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17화 (117/216)

< 117 : 합종연횡 >

나는 거울을 보며 표정을 관리했다.

'너무 기쁜 기색이 드러나면 안 돼.'

나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그대로 나주원을 나섰다. 한림원에 들어서자 왕건이 한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신라 녀석들이 선물만 받아먹고 이럴 줄이야.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면 언제 항복을 한단 말이야? 항복을 한다고 말만 해놓고 이리 나오다니!"

요사이 왕건은 매일 한림원에서 이러고 있었다. 왕건은 신라 사신 김찬 앞에서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지도 못 했다. 김찬 앞에서는 웃으며 도량이 넓은 척 대화를 하다가 고려 신하들 앞에서 짜증을 내고 있었다.

'신라가 대단하긴 하군. 왕건을 이리 골탕먹이다니. 유긍달도 일이 이리 되니 전전긍긍하고 있고.'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하마터면 또 미소를 지을 뻔했다. 나는 재빨리 다시 얼굴 표정을 굳혔다.

'왕건은 눈치가 빨라서 내가 웃는 것을 보면 내 속내를 간파할 수도 있어. 그러면 곤란하다. 무엇보다 왕무도 신라가 항복하지 않는 것을 근심하고 있어.'

선량한 왕무는 오직 나라만 걱정할 뿐이었다. 정적인 유긍달이 곤경에 빠진 상황임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 왕무 앞에서 내가 좋은 티를 내면 왕무가 나에게 실망할 거 같았다. 그래서 요새는 나주원에서도 표정관리를 하느라 힘들었다.

내가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데 한림원령 최언위가 왕건을 달랬다.

"서라벌이 저런다고 해도 얼마나 버티겠습니까? 결국은 항복할 것입니다."

"하는 짓을 보니 몇 년은 이런 식으로 버틸 기세인데 딱히 방법이 없으니 걱정이다. 군사를 동원하면 그동안 내가 한 일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것이고……어허."

왕건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최언위가 계속 왕건을 위로했다. 그 덕에 왕건도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것 같았다.

"에잇 서신이나 계속 써야겠다."

왕건은 그렇게 말하며 붓을 들었다.

일을 마치고 나는 한림원 앞에서 왕무를 만나 구정으로 향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

'격구단도 만들기를 잘했어.'

오늘은 내가 만든 격구단과 좌승 함규가 만든 격구단이 경기를 열었다. 그래서 특별히 보러가는 것이다.

"광주 격구단은 그 실력이 상당하다고 합니다. 국선은 오늘 경기가 어떻게 흘러갈 거 같습니까?"

내 곁에서 왕무가 말했다. 왕무는 격구 자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뭐 잘 하겠죠. 돈을 그리 부었는데."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격구 경기를 보러 가지만 나는 격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다만 격구단을 가지고 있으니 격구를 보러 간다는 명목으로 자연스럽게 좌승 함규를 만날 수 있다는 건 좋네. 슬슬 좌승 함규와도 힘을 합쳐야겠지. 유긍달에게 맞설만한 실력자니.'

좌승 함규 역시 대호족으로 그 세력이 막강했다. 오늘날 경기도 광주가 함규의 근거지였다. 이 시대 광주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신라 한산주의 치소가 광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수백년간 신라의 한산주 도독들은 광주에서 행정업무를 봤다.

신라 말의 혼란기 때 이 광주 일대를 차지한 함규는 한산주를 다스리던 행정인력과 문서들도 모두 손에 넣었다. 거기에 광주 자체가 인구가 많고 생산력이 높은 고을이었다.

'그래서 왕건도 이 함규를 상당히 우대하지.'

함규는 아예 딸 2명을 왕건의 부인으로 보냈다. 두 부인을  대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이라고 불렀다.

'나한텐 자매 시어머니까지 있어.'

그 생각을 하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라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함규가 세력이 클 뿐만 아니라 유긍달, 황보제공 등과 맞서고 있다는 것이다.

'함규는 광주 출신이니 패서 호족들과 사이좋게 지낼 수가 없지.'

이 시대는 어느 지역 출신인가에 따라 정치적 입장이 결정되었다. 지난 수백년간 광주가 한산주의 치소였기에, 한산주 관할 하에 있는 패서 호족들도 무슨 일을 처리하려면 광주에 와서 굽신거려야 했다. 그 와중에 아니꼬운 일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가 무너지고 고려가 건국되며 패서가 수도권이 됐다. 이제는 광주 출신 호족들이 무슨 일을 처리하려면 개경에 와서 굽신거려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패서와 광주 상호간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지금 구도를 보면 패서 세력이 충주 세력과 연합해서 광주를 압박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함규 입장에서는 왕무를 지지하는 게 답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함규는 왕무의 지지세력이 된다.

'물론 왕무가 대호족들에게 시달리다가 일찍 죽고 왕무의 세력이 패하는 바람에 함규도 혹독한 보복을 당하지.'

그 생각을 하면 나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만약 내가 역사를 바꾸지 못하면 내 친정인 상산도 그런 일을 당할 것이다.

어쨌든 이런 구도 하에서 좌승 함규와 긴밀하게 소통할 필요가 있었다.

'상산, 나주, 광주, 거기에 표천현의 은광. 또 내 계획대로 일이 돼서 수군을 장악하게 된다면 왕무의 왕권을 탄탄하게 만들 수 있어. 거기에 명주도 또 혹시 모르지. 아직은 포섭할 가능성이 남아있다.'

다만 신나게 그런 계산을 하는 내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함규는 실제 역사에서 자기 딸을 왕무의 부인으로 보냈다. 그래서 왕무를 지지한건데……'

다른 여인을 껴안는 왕무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내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함규가 또 그런 요구를 하면 어쩌지? 함규의 딸이 나 대신 왕무의 후계자 문제를 해결해줘야 하나? 이대로 가면 그게 순리이긴 한데. 그게 싫으면 내가, 내가……'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왕무가 내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 느껴졌다.

"국선, 구정에 다 왔습니다."

내 눈앞에 구정의 누각이 보였다. 특별한 손님들이 따로 편하게 경기를 보라고 만든 누각이었다.

왕무는 자연스럽게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누각에 올랐다. 누각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 이리 소장을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각 위에 앉아있던 해령 장군 왕만세가 먼저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격구단을 만드니까 이게 편해. 왕만세 같은 사람들도 격구 경기에 초대해서 만날 수 있고. 이러면서 관계를 돈독히 하는 거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왕만세에게 따스하게 웃어주었다. 임연객 역시 나와 있었다. 나는 격구단 일은 모두 임연객에게 맡겼다. 그런만큼 격구 경기가 열리자 임연객 역시 나온 것이다.

"병부경이 됐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왕무가 임연객에게 따스하게 말해주었다. 드디어 임연객도 승진을 한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도 별 감흥이 없었는데 왕무는 정확히 기억하고 얘기를 꺼냈다.

"감사합니다."

임연객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리고 좌승 함규도 우리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정윤 전하, 정윤비 마마를 뵙습니다."

함규는 살이 포동포동하게 찐 중년인이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함규의 인사를 받고 곧 자리에 앉았다.

경기장에서는 곧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다만 나는 격구 경기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곁에 나란히 앉은 함규와 말꼬를 트는 것이 중요했다.

"요사이 중원의 정세는 어떻습니까?"

나는 함규에게 물었다. 광주의 대호족인 함규가 한산주의 행정력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했다.

신라에서 중국에 사신을 보낼 때는 항상 당항성을 이용했다. 그런데 이 당항성이 한산주 관할 아래 있는 성이었다. 그래서 역대 한산주 도독들은 신라 사신들을 중국으로 보내는 일을 도왔다. 한산주의 행정력을 얻은 함규도 이를 바탕으로 고려의 대중국 외교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함규의 전문분야에 대해 물어서 말문을 좀 터볼 작정이었다.

"중원은 실로 난리가 났습니다. 사방에서 여러 나라들이 일어나서 싸우고 있습니다."

자기가 잘 아는 이야기가 나오자 함규는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이때는 중국 역시 여러 나라로 갈라져서 싸우고 있었다.

함규는 이 복잡한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 시기 중국 역사는 상당히 복잡하지만 미래에서 온 나는 대강은 가닥을 잡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함규의 말을 들으며 중간중간 예리한 질문을 던지기도 하며 호응을 잘해줬다. 마침내 함규는 감탄해서 나에게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중국 정세에 상당히 능통하십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좌승께서 상세히 설명을 해주셔서 알게 된 것입니다."

"허허허."

함규는 흡족한 기색으로 웃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오래 궁에 있었지만 광주원에 인사를 드리러 가지 못했습니다. 조만간 광주원에 한번 가도 되겠습니까? 좌승도 그때 봤으면 좋겠습니다만."

내가 넌지시 운을 띄웠다. 사실 이런 누각에선 사람들이 많아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웠다.

내가 궁에서 함규와 만나자는 것은 긴밀한 이야기를 나누자는 제안이었다.

"허허허. 요사이 광주원을 개축하느라 어수선해서 정윤비 마마같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어렵습니다. 개축이 마무리 되면 정윤비 마마를 초청하겠습니다."

함규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나도 역시 웃었다. 겉으로는 화기애애해 보였지만 함규의 말은 내 제안에 대한 거절이었다.

'역시 내가 제안을 하자마자 덥석 받은 왕만세와 달리 세력이 큰 함규는 만만치 않군. 이런 식으로 튕기네. 외교 관련 업무를 오래 해서 그런가? 이런 식으로 튕기며 왕무의 파벌에 들어오는 대신 요구조건을 제시할 느낌이야. 역시 자기 딸을 왕무에게 보내려고?'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심란해져서 나는 격구 경기를 바라보았다. 하필 격구 경기도 내 격구단이 지고 있었다.

그리고 경기는 그대로 끝났다.

"광주 격구단의 실력이 대단합니다."

나는 함규에게 그런 칭찬을 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허허. 어쨌든 오늘 정윤비 마마와의 대화는 정말 유익했습니다. 향후 또 이런 자리가 마련되면 좋겠습니다."

함규는 외교관답게 또 대화의 여지는 남겼다. 함규는 나와 왕무에게 정중히 예를 갖추더니 누각에서 물러났다.

나는 여러모로 기분이 가라앉아서 꾸물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임연객이 나와 왕무 쪽으로 다가왔다.

"정말 면목이 없다. 연우야. 우리 격구단이 또 졌어."

임연객이 내 앞에 와서 고개를 푹 숙이면서 말했다. 격구단 일은 임연객에게 일임을 해놨는데 결과가 안 좋아서 미안한 모양이었다.

"괜찮아. 오라버니. 질 수도 있지."

"한번 진 게 아니라 요사이 계속 지고 있어."

임연객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

나는 다시 임연객에게 위로를 건넸다. 어차피 나는 기병 확보 및 정치적 활용 목적으로 격구단을 만들었다. 격구단 성적에는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내 능력이 부족해서 계속 지는 거야."

임연객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덜컥 의심이 들었다.

'이 인간이 이렇게 자기 잘못을 인정할 성격이 아닌데. 왜 이러지?'

이상함을 느낀 내가 대답을 안 하는데 임연객이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나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 정도 돈으로 성과를 내는 것은 한계가 있을 거야. 그냥 격구단을 딱 만들 돈만 주니 성과가 안나. 연우야! 기왕 격구단을 만들었으니 돈을 더 써야 해. 그래야 우수한 선수들도 뽑고 하지."

나는 임연객의 말을 듣고 분기탱천했다. 결국 임연객은 돈을 더 받아내려고 나온 것이다.

"아니 처음에는 그 정도 돈만 있으면 될 것처럼 말하더니! 왜 말을 바꿔!"

나는 펄쩍 뛰며 말했다. 조만간 발해 유민들이 올 때를 대비해 많은 자금을 저축해놔야 했다. 격구단에 쓸 돈이 없었다.

"내가 격구단을 처음 운영해 봐서 잘못 생각한 거야. 지금 상황이 심각해. 정윤 전하!"

임연객이 왕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왕무의 도움을 얻어보려는 생각 같았다. 여러 모로 기분이 나쁜 나는 왕무 쪽을 훽 돌아봤다.

그러자 왕무가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병부경. 어쨌든 주어진 돈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왕무는 나와 생각이 같은 것 같았다. 그런 왕무의 얼굴을 보니 나는 기분이 좀 풀렸다.

"어쨌든 돈 얘기는 더 이상 나에게 하지마."

그런 경고를 임연객에게 남기고 나는 왕무와 함께 누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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