 임희 세대 사람들에게는 통일이 임박했다는 것이 형언할 수 없는 감회를 주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 신라가 무너지고 전국이 분열된 것을 직접 목격했고, 결국 자신들의 힘으로 다시 통일을 이뤄가고 있었다.
'아직은 몇 년 더 걸리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이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그저 임희의 손만 꽉 잡았다.
"어쨌든 통일은 통일이고 앞으로는 진짜 시간이 없구나. 우선 공직을 맞이할 때 실수가 없어야 한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임희는 그런 당부를 남기고 나주원을 떠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구정에 전령이 달려와 외쳤다.
"매곡성주 공직이 아들들과 함께 개경에 들어왔습니다."
"드디어 왔구나."
그 보고를 받은 왕건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왕건과 함께 구정까지 나온 왕족이나 호족들은 일제히 환성을 질렀다.
"폐하 만세! 고려 만세!"
"이젠 다 끝났다! 진짜 거의 다 왔다!"
호족들의 반응을 보고 일이 잘 되어가는 것을 느낀 구정의 관중들도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마침내 공직이 아들들과 함께 구정으로 들어왔다.
'생각해 보면 공직도 진짜 때를 잘 맞춰서 왔다. 더 우물쭈물 하다가 항복을 못한 상태에서 왕건이 통일을 했어봐. 왕건이 매곡성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을 텐데.'
공직은 딱 적절한 때 항복해서 고려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들어오는 것이다.
"잘 왔다."
왕건은 직접 구정 한가운데까지 나아가 공직의 두 손을 잡았다. 나와 왕무는 왕건의 바로 뒤에서 그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공직은 황송한 듯 바로 구정의 흙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어허."
왕건은 놀라서 그런 공직을 일으켰다. 그리고 구정에 설치된 천막 쪽으로 공직을 이끌었다. 천막 안에는 술과 음식이 가득했다. 항복한 공직을 안심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연회를 바로 열기로 되어있었다.
왕건이 먼저 공직에게 술을 내렸다. 그 다음에는 나와 왕무가 공직의 아들들에게 술을 권했다.
"감사합니다."
공직과 아들들이 술을 받아 마시면서 장내의 분위기는 더 화기애애해졌다. 그런데 전령 하나가 달려와서 외쳤다.
"폐하. 완산의 급보입니다."
백제 수도인 완산에서 무슨 일이 터진 모양이었다. 이런 소식은 왕건에게 바로 알려야 하기 때문에 전령이 연회장까지 들어온 것이다.
"뭐냐?"
왕건이 전령을 손짓으로 부르며 물었다. 전령은 연회장 안에 들어와서 여러 사람들을 보고는 어물거리다가 서신을 왕건에게 바쳤다.
"음."
서신을 열어 본 왕건의 안색이 변했다. 연회장의 다른 사람들은 그런 왕건의 얼굴을 보고 웅성거렸다.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왕건은 서신을 다 읽고 소매 속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리고 연회를 재개하라고 손짓을 했다. 다만 이런 일이 생기니 연회장의 분위기가 살아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왕건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무슨 소식이기에 왕건이 그리 반응한 건지 궁금한 것이다.
그리고 한쪽에 앉아있던 공직이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완산에서 큰일이 터졌다면 반드시 소신과 관련된 일일 것입니다. 폐하께서 소신을 생각해서 차마 말씀을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허허. 그러나 미뤄봤자 무슨 소용입니까? 폐하! 시원하게 알려주십시오."
"매곡성주의 말이 옳다."
공직의 말을 들은 왕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신을 공직에게 건넸다. 공직은 서신을 읽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허허허. 제가 완산에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남겨두고 왔는데 견훤이 제 자식들의 다리 힘줄을 인두로 지진 모양입니다."
"……"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창백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못했다. 왜 왕건이 차마 말을 못하고 얼버무리려 한건 지 깨달은 것이다.
공직은 백제의 수도 완산에도 자기 자식들을 볼모로 보냈다. 공직은 그 자식들을 완산에 그냥 내버려두고 고려에 항복한 것이다.
"오늘 자리는 이쯤하고 끝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주. 무슨 말을 해야할지."
눈치를 보던 시중 김행선이 일어나 자리를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공직만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완산의 맏이에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미리 말해뒀습니다. 각오한 일입니다. 이 소식을 들으니 오히려 폐하께 경하를 드리고 싶습니다."
"경하라니? 그 무슨……"
공직의 말을 듣고 왕건은 진짜 놀란 기색이었다.
"견훤이 용서를 모르는 성품인데 제 자식들을 죽이지 않고, 다리 힘줄만 지진 것을 보면 확실히 예전 같지 않습니다. 많이 몰린 상황이니 소신과 아예 척을 지기 싫어 고문만 한 것입니다. 폐하께서 머지않아 삼한을 통일하실 것이니 그때 제 자식들을 구해주십시오."
공직은 그렇게 말하며 왕건에게 고개를 숙였다.
"매곡성주의 자제들을 구해야지. 암 그래야 하고 말고. 매곡성주는 확실히 호걸이군."
왕건은 공직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을 한잔 더 내렸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술을 한잔 들이켰다.
'이 시대에 삼한 땅 전체에 공직 같은 호족들이 수십 명은 될텐데. 이런 호족들을 휘어잡아 왕무의 왕권을 안정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그 생각을 하니 나는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