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20화 (120/216)

< 120 : 계명 >

'어쩌지?'

나는 내 눈가에 왕무의 숨결을 느끼며 고민했다. 왕무는 내 눈가에 입술만 가져다 대고 가만히 있었다.

'그동안 왕무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나도 남자였으니까 왕무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잖아!'

왕무의 품속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와 왕무 사이의 이상한 관계를 너무 오래 끌고 갔다.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러나 나는 뭔가를 택할 엄두가 안 났다.

'함규같은 유력한 호족의 딸을 다른 부인으로 맞이할 수 있게 내가 나서든 아니면 차라리 내가……'

그러나 그런 상상을 하자마자 나는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그 어떤 길도 택할 수 없었다.

'그냥 지금처럼 왕무가 참으면서 나만 바라봤으면 좋겠어. 진짜 나는 나쁜 인간이야. 이 답도 없는 상태를 지속하려고 이러다니. 그런데 그게 나한테는 제일 좋은데.'

계속 그런 이기적인 욕구가 솟아올랐다. 그런 내가 한심해서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러나 왕무의 입술이 내 눈가에 머물고 있어서 눈물이 흘러내리지는 않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 입맞춤만……"

입맞춤이라면 고창 전투 무렵에도 했었다. 다만 그 이후에는 한 적이 없긴 했다. 그러나 이미 한번 했던 입맞춤을 허락하는 것이 겁많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거라도 하면 왕무를 계속 붙들어둘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분명 남자끼리도 키스를 하는 관습이 있어. 인터넷을 이용할 수 없어서 확인을 할 수는 없지만. 무슨 정치지도자들끼리 그랬던 것 같은데. 그래 나도 왕무와 정치적으로 함께 가는 사이니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우리는 정치적 동맹을 맺은 거나 다름없으니.'

그리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왕무의 입술이 움직였다. 먼저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마침내 내 입술에 왕무의 입술이 닿았다.

'청량한 느낌이 든다. 술을 딱 한 잔만 해서 그런지.'

그사이 왕무의 손도 내 허리춤을 더듬고 있었다.

'입맞춤만 해야 하는데……하긴 생각해보니 부석사에서 탈출할 때 말을 같이 탈 때는 이런 거 신경 안 썼잖아. 그냥 이상한 생각만 안 하면 돼.'

하지만 나는 상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어느 순간 왕무의 혀가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여기까지는 괜찮겠지. 에라 모르겠다.'

왕무의 혀가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도 왕무를 끌어안고 입 안의 혀를 느꼈다.

그렇게 부둥켜안고 있는데 갑자기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개경의 민가에서도 닭을 키우고 궁에서도 닭을 키웠다. 나는 닭 울음소리에 놀라서 곁눈질로 창밖을 살폈다.

진짜 새벽이었다.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 오늘 왕무가 좀 늦게 들어오긴 했어도 밤에 술자리를 시작했는데.'

술도 별로 안 먹고 서로 껴안고 입맞춤을 했다. 그런데 시간이 이리 빨리 지났다니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슬쩍 고개를 뒤로 빼서 왕무의 입술을 내 입에서 떼려고 했다. 그런데 왕무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계속 왕무의 입술이 따라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으로 왕무를 밀어냈다. 그러니 왕무가 주춤했다. 그 틈에 내가 말했다.

"정윤 전하. 벌써 새벽입니다. 잠을 좀 자야 일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왕무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선을 위해서는……맞습니다. 그래야죠."

왕무의 얼굴은 입맞춤 때문인지 아직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가슴이 뛰어서 고개를 숙였다. 상기된 왕무의 얼굴이 더 잘생겨보였다.

나는 왕무의 그런 얼굴을 계속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내 침상에 가서 누웠다. 왕무 역시 자신의 침상에 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겨우 눈을 감았다.

"아니 내가 개경을 잠시 떠난다니 너무 좋아서 밤이라도 샜니? 왜 이래?"

한림원에서 왕건이 나를 바라보며 그런 농담을 던졌다. 꾸벅꾸벅 졸던 나는 놀라서 왕건의 얼굴을 살폈다.

잠이 부족한 나는 한림원에서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왕건이 귀신같이 그걸 눈치채고 저러는 것이다.

왕건의 웃는 얼굴을 보니 농담으로 그런 소리를 한 것 같지만 내 입장에서는 섬뜩했다.

'왕건 입에서 농담이라도 저런 말이 나오는 게 나와 왕무에게 좋지 않아.'

왕무에 대해 생각하니 내 가슴은 다시 끓어올랐다. 원래 역사를 바꿔서 왕무를 구할 작정이었지만, 입맞춤 이후로는 감정의 동요가 더 심해졌다. 역사에서 즉위 후 2년만에 죽는 왕무에 대해 떠올리면 진짜 고통스러웠다.

'왕무와 나는 진짜 한몸이나 다름없는 정치적 동맹자니까.'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왕건의 비위를 맞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 제가 기쁜 소식을 들어서 잠을 못 잤습니다."

나는 왕건에게 말했다.

"내가 서경으로 간다는 소식?"

왕건이 여전히 농담을 던지는데 나는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격구단과 관련해서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른 격구단이 눈치채면 안 돼서 비밀이긴 한데……"

나는 일부러 왕건이 좋아하는 격구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오, 비밀이라고? 나한테만 말해보렴."

왕건이 과연 솔깃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쪽에 혹여 정보가 들어갈까봐……"

내가 일부러 망설이는 표정을 짓자 왕건이 나를 독촉했다.

"빨리 말해봐라. 내가 딴 데 가서 그걸 말하겠니?"

그러자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손긍훈의 손자가 엄청난 격구 고수인데 지난날 인연으로 우리 쪽에 오게 됐습니다. 손긍훈의 손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술로 격구단을 앞으로 운영할 작정입니다."

나는 엄청난 비밀을 이야기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손긍훈의 손자 이름도 나는 까먹었다. 임연객이 분명 얘기해 준거 같은데. 아니 임연객도 그냥 손긍훈의 손자라고만 했나?'

나는 격구에 별 관심도 없었지만 왕건의 관심을 끌려고 넌지시 이 정보를 던져줬다. 그리고 확실히 왕건은 엄청난 정보를 얻었다는 표정이었다.

"과연 그것도 한 방법이지. 어렴풋이 격구 천재가 등장했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손긍훈의 손자면 연우 너한테 보답을 하긴 해야지. 그래 내가 서경에 다녀온 뒤 연우 네 격구단이 경기를 할 때 한번 봐야겠다. 어느 정도 실력자인지 봐야지. 서경에 빨리 다녀와야겠어. 그래 이 비밀은 내가 지켜주마."

왕건이 턱을 쓰다듬으며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왕건의 말을 들은 나는 입맛이 썼다.

'괜히 그 얘기를 꺼냈나? 서경에 오래 있다 오지 빨리 돌아온다고 하네.'

어쨌든 왕건은 자기 말대로 서경으로 행차했다. 나와 왕무는 군사들과 함께 개경 교외까지 나가 그런 왕건을 전송했다.

"정윤은 시중 김행선의 도움을 받아 정무를 살펴라. 허허허. 군사를 움직여야하거나 큰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에게 알려라."

왕건은 그런 당부를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왕무가 개경에서 정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만만치가 않았다.

'고려군도 호족 사병의 연합군 형태지만 관료 조직도 마찬가지다.'

지금 고려 조정은 대호족들이 중요한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차지한 관청의 관직에 자기 심복들을 배치시켜놨다.

관료 조직에도 대호족들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이러니 실제 역사에서 아무 힘도 없이 즉위한 왕무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해.'

나만 이렇게 긴장한 것이 아니었다. 임희는 간만에 딸을 보고 싶다는 명목으로 나주원에 와서 나를 만났다.

"폐하의 눈치를 보느라 대호족들이 노골적으로 맞서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은근히 정윤 전하의 실수를 기다리고 있다. 절대 트집을 잡히면 안 된다. 연우 너도 각별히 정윤 전하께 신경을 쓰도록 해라. 정윤 전하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야 한다. 다른 중신, 장군들의 뜻도 나와 같다."

나를 보자마자 임희가 나에게 당부했다. 표정이 심각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그래. 연우 너만 믿는다."

임희가 말했다.

"그래도 병부는 오라버니도 있고 아버님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서 다행입니다."

임희는 일찍이 병부령을 역임했고 오라버니인 임연객도 병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임희도 당연히 다른 호족들처럼 자기 심복들을 병부에 배치시켜 놨다.

"그나마 정윤 전하께 다행스러운 일이지."

임희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룡성도 병부 영향력 아래 있죠?"

임연객이 격구단에 쓸 말을 구할 때도, 섬 목장의 비룡성 관리와 친해보였다. 병부 관리로서 비룡성 쪽과 평소에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군마의 공급은 어느 정도 병부와 관련이 있다. 아예 병부 산하 관청은 아니지만 내가 영향력을 끼칠 수는 있지. 병장기나 군량 관련 일도 그렇고."

관료 생활을 오래한 임희가 귀한 조언을 건네주었다. 임희는 그 이후로도 계속 왕무에게 신경을 쓰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 나주원을 떠났다.

'내 걱정은 하지도 않고.'

나는 약간의 서운함을 느끼며 멀어지는 임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임희와 실컷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도 시간이 남았다. 왕건이 없으니 나는 한림원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하루종일 나주원에 있을 수 있었다.

'아버님 말대로 왕무에게 좀 신경을 써야하는데. 내가 할 게 없네.'

당연히 왕무의 식사나 의복 같은 것은 나주원의 시녀들이 다 담당했다. 그러다가 문득 내 뇌리에 입맞춤을 했던 밤이 떠올랐다.

'그건 나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이긴 하네.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 나는 왕무가 정무를 보는 것을 도와야지. 왕무가 정무를 보는 동안 소소한 성과라도 거둘 수 있게 정교하게 계획을 짜야 해.'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한림원에서 빌려온 지도들을 보며 열심히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구상을 종이에 옮겨 적었다.

'왕무가 중신들 앞에서 이 계획을 발표하는 거지. 당장에야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백제 수군의 기습 이후에는 왕무의 선견지명에 사람들이 깜짝 놀랄걸.'

나는 그런 상상을 하며 열심히 붓을 놀렸다.

그날 밤 왕무는 약간 지친 기색으로 나주원에 들어섰다.

'피곤해 보이는데 나주원에서도 일 얘기를 꺼내는 건 좀 그런가? 왕무가 정무를 보는 것에 좀 적응을 한 뒤 말할까? 아니야 왕건은 한달쯤 뒤에는 돌아올거야. 시간이 촉박해.'

나는 처소에서 슬며시 눈치를 보다가 준비한 종이뭉치를 꺼내며 왕무에게 말했다.

"전하, 전하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왕무가 관심을 보이자 나는 신이 나서 내가 작성해놓은 보고서를 펼쳤다.

"백제 수군이 기습하면 개경 인근 섬 목장들이 고립됩니다. 그러면 이곳에 배치된 비룡성 관리들과 목동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각 섬에 유사시 몸을 피할 땅굴을 만들어 놓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백제 수군이 섬 목장에 상륙해서 말들을 약탈해 간다 쳐도 시간이 촉박해서 섬 곳곳을 수색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룡성 관리들이 땅굴에 몸을 피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꼭 백제 수군의 기습이 아니라도 태풍같은 것이 올 때도 유용하게 쓸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태풍 대비라고 말해놓고 이런 준비를 하면 됩니다. 제가 지도를 보고 각 섬에 땅굴을 팔만한 곳을 추려보았습니다."

나는 지도의 이곳저곳을 짚으면서 말했다.

"괜찮은 계책입니다. 어전에서 사람들과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비룡성은 그래도 내 말을 잘 듣는 곳입니다."

왕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곁으로 와서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저, 전하."

왕무의 품에 안긴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왕무는 내 목소리를 듣고 웃으면서 당연하다는 듯 내 귀 쪽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아무래도 왕무는 그때 내가 입맞춤을 허락했으니, 앞으로도 계속 거기까지는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나는 또 고민에 잠겼다.

'그런데 그때 한번만 입맞춤을 허락한 거라고 주장하는 게 억지 같기도 하고. 그리고 아버님도……'

나는 처음 정무를 맡게 된 왕무를 잘 보살피라고 당부하던 임희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선 왕건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왕무의 뜻대로 해야지. 왕무가 심란해 하면 안 되니까.'

그 사이 왕무는 다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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