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16화 (116/216)

< 116 : 천사옥대 >

최치원이 궁에 다녀가고 나서도 별 일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고창 전투에서 패한 백제군은 수비만 하고 있고. 왕건도 군사를 움직일 생각이 없어. 왕건은 공작 정치로 삼한을 통일할 생각이니까.'

나는 요사이 한림원에서 매일 서신을 쓰는 왕건을 떠올렸다. 왕건은 최대한 군사들을 움직이지 않고 이득을 보려 했다. 그래서 호족들을 설득하는 서신을 하루에도 수십 통씩 써서 보냈다.

뿐만 아니라 왕건은 서라벌에 선물도 많이 보내고 있었다. 민심을 얻어 순조롭게 서라벌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유긍달, 황보제공 등의 대호족들도 잠잠했다. 나는 이 사람들이 조용히 있으니 오히려 불안해서 임희와 이에 대해 의논한 적도 있었다.

"그 사람들도 이번에 유금필 장군을 날려버리느라고 상당히 무리를 했다. 그러니 한동안은 조용히 지내야지. 사실 유금필 장군이 별 죄도 없이 날아가는 바람에 여론이 좋지 않다. 대호족들도 사람들이 유금필에 대해 잊을 때까지는 쉽게 못 움직인다."

노련한 임희가 말했다.

"다행입니다. 우리가 숨을 좀 돌리겠습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유금필 덕에 나와 왕무는 시간을 번 것이다.

"이럴 때 정윤 전하의 위치를 확고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서둘러 후……"

임희가 말끝을 흐렸다.

'아버님은 아마 후계 얘기를 하고 싶으셨을 거야.'

나는 임희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이전에도 임희가 강조한 것이 후계 문제였다.

요 근래 나는 은근히 압박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까지 임신 소식이 없으니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당연했다.

'정말 고민거리가 끝이 없구나.'

나는 속으로 그리 탄식했다.

처음에는 결혼을 해서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상황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나를 배려해주는 왕무를 만나 결혼해서 모든 문제가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후계자 문제가 또 기다리고 있네. 예전에는 왕무가 다른 부인을 들여서 그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와 관련해 나는 요사이 고민이 많았다. 말없이 생각에 잠긴 나를 보고 임희가 당황한 기색으로 화제를 돌리려 애썼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폐하께서 최 선생에게 글을 하나 받으셨지. 폐하께서는 그런 선물을 좋아하셔서 요새 매일 어전에서 자랑하신다."

임희가 뜬금없이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나를 배려해주는 임희의 마음이 느껴졌다.

"예, 제가 최 선생을 초청했을 때 받으셨습니다."

나는 표정을 가다듬으며 임희의 말에 맞장구쳤다. 다만 그 와중에도 내 마음 속에서 후계문제에 대한 고민은 떠나지 않았다.

'참 시간이 빨리 가는군. 벌써 931년 9월이야! 올해도 거의 다 갔어.'

나는 바쁘게 한림원으로 달려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올 2월에 서라벌에 갔다 왔다. 그 뒤에 유금필이 유배를 가고 동양원 부인을 달래는 와중에 발해유민들을 시찰했다. 그러는 사이에 몇 달이 훅 지나갔다.

'견훤은 조용하고 대호족들도 몸을 사리고 있고. 나름 평화로운 때라서 시간이 잘 가는 건가? 어쨌든 백제 수군의 개경 공격도 딱 1년 남았군. 역사서를 보면 932년 9월에 백제 수군이 움직이니.'

이제는 견훤도 힘이 빠져서 농사일이 바쁠 때 군사를 움직이긴 어려웠다. 그래서 농사일이 끝나는 9월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다.

'그 공격에 대비해야겠군. 왕만세를 한번 더 만나서 관계를 돈독하게 해놔야지. 그런데 무슨 명목으로 부르지?'

나는 그런 고민을 하며 한림원에 들어섰다. 평소처럼 학사들이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이에서 왕건은 약간 뚱한 표정으로 서신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학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김부는 대체 언제 개경에 올라올까? 벌써 9월인데. 응?"

왕건의 얼굴에 약간은 초조한 기색이 엿보였다. 분명 올해 초에 신라가 항복한다고 사신을 보내왔다. 그래서 왕건은 공주들을 데리고 직접 서라벌을 방문했다. 이는 김부가 마음 편하게 항복할 수 있게 왕건이 배려한 것이다. 김부가 왕건의 방문에 답방하는 형태로 개경에 올라오면 항복이 마무리 되는 것이다.

'김부가 개경에 오면 고려 조정은 김부를 서라벌로 돌려보내지 않고 적당한 관직을 내리는 거지. 그리고 서라벌에는 고려 중신을 파견해서 다스리게 하고.'

왕건이 이런 판을 다 깔아놨는데 김부가 개경에 올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안 그래도 오늘 선필 공으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신라 조정이 폐하께서 보내신 선물을 받고 감격해서 사신을 보낸다고 합니다."

대내학사 김악이 말했다. 왕건에게 오고 가는 서신은 왕건 곁에 붙어있는 대내학사 김악이 관리하고 있었다.

"오오. 그것 참 잘 됐군. 내가 괜히 초조해 했다. 아마 이번에 오는 신라 사신이 김부의 개경 방문에 대해서도 논의하겠지? 이거 참 시간이 촉박해."

왕건은 신라의 항복이 임박했다고 믿고 요란을 떨기 시작했다.

'풋.'

미래 역사를 훤히 꿰뚫고 있는 나는 속으로 그런 왕건을 비웃었다. 그런데 왕건은 아무 것도 모르고 신속하게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김부가 항복한다고 하면 예의상 거절을 몇 번은 해야겠지? 학사들은 옛 사서에서 이런 경우엔 거절을 몇 번 정도 하는지 보고하도록. 옛 사례를 보고 내가 판단을 내리겠다."

"예, 폐하."

학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역사서를 뒤지기 시작했다.

"신라가 항복하면 서라벌 사람들의 마음도 달래줄 필요가 있다. 한림원령은 항복 후에 내가 공포할 글을 준비하도록. 서라벌 사람들을 달래면서 우리 고려의 위엄을 드러내는 글을 좀 써 봐."

왕건이 최언위에게도 그런 명을 내렸다.

"중요한 일인 만큼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최언위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왕건은 나를 향해서도 손짓을 했다.

"연우야. 너도 이리 와 보거라."

뜬금없이 나를 부르는 왕건을 보고 나는 약간 의아해졌다.

'신라의 항복과 관련해서는 내가 할 일이 없을텐데.'

어쨌든 왕건에게 다가간 내가 머리를 조아리는데 왕건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 김부가 항복하면 그 서열을 정윤보다 높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그래도 신라왕이었던 사람인데 연우 네가 이해해야지."

그 말을 들은 나는 순식간에 떨떠름한 심정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김부가 항복하자 왕건이 그런 특권을 주긴 해. 김부가 고려 공식서열 2위가 되고 왕무는 3위로 밀리고. 현대에서 기록으로 읽을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실제로 닥치니 기분이 좀 나쁘네.'

물론 김부가 공식서열 2위가 된다고 해도 일종의 명예직이고 실권이 없었다. 그러나 김부는 나중에 유긍달의 외손녀와 혼인을 하며 자연스레 유긍달 쪽 파벌과 이어진다. 김부가 지닌 상징적 명예와 유긍달의 힘이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 왕무에게 불리해지는데.'

그런 생각에 나는 웃으면서 넌지시 말했다.

"그냥 정윤 전하와 동격의 위치를 주면 좋지 않을까요?"

"아이고 그건 안 된다. 김부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야 삼한통일을 할 수 있어. 연우 네가 좀 참으렴."

왕건이 손사래를 쳤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가슴이 싸늘해졌다.

'왕건이 왕무를 어느 정도 아끼는 것은 맞다. 하지만 왕건 마음속의 우선순위는 삼한통일이야. 삼한통일을 위해서는 왕무가 불리해져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왕건의 생각! 하지만 내 우선 순위는……'

나는 또 고민에 빠졌다. 이번 건에서 대의는 왕건에게 있었다. 삼한통일이란 대의를 위해서는 왕무가 양보를 하는 것이 맞았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왕건의 조치에 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정윤은 충직하고 착하니까 이런 조치를 내려도 따를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연우 네가 걱정이야. 이걸 막겠다고 뭘 또 터뜨릴까봐 무섭다. 자 연우야. 잠잠히 있겠다고 약속을 하렴."

왕건이 말했다. 왕건이 이렇게까지 이야기 하니 나도 방법이 없었다.

"예. 폐하. 폐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왕건이 그토록 기다리던 신라사신이 개경에 도착했다. 신라사신이 도착하기 전부터 왕건은 호들갑을 떨었다.

"신라 사신을 환영하기 위한 환영회를 구정에서 열 것이다. 정윤, 정윤비도 이 환영회에 나와야 한다. 또한 중신들도 모두 참석하고 예를 다하라."

음식도 어마어마하게 준비했다. 국서를 받고 나서 바로 연회를 열 작정인 것 같았다. 반드시 항복이 이루어지리라 믿고 저러는 것이다.

마침내 신라 사신 김찬이 구정에 들어섰다. 그러자 의전을 위해 배치된 천우위 군사들이 깃발을 펼쳤다.

와아아아

그 광경을 보는 구정의 관중들이 함성을 질렀다. 왕건은 애초에 개경 주민들 앞에서 신라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에 구정에서 환영회를 연 것이다.

"폐하를 뵙습니다."

신라 사신 김찬은 왕건에게 절을 하며 국서를 바쳤다. 왕건은 황급히 국서를 펼쳐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찾는 듯 국서를 계속 뚫어져라 살폈다.

'신라의 항복에 대한 내용은 없고 그냥 선물을 받아서 고맙다는 것만 적혀 있겠지.'

나는 국서를 보지 않아도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내 국서를 내려놓은 왕건이 신라 사신 김찬에게 물었다.

"그대가 따로 할 말은 없는가?"

"폐하께서 서라벌에 보내신 선물을 받고 모두가 기뻐했습니다."

김찬이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음, 알았다. 우선은 연회를 시작하자."

왕건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구정에 미리 쳐놓은 천막에서 연회가 열렸다.

그리고 김찬에게 술을 내리고 자기도 한잔 마신 왕건이 마침내 못 참겠다는 듯 김찬에게 물었다.

"서라벌에는 천사옥대라는 보물이 있다고 들었다. 그대는 본 적이 있는가?"

"제가 우리나라 옛 일에 대해 잘 몰라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김찬이 왕건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김찬의 말을 들은 왕건은 안색이 변했다. 술을 마시던 고려 중신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유긍달은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손에서 술잔을 떨어뜨렸다.

'흐흐흐.'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알았다."

왕건은 그 이후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술만 마셨다. 연회 분위기는 매우 냉랭했다. 김찬은 다만 이 분위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었다.

"김 공께서 서라벌에서 개경까지 오셨으니 피곤하실 겁니다. 이제 객사로 가서 쉬시지요."

시중 김행선이 조심스레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김찬은 왕건에게 절을 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김찬과 신라 사람들이 모두 천막을 떠나자마자 왕건은 호통을 쳤다.

"잡찬! 신라가 곧 항복할거라 했는데 어찌 신라 사신이 저럴 수 있는가?"

천사옥대는 신라 왕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이었다. 그 천사옥대에 대해 왕건이 거론한 것은 신라가 언제 항복할지를 돌려 물은 것이었다.

아무리 왕건이라고 해도 신라사람 앞에서 노골적으로 항복하라고 하기에는 민망하니 천사옥대로 돌려서 말한 것이다.

그런데 김찬이 저렇게 대뜸 모른다고 한 것은 항복을 거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사옥대는 이 시대 워낙 유명한 보물이라 김찬이 모를 리가 없는데 모른다고 한 것은 그 의미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왕건이 천사옥대에 대해 물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10년 전에도 왕건은 신라 사신에게 같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신라 사신으로 온 김률도 김찬처럼 천사옥대에 대해 모른다고 했다.

그때는 왕건의 세력에도 한계가 있어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신라가 연초에 항복한다고 말했는데도 반응이 똑같으니 왕건도 노한 것이다.

"폐하. 송구합니다. 그러나 신라 조정도 지금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합니다. 신라의 박씨, 석씨들이 항복에 반대해서 지금 신라 조정도 어쩔 수 없습니다."

유긍달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는 신라가 항복한다는 국서를 보낼 때 내부정리는 다 됐다고 믿었다!"

왕건이 화가 나서 다시 외쳤다.

"폐하. 군사를 약간이라도 서라벌 인근에 보내서 신라 조정을 압박하십시오."

좌승 함규가 어쩔 줄 몰라하는 유긍달을 흘겨보며 말했다.

"지금은 그럴 수도 없다. 내가 서라벌을 방문하고 선물까지 보냈는데, 어찌 군사를 보낼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 내 체면이 뭐가 되는가? 신라가 이리 시간을 끌줄이야."

왕건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