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 : 안장 >
나는 왕무와 함께 구정으로 향했다.
'왕건이 굳이 내 격구단의 경기를 보러 온다고 해서 이 고생이야. 그동안 일체 신경을 안 써서 좋았는데.'
나는 속으로 투덜댔다. 왕건이 나온다니 격구단의 주인인 나도 나와야 했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내 격구단이 계속 패해서 골머리를 앓았는데 요새는 잠잠하네. 신기한 일이야.'
그래서 나는 왕무에게 물었다.
"정윤 전하. 우리 격구단이 요즘 어떤가요? 제가 그동안 신경을 못 썼네요."
나는 일부러 '우리' 격구단이라고 지칭했다.
'왕무가 아니었으면 이 말 많은 격구단을 만들 일도 없었어. 책임을 같이 져야지.'
"……자주 패하지만 간혹 진짜 멋지게 이깁니다. 이전처럼 연이어 패하지는 않습니다."
내 질문에 왕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정말 잘 됐습니다."
왕무의 말을 듣고 나는 흐뭇해졌다.
'내가 원한 게 그거였어. 딱 구색만 맞추는 거. 임연객이 일을 잘하고 있구만.'
나는 왕무의 손을 잡고 구정의 누각에 올랐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구정에서 열리는 경기를 잘 볼 수 있게 높게 만든 누각이었다.
누각에 오르는 순간 나는 미묘한 이상함을 느꼈다. 그래서 왕무를 돌아보며 물었다.
"평소보다 더 시끄러운 것 같지 않나요? 왜 이리 소란스럽죠?"
"……아마 사람들이 오늘 경기에 기대를 많이 해서 함성을 평소보다 크게 지르는 것 같습니다."
왕무가 어물거리면서 대답했다.
"오늘 경기는……그러고 보니 누구랑 하는 거죠?"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격구에 관심이 없다보니 그것도 모르고 달려나왔다.
"황주 황보씨와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질 가능성이 높은데 사람들이 왜 기대를 하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자리로 향했다. 이미 격구단을 가진 대호족들은 거의 다 나와 있었다. 왕건이 직접 경기를 보러온다니 대호족들이 거의 온 것이다. 나와 왕무는 웃으면서 그들 모두와 인사를 나누었다.
다만 유긍달은 나오지 않았다. 유긍달 대신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유긍달의 사촌동생이 나와있었다.
"형님께서는 요 근래 몸이 편찮으셔서 쉬고 계십니다. 그래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신라가 여태 항복을 안 하니 유긍달도 민망해져서 이런데 못 나오는 거지. 한동안은 더 마음고생을 해야 할 걸.'
여러모로 기분이 좋아진 나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내가 앉자마자 왕건이 등장하는 바람에 나는 다시 일어나야 했다.
누각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일어나서 왕건에게 예를 갖추자 왕건이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바빠질 거 같아서 오늘 나왔다. 한동안은 못 볼 거 같아."
왕건의 말을 들은 여러 대호족들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왕건이 왜 바쁘다고 하는지 궁금하겠지. 당연히 매곡성의 대호족 공직이 조만간 항복해서 저런 소리를 하는 거야. 이걸 어떻게 이용해 볼 방법은 없을까?'
그러나 공직의 항복은 이미 알고 있어도 내가 써먹을 방법이 없었다.
'왕건이 혼자서 은밀히 추진하는 일이라 내가 알고 있다는 티를 내면 오히려 왕건이 나를 의심할 수도 있어. 공직 건은 그냥 흐르는 대로 내버려두고 나는 백제 수군의 기습에만 집중해야지. 이제 진짜 몇 달 안 남았다.'
내가 깊은 생각에 잠긴 사이 격구경기는 이미 시작됐다. 다만 나는 삼한의 정세에 대해 분석하느라 격구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아, 정말 대단하군."
그러다가 잠깐 정신을 차리니 왕건이 감탄성을 내뱉고 있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내 격구단이 상당히 선전하고 있었다.
나도 격구단을 운영하는 만큼 황주 황보씨의 실력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내 격구단이 황주 격구단을 상대로 동점이었다.
'그래 이 정도면 사람들 앞에서 내 체면은 지키겠군. 간만에 시간이 났으니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계획이나 더 가다듬어야지. 요즘 시간이 없어.'
한림원에 나가면 왕건의 잡담을 들어줘야 했다. 그리고 나주원에 돌아오면 왕무와 기본적으로 입맞춤을 해야 했다.
'예전에는 그러고 보니 남는 시간이 많아서 집에서 여러 계획을 정교하게 짠 거 같은데. 요새는 시간을 쪼개서 써야하니.'
나는 한숨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왕무와의 입맞춤을 생략하기는 어려웠다.
'하다가 갑자기 안 하면 이상하잖아. 우리를 노리는 외부의 세력들이 많아. 그런만큼 나와 왕무는 강력한 정치적 동맹을 맺어야 해. 그래. 동맹의 의미로 입을 맞추는 건데 왕무와 틈이 생기면 여러 대호족들을 막을 수 없어.'
나는 왕무를 힐끔 곁눈질했다. 왕무도 격구경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역시 격구단을 만들기를 잘 했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어느덧 격구경기도 전반전이 끝났다. 선수들과 말들이 쉬기 위해 물러났다.
그리고 누각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왕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하다. 저 정도 전력을 이끌고 황주 격구단과 대등하게 맞서다니."
"하하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전술이 통했습니다."
나는 의기양양해져서 웃는데 왕건이 고개를 저었다.
"연우 네가 대단하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네 격구단의 선수 하나가 정말 놀라운 실력이구나. 그래 이름이, 이름이 뭐지? 손 아무개 아니었나?"
나는 왕건의 말을 듣고 약간은 기분이 상했다.
'선수를 뽑는 것도 전술의 일환 아닌가? 내가 대단한 거 맞지.'
어쨌든 왕건이 나에게 그 선수의 이름을 물어서 나는 냉큼 대답했다.
"손긍훈의 손자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이름말이야. 이름."
왕건이 계속 꼬치꼬치 캐물어서 나는 좀 당황했다. 이름이 뭔지 나도 까먹었다.
"오라버……아니 병부경!"
나는 격구단 일을 맡은 임연객을 불렀다. 평소 같으면 임연객도 누각 위에 있었을 텐데 오늘은 왕건과 여러 대호족들이 다 나와 있었다. 그래서 자리가 없어서 임연객이 누각 안에 없었다.
"폐하, 손서당이라고 합니다."
곁에서 왕무가 한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나대신 대답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허. 손서당은 은혜를 갚겠다고 내가 건넨 좋은 제안도 뿌리치고 정윤비 마마의 격구단에 갔습니다. 그런데 정윤비 마마께서는 손서당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시니. 진짜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사람은 수십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기재입니다. 충분한 지원을 해줘야 합니다."
옆에서 황보제공이 격분해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손까지 떨면서 나에게 말했다.
'아니 황보제공이 왜 이래? 미쳤나?'
그동안 황보제공은 공식석상에서는 나에게 별 말을 못했다. 항상 뒤에서 암투를 벌였다.
그런데 오늘 황보제공이 이리 노골적으로 나오니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그래, 연우야. 이럴거면 차라리 손서당이 다른 곳에 갈 수 있게 놓아줘라.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안타깝구나. 더 엄청난 위업을 이룰 수도 있는 선수야. 격구 실력이 이 정도면 무장으로서도 쓸 만하겠지?"
왕건이 또 불쑥 끼어들었다.
"말을 잘 타니 무장으로서도 보통 이상의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격구 쪽으로 능력이 특화되어 있습니다."
평주의 박수경이 말했다. 박수경도 손서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박수경도 나를 향해 아쉽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더니 박수경이 나에게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 혹여 손서당의 장래를 생각하신다면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격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지원해줘야 뭐가 됩니다. 제가 전력을 기울이겠습니다. 대신 정윤비 마마의 격구단을 위해 좋은 말이며 마구들을 지원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어허. 내가 맨 처음 학관에서 손서당의 재능을 발견했소!"
그러자 황보제공이 발끈해서 두 소매를 걷어붙이며 박수경을 노려보았다.
"제가 요 근래 바빠서 격구단에 신경을 못 썼습니다. 자세히 알아보고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그렇게 말해서 장내를 수습했다. 여러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는 기색이라 좀 억울했다.
'아니 내가 손서당을 강제로 내 격구단에 끌어온 게 아니잖아. 그 사람이 스스로 온 거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손서당을 놓아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황보제공과 박수경이 저리 설치는 걸 보니 진짜 엄청난 선수인거 같아. 확실히 그 선수가 있으면 큰돈을 안 쓰고 구색을 맞출 수 있겠어. 그래 내가 손긍훈의 일족을 구해줬는데 당연히 은혜를 갚아야지. 어쨌든 나중에 두고 보자.'
나는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한 왕건과 황보제공 등을 흘겨봤다.
잠시 손서당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격구경기가 재개되었다. 그러자 누각 위의 사람들은 다시 넋을 잃고 경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저런 말과 격구채로 저 정도 기량이라니. 허허허."
왕건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경기는 결국 무승부로 끝났다. 나는 여러모로 불쾌한 기분으로 누각에서 내려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어디 있어?"
나는 황급히 임연객을 찾았다. 어쨌든 격구단과 관련해서 대책은 세워야 할 것 같았다. 내 부름을 받고 임연객이 달려왔다.
나와 왕무, 임연객은 같은 수레에 올랐다. 수레 안에서 일을 논의해 볼 작정이었다.
'나주원에서는 왕무 때문에 시간이 없으니.'
그래서 수레에 올랐는데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우우우
요상하게 수레 주위가 시끄러웠다.
"이거 대체 왜 저래?"
내가 수레 밖을 내다보려하는데 임연객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연우 네가 간만에 구정에 모습을 드러내니 벼르고 있던 관중들이 너를 야유하는 거야."
"병부경!"
왕무가 놀라서 임연객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임연객의 말을 알아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수레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과연 나를 비판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말안장 어쩌구저쩌구 하는데 무슨 소리야?"
나는 내 손으로 임연객의 입을 막고 있는 왕무의 손을 내리며 물었다.
"연우 네가 돈을 넉넉히 안 줘서 우리 격구단은 말안장에 장식을 하나도 못 달고 나오니. 사람들이 원망하는 거야."
"아니 그동안은 왜 조용했어? 갑자기 왜 이래?"
"그야 손서당이 왔으니 그렇지. 나오기 힘든 대선수를 기용해 놓고 대접이 너무 박하다 이거야."
"아니 그깟 일로 정윤비를 모독해! 당장 군사들을 동원해야 해! 체포해야 정신을 차리지. 이런 철부지들. 지금 대업이 중요한 시기에."
나는 격분해서 외쳤다.
"국선. 진정하세요."
그러자 왕무가 내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왕무의 목소리를 듣자 나는 약간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누각에 오르자마자 시끄러워진 것도 관중들의 야유 때문인데. 왕무는 내가 그걸 모르게 하려고.'
왕무의 마음씀씀이가 느껴졌다.
"그럼 손서당에게 말안장 장식을 달아줘. 은이면 되나?"
나는 겨우 화를 가라앉히고 임연객에게 말했다.
"다른 선수들은?"
"아니 그러면 은이 엄청 드는데 손서당만 달면 되지."
"그러면 손서당이 안 받으려 할 걸. 동료들이 다 함께 받아야 한다고. 아니 연우 네가 은광도 가지고 있고 은 제련도 하는데 이것도 안 쓰는 건 너무 한 거지."
임연객의 말을 들은 나는 또 격분했다. 격구단 하나 만들었다고 신경 쓸 일이 이리 많은 것이다.
"그럼 겉에 은을 바른 철 장식을 내줘! 겉으로 보면 은이니 잠잠해지겠지."
내가 호통을 쳤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임연객이 고분고분 내 말을 안 듣고 버텼다. 나는 다시 호통을 치려고 하는데 내 곁에서 왕무가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국선!"
"은제련소에서 은을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 오늘 내로 처리해줘. 사람들이 좀 잠잠해지게."
나는 임연객에게 말했다.
"알았어. 그럼 나는 제련소에 바로 가야겠다."
임연객은 반색을 하며 수레에서 내렸다.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멀어지는 임연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가 은을 안 내주면 임연객이 나주원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안 그래도 시간을 쪼개써야 하는데 임연객 때문에 시간 낭비를 하면 안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