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15화 (115/216)

< 115 : 화왕계 >

동양원은 아침부터 북적이기 시작했다.

"온 삼한 땅에 명성을 날리는 최 선생이 오신다니 떨리네요."

동양원 부인이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나더러 빨리 최치원을 데려오라고 압박을 주더니 막상 오늘 온다니 저러고 있었다.

"오늘 정오 무렵에 제가 상산저로 가서 최 선생을 모시고 오겠습니다. 그전에 준비를 마쳐주십시오."

나는 오늘의 일정을 동양원 부인에게 다시 말해 주었다. 정오쯤에 최치원을 데려오기 위해 나는 한림원에 휴가까지 냈다. 동양원 부인을 달래기 위해 휴가를 낸다고 하니 왕건은 흔쾌히 허락했다.

'왕건, 두고 봐라.'

나는 이를 악물며 착착 일을 진행시켜 나갔다. 최치원도 결국 지금 방문하는 것이 가장 부담이 적다고 생각했는지 내 뜻을 따라주었다.

그 덕에 마침내 최치원이 동양원에 들어섰다.

'나름 역사적인 순간인가? 그 최치원이 고려 왕궁에 오다니!'

나는 그런 의미 부여를 해봤다. 동양원 부인과 나주 왕후, 오지수 등은 동양원 문밖까지 나와서 최치원을 환영했다.

나주왕후와 오지수도 최치원이란 명사를 만나보고 싶어했다. 그래서 동양원에 달려온 것이다.

'지난번 발해유민 시찰도 그렇고 이번에도 나주원과 동양원이 함께 움직였다. 즉 유금필과 그 가문이 정윤파에 가담했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거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최치원과 함께 동양원의 정자로 향했다. 동양원 부인은 정자에 최치원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놨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 겸 최치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궁이 언덕에 있어 걸어 올라오기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무릎은 어떻습니까?"

나는 항상 고려 왕궁이 언덕 위에 있는 것이 불만이었다. 궁안에서 어디 갈 때마다 숨이 찼다.

'최치원도 나이가 많으니 이런 언덕을 걷기 힘들 거야. 최치원 입에서 언덕 때문에 궁에 오기 힘들다라는 말이 나오게 만들어야지. 그리고 나중에 왕무가 왕이 됐을 때, 최치원 선생께서도 당년에 궁이 언덕에 있어 힘들어하셨다고 핑계를 대며 궁을 평지로……'

나는 그런 상상을 하며 흐뭇해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런 언덕쯤은 거뜬합니다."

그런데 최치원이 뜻밖의 말을 했다.

"예?"

내 계산이 어긋나서 나는 크게 당황했다.

"저는 원래 해인사에서 오래 지냈습니다. 그곳 산길에 비하면 이런 언덕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곳 풍광이 상당히 수려합니다."

최치원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런 최치원의 모습에 긴장을 풀었는지 나주 왕후도 웃으며 말했다.

"이곳 풍수가 그리 좋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정원을 만들 때도 주변 풍광에 어울리게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동양원 부인도 재빨리 그 화제에 끼어들었다.

최치원은 정자 위에서 정원과 거기 피어있는 꽃들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었다.

"오호. 그렇습니까? 그래 정원의 꽃들도 부인께서 다 심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살필 수는 없습니다. 정원 일을 하는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동양원 부인이 공손히 대답했다.

의도치 않게 화제가 그쪽으로 흘러가며 장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다만 내 속은 불편했다.

'최치원이 언덕 위에 있는 궁의 풍광을 칭찬하다니. 나중에 이걸 명분으로 궁을 평지로 옮기는 걸 반대하는 무리들이 생기는 거 아니야?'

그사이 동양원 부인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 점심때니 우선 식사를 하고 나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동양원의 시녀들이 식사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정자에서 식사를 하며 환담을 나누었다.

식사가 끝나자 시녀들은 차를 내왔다. 차를 마시면서도 대화는 끊임이 없었다. 최치원은 아는 것이 많아서 그런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계속 꺼냈다.

'왕건은 안 오려나? 흐흐흐, 안 와도 상관없어. 지금쯤 최치원을 궁에서 만날 기회를 놓쳐서 왕건 속이 쓰릴걸?'

동양원 부인은 최치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초조한 기색이었다. 기다리는 왕건이 안 오는 것이다.

'동양원 부인이 내 계책이 안 통했다고 원망하면 어쩌지? 그러면 어찌 됐든 나는 최선을 다한 거라고 해야지.'

내가 어떻게 변명할지 궁리하고 있을 때 시녀 하나가 달려와서 외쳤다.

"폐하, 폐하께서 동양원에 들어오셨습니다. 진작 이 사실을 알리려 했는데 폐하께서 알리지 말라고 하셔서……이미 정자에 거의 다 오셨습니다."

"앗."

사람들이 모두 정자에서 일어나는데 왕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이쿠. 이런 우연이 있나? 목이 너무 말라서 동양원에 잠시 들렀는데 최 선생이 와 계십니다. 이런."

왕건은 그러더니 재빨리 정자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왕건이 진짜 목이 말라서 온 줄 알았을 것이다.

'우연? 그동안 어떻게든 동양원 부인을 붙들어두라고 나한테 지시를 내려놓고선.'

왕건의 모습을 보고 한쪽에서 동양원 부인이 눈을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다만 최치원이 있으니 동양원 부인도 아직 자제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오시기 전까지 궁의 풍광과 꽃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최치원은 웃으면서 왕건에게 말을 걸었다. 왕건은 그 말을 듣고 반색을 하며 말했다.

"이 궁의 풍수야 도선 대사께서 봐주셨습니다. 당연히 뛰어납니다. 풍광도 풍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 이야기를 듣자하니 문득 설총이 쓴 '화왕계'란 글이 떠오릅니다. 허허허. 인재를 모아야 한다는 뜻을 담은 훌륭한 글입니다. 그런 글을 써낸 설총이 대단하긴 합니다. 그리고 당세에 그 설총과 비견되는 분이 있으니……"

왕건이 은근한 눈빛을 최치원에게 보냈다.

'참 민망하게 오자마자 최치원을 물고 늘어지네.'

굳이 화왕계 얘기를 꺼내는 왕건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화왕계는 꽃들을 소재로 해서 쓴 우화 비슷한 글이었다. 훌륭한 인재를 기용해야 한다는 주제를 담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최치원 면전에서 하는 것은 결국 출사를 하라는 거잖아.'

그러나 최치원은 교묘하게 그 질문에서 빠져나갔다.

"한림원령은 확실히 지난날 설총에 비견할 만한 인재입니다."

왕건은 최치원이 설총과 비견될만하다고 말한 것인데, 최치원은 한림원령 최언위를 끌어들였다.

"음……그건 그렇습니다."

이미 자신을 따르는 최언위 이야기가 나오자 왕건은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최언위는 설총만 못하다고 깎아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림원령이 있으니 든든하시겠습니다. 이 외에 구족달이란 학사도 제가 보니 그 서체가 놀라웠습니다."

그러자 최치원은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결국 최치원은 왕건의 다른 신하들을 칭찬하며 자신은 출사를 안 하겠다고 정중히 대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허허허. 이거 참."

왕건은 난감한 기색으로 웃었다.

'우와. 왕건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본다. 최치원이 대단하긴 대단하네.'

나는 새삼 감탄했다.

"설총이 화왕계를 지을 때 꽃들의 특성을 세밀히 공부한 것이 드러납니다. 무릇 문학을 공부할 때는 그래야 하는 법입니다."

최치원은 아예 그쪽으로 화제를 넘겨버렸다.

"선생의 말이 옳습니다. 여러 시문들이 그런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왕건 역시 학문이 상당히 깊은 사람이라서 마침내 그쪽으로 대화가 흘러가기 시작했다.

'왕건이 진짜 생각 외로 똑똑하다니까? 공부는 대체 언제 한 걸까? 그건 그렇고 너무 심도깊은 이야기가 나오니 지루하네.'

나는 한문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주로 역사와 관련된 공부를 했다. 문학에 대해서는 지식이 별로 없었다. 이규보의 시야 이규보가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라 알고 있는 것이었다.

최치원은 당나라 시인인 백거이 이야기까지 꺼내고 있었다. 나는 중국 시인들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별 흥미가 안 갔다. 나주왕후나 동양원부인, 오지수도 지루한 기색이었다.

최치원도 이런 장내의 분위기를 느낀 것 같았다.

"폐하께 글귀 하나를 써서 바치고 싶습니다. 받아주시겠습니까?"

최치원도 왕건의 제안을 거절만 하니 미안한 것 같았다. 그래서 글귀 하나를 바쳐 왕건의 마음을 달래고, 오늘의 대화를 끝내려는 것 같았다.

"당연히 받겠습니다."

왕건이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시녀들이 문방사우를 가져왔다. 최치원은 붓을 들어 단숨에 글을 써내려 갔다.

'화왕백두(花王白頭)'

오늘 왕건과 화왕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만큼 그 내용과 관련된 글귀를 쓴 것이다. 그러더니 최치원은 나를 보며 물었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최승우를 꺾은 서예의 명가이십니다. 제 글씨가 어떻습니까?"

"훌륭합니다."

나는 그렇게 얼버무렸다.

'최승우 건은 반쯤 억지로 이긴 건데 무슨 서예명가?'

최치원이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하자 오히려 민망해졌다. 그 사이 최치원의 글씨를 집어든 왕건은 크게 기뻐하는 기색이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왕건이 글씨를 보며 감탄하는 사이 최치원이 작별인사를 건넸다.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느라 왕건의 반응이 약간 늦었다.

"……앗, 최 선생."

왕건이 정자를 나서는 최치원을 보고 외쳤다.

"저희도 가보겠습니다."

나주 왕후도 눈치를 보더니 그리 말했다. 동양원 부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저도."

나도 재빨리 그리 말했다. 그리고 오지수의 손을 잡고 정자를 빠져나갔다.

"앗, 왕후! 연우야! 너라도!"

왕건이 외치는데 이미 동양원 부인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빨리 가자!"

나주 왕후가 나와 오지수를 독촉했다. 나는 숨이 찰 정도로 빠르게 걸어 동양원을 빠져나갔다.

'궁을 언덕에 지어놔서 도망치기도 힘드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앞쪽에서 최치원이 천천히 궁을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최 선생을 상산저까지 모셔다 드리고 오겠습니다."

나는 나주 왕후에게 말했다.

"그래라. 잘 모시도록 해라."

나주 왕후의 허락을 얻은 나는 재빨리 최치원 곁으로 달려갔다.

"허허허. 나오셨습니까?"

"예. 선생."

그리고 나는 최치원과 함께 수레를 타고 상산저까지 갔다. 수레에서 내리며 최치원은 문득 입을 열었다.

"제가 폐하와 문학 이야기를 나눌 때 많이 지루해하는 기색이셨습니다. 문학에는 관심이 없으십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옛 사서를 읽는 것이 더 좋습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허허허, 문학 쪽도 어느 정도는 신경을 쓰시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모로 쓸모가 있습니다."

최치원은 그런 충고를 건넸다.

"예. 알겠습니다."

나는 굽신거리며 대답했다.

"어쨌든 오늘 정윤비 마마 덕에 부담을 덜었습니다. 허허허. 궁에 한번 얼굴을 비췄으니 앞으로 조용히 지내도 되겠지요."

최치원은 흡족한 기색으로 웃으면서 상산저로 들어갔다.

다음날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한림원에 출근했다. 잠시 자리에 앉아있으니 왕건이 매우 지친 표정으로 한림원에 들어섰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동양원 부인이 왕건을 끝장 못 냈군. 아니 그런 판을 깔아줬는데! 왕건이 한림원에 못 나올 정도로 갈궜어야지.'

그리고 왕건은 오자마자 나를 불렀다.

"연우야. 대체 왜 어제 최 선생을 동양원에 초청한 것이냐?"

"동양원 부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랬습니다. 그러면 부인께서 폐하께 안 찾아가겠다고 해서…… 저는 폐하께서 직접 오실 줄 몰랐습니다."

나는 짐짓 억울한 어조로 말했다. 결국 동양원에 온 것은 왕건 본인의 선택이라는 것도 은근히 지적했다.

"끄응. 알았다. 다만 다음부터 최 선생과 관련된 일은 나에게 꼭 보고해라. 어제 보니 생각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야. 반드시 얻어야겠다."

왕건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그리 넘어갔다.

"예. 폐하."

그리고 왕건은 품속에서 최치원이 준 글귀를 펼치더니 외쳤다.

"최치원 선생에게 어제 글귀 하나를 받았다!"

그 소리를 듣자 한림원에 있던 학사들은 우르르 왕건 옆으로 몰려들었다. 그런 학사들 앞에서 왕건은 자랑스럽게 어제 최치원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