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18화 (118/216)

< 118 : 정치 >

'격구단은 진짜 괜히 만들었다!'

한림원에 들어서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온갖 감언이설로 나를 꼬드긴 임연객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내가 이를 갈면서 자리에 앉는데 왕건이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연우야! 네 격구단이 또 졌다. 충주 격구단과 무승부를 한 이후 7연패 째구나."

"예. 폐하."

나는 말을 길게 하고 싶지 않아서 짧게 답했다. 그런데 왕건은 계속 격구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요 근래는 정치적으로 큰일이 없었다. 백제는 오직 수비만 하고 있었고, 신라는 항복한다고 해놓고 얼굴에 철판을 깔고 버티고 있었다. 고려도 왕건이 당장 군사를 일으킬 마음이 없었다.

나름 평온한 시기였다. 그래서 왕건은 한림원에 나와서 일도 안 하고 있었다. 한동안은 호족들에게 서신을 열심히 쓰더니 요새는 그것도 안 하고 있었다. 왕건의 서신을 받은 호족들이 답장을 보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호족들 입장에서는 왕건에게 받은 편지를 신중하게 분석하고 답장을 보내야 했다. 당연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할 일이 없는 왕건은 한림원에 나와서 하루종일 나를 보며 격구 얘기만 했다.

"아니. 그러니 내 말을 믿었어야지! 덩치 큰 말들을 사고 힘 좋은 선수들을 뽑았어야 해. 그렇게 힘으로 밀어붙이면 상대가 다칠까봐 겁먹어서 몸을 사린다. 그럼 실력이 없어도 꽤 그럴듯한 성과가 나온단 말이야. 애매한 돈을 투자해놓고 무슨 정교한 전술을 쓰겠다고 하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야. 병부경 임연객 말고 나를 믿었어야지! 에잇 겉멋만 들어가지고."

왕건이 나를 붙들고 열변을 토했다.

"하하하."

나는 대답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웃었다.

'나는 내 격구단이 이기든 지든 상관없어. 7연패 한 것도 왕건 때문에 억지로 알게 됐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격구단 얘기를 해서 괴로웠다.

왕건만 이러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마다 그랬다. 가끔씩 만나는 왕만세도 진지하게 격구단 이야기를 하며 나를 걱정해줬다.

"그러니 어느 정도 돈을 더 써야해. 그래야 뭐가 된다."

왕건이 웃는 나를 보며 그런 조언을 건넸다. 결국 임연객과 같은 결론이었다. 왕건의 그런 말을 들으니 나는 돈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이것도 왕씨 외의 다른 대호족들이 돈을 많이 쓰게 만들기 위한 계책이 아닐까?'

엄밀히 말하면 나도 정윤비로 왕족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왕족은 격구단을 소유하면 안 된다고 하더니 내가 격구단을 갖는 것은 허락해준 게 왕건이었다. 결국 왕씨들만 격구단이 없었다.

'격구단을 만드는데 돈이 많이 들고 또 이런 식으로 여론 몰이를 하면 체면 때문에 대호족들이 돈을 더 써야 하잖아.'

나는 싱글벙글 웃는 왕건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좀 여유가 생기면 그러겠습니다. 요 근래는 발해 유민들을 보살피느라 돈이 없습니다."

나는 은근슬쩍 발해유민 쪽으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

"그래 유민들을 돌보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발해 사람들도 격구를 잘 하겠지? 그쪽 사람들도 말을 잘 타니."

왕건은 집요하게 격구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바람에 나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림원에서 일은 안 하고 왕건과 잡담만 나누었는데 엄청 피곤했다. 나주원에 돌아온 나는 내 거처에 돌아와 침상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시녀 경란이에게 물었다.

"정윤 전하께서는?"

나는 우선 왕무의 행방을 물었다.

"일찍 군영에 나가셔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

부지런한 왕무는 평온한 시기에도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곡도에 보냈던 하인이 유금필 장군님의 서신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아 서신이 올 때가 됐구나."

나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키며 손을 내밀었다. 경란이가 유금필의 서신을 나에게 바쳤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그대로 내 방을 나섰다. 나는 주변을 다시 한번 살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서신을 열었다.

-제가 유배를 온 지도 꽤 시일이 지났습니다. 유배가 결정된 직후에는 제가 함부로 무슨 말을 하기 어려워 여태 기다렸습니다. 이제는 폐하께 백제 수군의 기습에 대해 알릴 때입니다. 거국적으로 준비를 해야 백제 수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저는 개인적으로 폐하께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는데 답이 없습니다. 여러 호족들이 제 상소가 폐하께 전달되는 것을 막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정윤비 마마께서 저 대신 폐하께 말씀해주십시오. 내년 농사일이 끝난 직후가 가장 위험합니다. 우리 고려에 가장 상책은 철저히 대비를 한 상태에서 백제 수군을 끌어들여 궤멸시키는 것입니다.

"흐음. 유금필은 왕건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는군. 하긴 이게 정론이지. 유금필은 곡도에 가서도 나라만 걱정하는 거 같아."

확실히 백제 수군의 공격을 예상한다면, 국왕인 왕건에게 알려서 대비를 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왕건이 나와 유금필의 말을 듣고 백제 수군의 기습에 대비하게 되면 역사가 바뀌게 된다. 그러면 내가 미리 친분을 다져놓은 왕만세가 실제 역사에서처럼 출세할 수 있을까? 아니야. 그런 건 생각하지 말자. 백제 수군이 공격하면 고려군사들이 많이 전사할 텐데 그건 막아야지. 내 사리사욕 때문에 그런 사태를 방관할 수는 없어.'

나는 교동도에서 만난 비룡성 관리와 목동들을 떠올렸다. 백제 수군이 공격하면 고립된 섬에 있는 그 사람들도 위험했다.

'왕건에게 나와 유금필이 백제 수군의 기습을 알리고 그 예상대로 되면, 자연스레 나는 수군인사에 개입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왕만세를 밀어올리면 돼. 꼭 역사에서처럼 고려 수군이 전멸하는 극단적 사태가 안 일어나도 내가 이득을 볼 수 있어.'

나는 그런 계산 끝에 왕건에게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그리고 이런 일 얘기를 하면 지겨운 격구 얘기도 안 하겠지.'

다음날 나는 한림원에 들어가서 말을 꺼낼 기회를 노렸다. 오늘 왕건은 나 대신 김악을 붙들고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잡담이 한번 끊겼을 때 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오늘 긴히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자마자 김악은 반갑다는 표정으로 몸을 뺐다.

"오, 그래 무슨 일이냐?"

왕건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왕건에게 말했다.

"곡도에 가 있는 유금필 장군이 폐하께 상소를 여러 번 올렸다는데 알고 계십니까?"

"안다."

왕건이 멀쩡한 얼굴로 답했다.

'호족들이 막은 거 아니었나? 왕건이 그럼 유금필의 상소를 읽었다고?'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금필 장군은 조만간 백제 수군이 개경 인근을 칠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보여준 유금필 장군의 지략을 생각하면 대비를 해야 합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백제가 이리 잠잠한 것이 이상합니다. 우리의 허를 찌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허허허. 우리 연우도 참 순진한 면이 있구나. 역시나 경험을 더 쌓아야 해."

내 말을 들은 왕건이 웃으면서 말했다.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왕건을 보며 내가 다시 한번 말했다.

"백제 수군의 공격에 대비를 해야……"

"아니. 백제 수군이 어찌 온다는 말이냐? 연우 너는 나이가 어려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지난 30년간 백제 수군은 우리에게 연전연패했다. 아니 그런데 무슨 수로 개경까지 와? 내가 젊었을 때 직접 수군을 이끌고 견훤을 격파한 적도 있다. 그때 견훤 모습을 네가 봤어야 하는데. 내가 화공을 펼치니 견훤이 겁먹고 기함을 버리고 작은 배에 뛰어내려 도망쳤다. 그때 불길이 크게 올라서 그 광경을 내가 직접 봤어. 불을 질러놔서 기류가 요동쳐서 화살을 쏴도 안 날아간 게 안타깝구나. 그때 견훤을 죽였으면 이 고생도 안 했는데. 내가 육전에서는 좀 고생했지만 수전에서는 한번도 진 적이 없다. 근데 백제 수군이 개경까지 온다고?"

왕건이 흐뭇하게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사정이 다릅니다. 폐하. 잘 들어보십시오. 백제 땅에는 섬이 많고 배를 타는데 익숙한 뱃사람들이 많습니다. 30년간 그들을 규합하면 능히 우리에게 맞설 수군을 키울 수 있습니다. 거기에 유금필 장군이 말씀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백제 수군이 거란 사신을 태워가다가 걸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미 백제 수군은 거란 땅까지 항해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만히 있는 것이 이상합니다."

수군 이야기를 하니 거만해지는 왕건을 보고, 갑갑해진 내가 진지하게 말했다. 어떻게든 왕건을 설득하고 싶었다.

"연우야. 그게 탁상공론이란 거다. 연우 너는 수전 경험이 한번도 없지 않니? 책상 앞에 앉아서 지도만 들여다보면 당연히 그쪽에 섬이 많으니 견훤이 강력한 수군을 키울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거다. 현실은 달라요. 응. 조건만 좋지 지난 30년간 성과가 없었는데. 우리 연우에게 한 수 알려주게 돼서 기쁘구나. 이러니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경험을 좀 쌓아야 정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거다. 으하하하."

왕건이 수염까지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뿐만 아니라 노련한 유금필 장군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야 참 안쓰러운 일이다. 유금필도 연약한 면모가 있다는 것을 내 이번에 알았다. 솔직히 유금필이 좀 억울하게 곡도에 가지 않았니? 분하고 원통한 와중에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백제 수군이 온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거지. 유금필은 '아! 백제 수군이 개경에 온다는 내 말이 맞으면 사람들이 놀라서 나를 부르겠지?'라고 중얼거리며 상소를 썼을 거다. 유금필만 이러는 게 아니다. 유배 간 많은 사람들이 다 똑같아. 유배만 가면 갑자기 나라에 큰일이 생길 거라고 상소를 올리기 시작하지. 거란 사신? 그거야 뭐 백제 수군이 올 거라는 망상을 뒷받침하려고 사소한 사실을 끼워 맞춘 거지."

왕건이 멀쩡한 얼굴로 말했다.

'망상에 사로잡힌 건 당신이야. 내가 미래에서 다 보고 온 사람인데. 모든 걸 이리 정치적으로 보니. 왕건이 정치 고수라서 더 그런 건가? 어허. 이거 진짜 큰일인데.'

나는 혀를 찼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비를 해놓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백제수군이 안 오더라도 수군 훈련도 시킬 겸."

나는 어떻게든 왕건을 움직여 보려고 그렇게 말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완벽한 상태다. 나를 따라 다니며 견훤을 깨뜨릴 때 활약한 집안 사람들을 다 배치해 놨어. 허허허. 연우 너는 유금필이나 잘 달래줘라. 사람이 오죽 불안하면 그런 망상을 다 하고. 내가 한 내년 연말에는 대호족들이 뭐라고 하든 유금필을 불러야겠다. 그때쯤이면 호족들도 잠잠해지겠지. 그 강인하던 사람이 이리 되니 안쓰럽다. 네가 이 소식을 유금필에게 전해줘라."

왕건의 태도를 보고 나는 체념했다. 도무지 내 말을 들을 얼굴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견훤와 신라왕을 굴복시킬 거란 내 말을 왕건이 진지하게 들어준 것도 자기 입맛에 맞으니 그랬던 것 같아. 자기 입맛에 안 맞는 말은 듣지를 않으니.'

그러나 내가 더 강하게 밀어붙이면 왕건이 화를 낼 것 같았다. 왕건의 총애를 잃을까봐 나는 더 이상 수군과 관련된 말을 못 꺼냈다.

"예, 폐하."

나는 억지로 수긍한 척 그런 대답을 했다.

"그래. 연우 너도 요새 격구단 문제로 걱정이 많아서 그런 엉뚱한 망상에 빠진 거 아니냐? 이거 참. 내가 돈을 보태 줄 수도 없고."

왕건은 기분이 상하진 않았는지 웃으면서 그런 농담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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