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 믿음 >
나는 간만에 부모님도 뵙고 최치원도 만날 겸 상산저에 들렀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고 임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연우 네가 백제 수군이 개경을 기습할 거라고 폐하께 말씀드렸다는 소문이 돌더구나."
"예. 그렇습니다."
나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한림원에는 대호족들에게 포섭된 학사들이 많았다. 내 말이 새어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도 이 일이 알려질 것을 각오하고 한림원에서 입을 연 것이다.
'다만 소문까지 퍼지다니 좀 이상하군.'
내가 약간 의아해하는데 임희가 입을 열었다.
"지금 연우 너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매우 많다. 근거가 희박한 예견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연우 너의 정세파악능력에 사람들이 의심을 할 수 있어. 지금 누군가가 너를 흔들기 위해 그 소문을 퍼뜨리는 것 같다."
여러 대호족들의 여론조작 능력에 대해선 나도 경험한 바 있었다. 그 사람들이 이번 사안을 좋은 기회라 여기고 소문을 내는 모양이다.
"아버님께서도 백제 수군이 개경에 오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제 예측이 정확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나는 대호족들이 나를 노리는 것보다 임희의 반응이 더 신경 쓰였다. 그래서 약간은 서운한 기색으로 임희에게 물었다.
'발해멸망이며 공산 전투까지 내 예상대로 됐는데. 그걸 지켜 본 아버님마저 이러시다니.'
약간은 억울한 심정이었다.
"그야. 뭐. 연우 너의 통찰력이야 내가 잘 알고 있지만, 이번 일은 납득하기 어렵구나. 지난 30년간 우리 고려 수군은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 백제 바다에서 벌인 해전도 다 이겼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 수군만은 성과를 냈어. 내가 병부령을 지내봐서 잘 안다. 그런데 고창 전투 이후 쇠약해진 백제 수군이 개경까지 온다는 것이……허허허."
임희가 난감한 듯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
'30년이란 세월이 참 긴 거구나. 물론 미래에서 온 내 입장에선 별 거 아니지만 이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 입장에선 반평생이 넘는 기간이야. 그 긴 세월동안 패배를 몰랐던 고려 수군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렵겠지.'
임희마저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이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유금필이 왜 내 앞에서만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건지도 이해했다.
'참 내 말 믿어주는 사람을 찾기가 이리 어렵네.'
나는 약간은 서글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지금 연우 너의 명성에 정윤 전하를 보위하는 사람들이 의지하는 바가 크다. 그동안은 네 예측이 거의 들어맞았으니. 그런만큼 그 명성을 지켜야만 한다. 앞으로는 정세 예측 같은 것을 신중히 하렴. 이번 소문이야 그동안 네가 쌓아놓은 것이 있으니 큰 타격을 못 줄거다."
임희가 따뜻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으며 충고를 건넸다.
"예."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사람들이 아무도 내 말을 안 믿어줘서 한동안 나는 몸을 사리며 움직였다.
'아직은 시간이 좀 남아있다. 그 사이에 나 혼자서라도 백제 수군에 대비해야지. 그러나 지금 당장 그러면 너무 티가 난다. 우선 소문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한림원에도 나가고 해야 할 일도 하는데 약간은 울적했다. 거기다가 격구단 일도 계속 안 풀렸다.
'내 격구단이 계속 지네.'
이제는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보고 그 일을 농담거리로 삼아서 지긋지긋했다.
'이걸 해체시킬 수도 없고. 결국 돈을 조금 더 부어야 하나?'
나는 절대 돈을 더 안 쓸 각오였는데 상황상 내가 더 버틸 수가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임연객을 나주원으로 불렀다. 돈을 얼마나 더 부어야 하는지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임연객은 밝은 얼굴로 나주원에 들어와서 외쳤다.
"기뻐해라. 연우야. 내가 한건 해냈다. 너한테 빨리 알려주려고 했는데 마침 네가 날 부르네."
"무슨 일인데?"
"뛰어난 선수를 하나 영입했다. 진짜 하늘이 도왔다."
임연객이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한명 가지고 뭐가 바뀌겠어?"
내가 약간 의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황주 황보씨나 평주 박씨도 끌어들이려고 했던 사람인데 우리 쪽에 왔어. 실력은 진짜 뛰어나."
임연객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럼 우리 쪽에 올 이유가 없는데? 격구로 대호족들 눈에 들면 출세할 수도 있는데 우리 쪽에 왔다고?"
나는 계속 뭔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임연객이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 친구가 손긍훈의 손자야. 우리 고려가 응천군을 수복해서 손긍훈에게 돌려줬지. 손긍훈이 응천군으로 돌아가면서 기인으로 자기 손자 손서당을 남겨두고 갔는데. 그 친구가 진짜 대단한 실력자야."
그말을 듣자마자 나는 임연객에게 호통을 쳤다.
"손긍훈의 손자면 나와 정윤 전하를 보고 온 거네. 우리가 손씨 일족을 구해줬으니. 아니 그럼 오라버니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무슨! 나 덕분에 영입이 된 거 아니야?"
"내가 손서당의 실력을 알아보고 신속하게 접촉을 해서 데려온 거야. 연우 너처럼 방관만 했으면 아무리 은혜를 베풀었어도 못 데려와."
"어허 끝까지!"
자기 공이라고 우겨대는 임연객을 보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동안 이것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지친 임연객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날 왜 불렀어?"
그 말을 들은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손긍훈의 손자가 그리 격구를 잘 해?"
"그렇지. 내가 인재를 보는 눈은 뛰어나."
임연객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러면 굳이 내가 돈을 더 안 부어도 되지 않을까? 우선 괜히 돈 낭비 하지 말고 좀 기다리자. 그 손 아무개의 힘으로 가끔씩 이길 수도 있잖아. 정 안 되면 그때 돈을 좀 써야지.'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말했다.
"그냥 격구단이 너무 자주 패해서 걱정돼서 불렀어. 그런데 내 덕에 손긍훈의 손자가 와서 다행이네."
"그건 내 덕이지!"
임연객은 끝까지 억지를 썼다.
"그래, 그래 알았어. 자 어쨌든 새로운 선수도 왔으니 잔치라도 열어."
나는 작은 은조각들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임연객에게 건넸다. 원래는 상당한 돈을 투자할 생각이었는데 그냥 이 정도로 때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고. 뭘 이런 걸. 그래 선수들에게 술과 고기를 좀 먹여야겠다."
임연객이 반색을 하며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대강 격구단 일을 해결한 다음날 나는 한림원에 들어섰다. 그런데 한림원에 들어서자마자 반가운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아무래도 서경에 한번 가봐야겠다. 이제 사실상 삼한은 평정됐고 북방을 살필 때다. 당장은 내가 개경에서 할 일이 없기도 하고. 이미 어전에서 여러 중신들에게 이야기를 해뒀다. 학사들 중에서도 나를 따라 서경에 잠시 가있을 사람을 뽑아야 한다."
왕건이 말했다. 삼한이 평정됐다는 말은 오판이지만 어쨌든 왕건이 서경에 간다니 다행이었다. 진짜 개경에 왕건이 있어봤자 격구 얘기 외에 하는 일이 없었다. 결국 내가 들볶인다는 소리였다.
내가 웃음을 참으며 한쪽에 조용히 있는데 왕건이 나를 불렀다.
"연우야. 이리 와보렴."
나는 살짝 불안해졌다.
'설마 나도 서경에 데려가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데 왕건은 나를 보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서경에 가있는 동안 정윤에게 개경을 지키고 있으라고 명을 내렸다. 정무도 아예 정윤에게 맡길 것이다. 어전에서 이미 정윤에게 내뜻을 전했다. 군사를 움직이는 것 외에 나머지는 정윤의 뜻대로 처리하라고 했다. 그러니 연우 너도 정윤을 도와 개경을 잘 지키고 있거라."
왕건이 그런 당부를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 기뻐서 펄쩍 뛸 뻔했다. 왕건을 대신해 잠시나마 개경에서 정무를 보는 것이 왕무의 입지에 상당히 도움이 됐다. 거기다가 한동안 왕건의 얼굴도 안 볼 수 있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정윤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약속을 꼭 지키는 사람이라니까. 구산사에서 내가 말했잖니."
왕건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구산사에서 왕건은 나에게 통일이 되면 왕무를 밀어줄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왕건은 그때 약속을 지키는 거라고 나에게 생색을 내는 것이다.
'아니 정무를 맡기는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질적 세력이나 군사력을 내주는 것도 아닌데 이리 생색을.'
나는 잠시 아니꼬워졌지만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예 폐하. 감사합니다."
나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왕건의 비위를 맞췄다.
그날 후다닥 나주원에 돌아온 나는 시녀들에게 명을 내렸다.
"너희들은 술상을 준비해라. 정윤 전하께 오늘 기쁜 일이 있으니 축하를 드려야겠다."
물론 내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왕무가 곧 개경의 정무를 관장하게 된다. 즉 내가 왕무만 조종하면 곧 있을 백제 수군의 기습에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다는 거지.'
왕건이 군사에 관한 일은 자기 허락을 맡으라고 했다. 그래서 아쉽게도 수군을 직접 움직일 수는 없지만 다른 관청들에게는 명을 내릴 수 있었다.
'몇 가지 나에게 떠오르는 것이 있어. 내 구상을 실현하려면 왕무를 잘 달래놔야지.'
왕무는 대개 내 말을 잘 들었지만 군사에 관한 일 같은 건 자기 뜻대로 했다.
'이번에도 설마 고창 전투 때처럼 그러면 어쩌지?'
문득 고창 전투 때 내 손을 떼어냈던 왕무의 얼굴이 떠올라 나는 오싹해졌다.
'우선 술을 먹여놓고 왕무를 잘 다독여서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해야 해.'
그런 계산 하에 나는 시녀들을 독려해 처소에 술상을 차렸다.
처소에 들어선 왕무는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국선. 왜 갑자기 술상을?"
"정윤 전하께서 개경의 정무를 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일을 축하드리기 위해 술상을 마련했습니다."
나는 두손을 모아 예를 갖추며 왕무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국선."
왕무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자 한잔 드십시오."
나는 왕무에게 술을 권했다. 좀 적당히 취하게 한 뒤 내 뜻대로 일을 진행시킬 작정이었다.
"국선도 드세요."
왕무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개경의 정무를 보는 것이 확실히 작은 일은 아니야. 왕무도 간만에 웃네.'
나도 참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왕건 앞에서는 실질적 세력을 안 내주고 생색만 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왕무가 좋아하는 걸 보니 큰 걸 받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왕무에게 술을 한잔 먹이고 나서 나는 은근히 운을 띄웠다.
"제가 얼마 전에 백제 수군이 개경에 올 거라고 폐하께 말을 꺼낸 적이 있습니다. 유금필 장군 말을 듣고 그런 건데……사실 저도 확신하는 것은 아니고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백제 수군의 기습을 확신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말을 그렇게 했다.
'아버님도 내 말을 믿지 않을 정도니. 이 시대 고려 사람들은 다 황당한 소리라고 여기는 것 같아. 백제 수군이 기습할 거라고 확정적으로 말하는 화법은 안 좋아. 혹시 모르니 대비를 해놓으면 좋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야겠어.'
그런데 왕무는 군사 이야기가 나오자 약간 심각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국선의 예측은 그동안 여러 번 적중했습니다. 그리고 고창 전투 때도 유금필 장군의 말이 얼핏 들으면 황당해 보였지만 들어맞았습니다. 나는 백제 수군을 걱정하는 국선의 마음도 이해가 갑니다."
"그렇죠!"
왕무의 말을 듣자 나는 기뻐서 저도 모르게 외쳤다. 왕무는 내가 하는 걱정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그동안의 울적함이 다 날아갔다.
그런데 왕무는 놀란 기색이었다.
"국선. 눈에 눈물이……"
"이건 감격해서 그런 거예요."
나는 찔끔 나온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그 순간 왕무는 나를 확 끌어당겼다. 그리고 왕무의 입술이 내 눈가에 닿았다.
'헉 어쩌지? 내 실책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밤에 처소에 술상을 차려놓고 왕무를 기다렸다. 왕무가 뭔가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왕무를 잘 달래서 내 뜻대로 조종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이런 쪽은 미처 신경쓰지 못했다.
내 눈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 왕무가 나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그 힘이 무지막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