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 초청 >
"오늘은 궁에서 가져온 배추절임으로 발해 사람들을 대접해야겠다. 큰 잔치를 열어야지."
나주 왕후는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나주 왕후는 왕후가 되기 전에는 일개 호족의 딸이었다. 이 시대의 웬만한 호족 집안 여인들은 모두 일을 했다. 난세에 일손도 부족한 시기라 가만히 방에 들어앉아 놀 수가 없었다.
나주 왕후도 친정에 있을 때 집안사람들을 지휘해 일을 해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신속하게 이런저런 명을 내리며 일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왕후 마마의 명을 받듭니다."
왕무와 군졸들이 나주 왕후에게 그리 대답하며 커다란 항아리를 지고 왔다. 그리고 재빨리 항아리에 든 배추절임을 꺼내기 시작했다. 왕무도 특유의 괴력으로 개경에서 준비해 온 물자를 날랐다.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었다.
"저는 밥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동양원 부인도 능숙하게 그런 나주 왕후를 거들었다. 동양원 부인도 원래 호족인 평산 유씨의 딸로 일을 해본 사람이었다.
동양원 부인은 재빨리 군졸들과 유민들을 부려서 가마솥을 놓을 자리를 확보하고 불을 피웠다.
오지수도 마후라 대사를 접대할 때 보면 요리를 잘했다. 오지수는 정교하게 야채를 다듬고 있었다.
"아이고. 왕후 마마와 정윤 전하께서 귀하신 몸으로 이러시니."
발해 유민들은 그 광경을 보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그러면서도 감격한 모습이었다.
'음 나주 왕후와 동양원 부인을 데려오길 잘했군. 경험이 많아서 일사불란하게 군졸들을 부리고 있어.'
나도 그사이에 껴서 열심히 일을 거들었다.
'나도 그동안 경험치가 쌓여서 이런 일에 능숙하다고. 고창성에서도 군사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해봤다.'
나는 내심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거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주 왕후가 나에게 말했다.
"호호호. 정윤비야. 너는 저기 아궁이의 불을 살펴라. 정말 중요한 일이라서 너한테 맡겨야겠구나. 그리고 넌……제발 다치지 않게 조심하렴. 가마솥 뚜껑을 열 때 네가 하지 말고 군졸들을 꼭 불러야 한다. 응."
나주 왕후는 신신당부를 하고 다른 쪽으로 갔다.
'역시 나주 왕후도 내 능력을 알아보고 중책을 맡기는군. 그런데 생각해 보니 고창성에서도 가마솥 뚜껑을 열다가 다친 것 같아. 나주 왕후에게 그 사실을 얘기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나는 자리에 앉아 아궁이의 불꽃을 바라보며 그런 의문을 품었다.
어쨌든 나주 왕후와 동양원 부인의 지휘 아래 발해 유민들을 위한 잔치는 순조롭게 끝났다. 사람들은 모두 흡족한 기색으로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나와 왕무 역시 발해 유민들이 마련해준 처소에 들었다.
"국선 괜찮습니까?"
처소에 들어서자마자 왕무는 내 손등에 약을 발라주며 물었다.
"예. 전하. 큰 상처는 아닙니다."
무심코 아궁이 속을 부지깽이로 쑤셨는데 불똥이 확 튀는 바람에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
'유민들이 부랴부랴 정착하는 와중에 아궁이며 부엌 설비가 시원찮아. 그래서 이렇게 다쳤네. 유민들을 위해 물자지원을 넉넉히 해줘야겠어.'
그사이에 약을 다 발라준 왕무가 내 손을 꽉 쥐며 말했다.
"국선이 나 때문에 여러 번 고초를 겪습니다."
왕무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또 이러네.'
그런 왕무를 보니 나도 가슴이 아팠다. 왕무가 나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왕무의 표정이나 말투에서 언뜻언뜻 느껴지는 게 있었다.
'왕무는 자신의 정치적 위치가 불안정해서 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생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뭣 하러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는지. 애초에 왕무의 지위가 탄탄했다면 나와 혼사 이야기가 나오지도 않았어. 적당한 대호족과 결혼했겠지. 그러면……'
거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동안 그 상태로 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는데 분위기가 묘했다.
왕무는 아직도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약은 다 발랐는데 왜 안 놓고 있어? 내가 손을 빼야 하나? 아니지. 왕무가 힘이 세니까 왕무가 놓아줘야 뺄 수 있어. 내가 굳이 힘을 쓰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야.'
왕무를 보고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왕무는 넋이 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그대로 내 손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내 손가락에 왕무의 입술이 느껴졌다. 살짝 벌어진 왕무의 입술 사이로 숨결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숨결이 내 손가락을 간지럽혔다.
'숨, 숨을 못 쉬겠어.'
내 손가락으로 왕무의 입술을 느끼고 있는데 그 감촉 때문에 내 몸 전체가 떨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왕무가 정신을 차린 듯 내 손을 놓아주었다.
"국, 국선. 정말 미안합니다. 오늘은 내가 이곳에 온 군졸들을 감독해야 해서 군영에서 잘 것입니다. 혹여 군졸들과 발해 유민들 사이에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곤란하니."
그러더니 왕무는 몸을 일으켜 바로 나가 버렸다. 나는 그런 왕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음날도 발해 정착촌은 시끄러웠다. 이제 고려 군사들은 본격적으로 우물을 파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자들을 저장하는 창고도 크게 짓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우물이 필요합니까?"
발해 정착촌의 대표인 모두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발해 정착촌 부근에 물이 나올만한 곳에는 모두 우물을 파라고 명을 내렸다.
'대광현과 발해 유민들이 오면 가장 필요한 것이 식수와 식량이다. 그래서 우물을 파는 거야. 식량은 창고에 저장해 두면 되고. 물과 식량만 확보되면 자신들이 살 집은 알아서 짓겠지.'
나는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 우물들이 다 나중에 쓸 데가 있습니다. 앞으로 이 우물들을 잘 관리해주십시오."
나는 모두간에게 그렇게 말했다.
"정윤비 마마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내 말에 모두간은 빠릿빠릿하게 대답했다. 군말없이 내 말을 따르는 모두간을 보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역시 내가 이번에 많은 물자를 줘서 이러는 건가? 아니야. 이건 너무 삐뚤어진 생각이야. 모두간은 원래 성실한 성격이라 저러는 걸 수도 있어. 그래 사실 모두간이 어떤 의도로 저러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것은 왕무다.'
갑자기 내 머릿속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어제 내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간 왕무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내 손가락에 전해진 감촉도 생생하게 다시 느껴졌다.
부르르
그때를 생각하니 내 몸 전체가 다시 떨렸다.
"정윤비 마마. 어디 편찮으십니까?"
모두간이 그런 나를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그리 대답하며 멀리 창고가 지어지는 쪽을 바라보았다. 왕무는 창고를 짓는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대업을 이뤄야 하는데 왕무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어.'
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윤비 마마."
곁에서 모두간은 어쩔 줄 몰라했다.
"좀 들어가서 쉬겠습니다."
나는 계속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라 모두간에게 그리 말하고 처소로 돌아왔다.
우리 일행은 우물과 창고를 만들어주고 발해 정착촌을 떠났다. 나는 교동도의 말똥을 퇴비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은 당장 실행하기 어려웠다. 교동도 목장에서 말똥을 실어 오려면 왕건의 허락이 필요했다. 개경에 가서 작업을 할 필요가 있었다.
"백주 쪽에도 발해인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쪽도 한번 둘러보고 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무는 나와 나주 왕후, 동양원 부인 등에게 그리 말했다. 백주는 개경 바로 옆에 붙어있는 고을이었다. 거리가 멀지 않아서 나온 김에 거기까지 둘러보고 가는 것이 좋았다.
"그러자. 간만에 나와서 일을 하니 힘이 나는구나."
나주 왕후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일행은 백주의 발해 정착촌도 둘러보고 물자를 공급하는 활동을 하다가 개경으로 돌아왔다.
개경에 돌아오자마자 동양원 부인은 나를 보채기 시작했다.
"자 정윤비의 말을 따라 나는 발해 유민 시찰에도 따라갔어요. 이제는 정윤비도 나를 위해 힘을 써주세요. 최치원 선생을 동양원에 오게 해주세요."
내가 동양원 부인에게 제시한 계책이 바로 최치원 초청이었다.
'최치원은 신라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 고려 조정에 출사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궁에 한번 초청을 하면 그것은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아. 왕건이 최치원을 만나기 위해 상산저에 갔으니 최치원도 예를 지키려면 궁에 한번은 와야지. 그리고 최치원이 궁에 오면 왕건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왕건은 아직도 최치원에게 미련이 많이 남아있어.'
그리고 최치원 초청과 관련해서 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시를 미끼로 최치원에게 부탁을 해 볼 수 있지.'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이 패를 쓰려고 아껴두고 있었는데 동양원 부인이 하도 떼를 써서 결국 이 패를 꺼냈다.
-폐하께서는 최 선생을 흠모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최 선생을 움직여 동양원에 오게 하면 폐하께서는 반드시 동양원에 오실 겁니다. 폐하께서는 궁에서 최 선생과 이야기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대장군의 일을 말씀해보십시오.
동양원 부인도 이 계책은 그럴 듯하다고 여겨서 마음을 가라앉힌 것이다. 이제 동양원 부인은 나더러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고 있었는데, 내 마음은 복잡했다.
'이 패를 지금 쓴다는 게 아쉽다. 동양원 부인은 아직도 기분이 안 풀렸나?'
그런 생각을 하며 동양원 부인의 얼굴을 살폈는데 내가 약속을 안 지킨다고 하면 난리가 날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부인. 그러나 최 선생을 설득하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나는 그런 말을 남기고 동양원을 나섰다.
다음날 나는 오래간만에 한림원에 나갔다. 그리고 한쪽에 가서 앉았다. 그런데 왕건은 나를 보자마자 외쳤다.
"아니 연우야. 한참 있다가 오지 왜 이리 일찍 왔니? 허허허. 시간을 더 끌면 좋았을 것을."
농담조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얄밉게 나를 타박하는 왕건을 보며 나는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나는 최치원을 반드시 동양원에 오게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그래 어디 한번 맛 좀 봐라. 동양원에 와서 동양원 부인에게 시달리든지, 아니면 궁에 온 최치원과 이야기할 기회를 놓치든지. 둘 중 뭘 선택해도 속이 쓰리겠지.'
나는 이를 갈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림원의 일이 끝나자마자 나는 수레에 올라 외쳤다.
"상산저로 가자!"
나는 홧김에 최치원을 만나기 위해 상산저로 달려왔다. 다만 최치원이 묵고 있는 별채 앞에 이르자 나는 고민이 됐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신라가 항복하겠다고 해서 우리가 서라벌을 방문했지. 신라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최치원은 그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일까? 그런 최치원에게 덜컥 부탁을 하기가……'
나는 머뭇거리면서 별채에 들어섰다. 다행히 최치원은 태연한 표정으로 서탁에 앉아 뭔가를 쓰고 있었다.
"정윤비 마마께서 오셨군요. 여기 앉으십시오."
최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한쪽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직접 차를 끓여서 가져왔다.
"선생께서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정윤비 마마께서 건네주신 시들을 연구하며 지냈습니다. 허허허."
최치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안 그래도 선생을 위해 제가 외우고 있는 시 한 수를 더 적어왔습니다."
나는 소매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서 건넸다. 최치원에게 부탁을 하러 온 만큼 이규보의 시를 한 수 더 적어왔다.
'이제 내가 외우고 있는 이규보의 시는 다 최치원에게 건넸다. 다음에 부탁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의 시를 건네야 하나?'
최치원은 내가 건넨 시를 읽고 나서 가볍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대단합니다. 정윤비 마마께서 어린 시절 만났다는 그 기인은 참 놀랍습니다. 그분을 한번 만났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저도 그분의 행방을 몰라서……"
"그게 참 아쉬운 일입니다. 그건 그렇고 정윤비 마마께서 이리 저를 찾아오신 것을 보니 할 말씀이 있으신 듯합니다."
정체를 숨길 때 상단에서 오래 일해서인지 최치원은 눈치가 빨랐다.
"슬슬 선생께서 한번 궁에 오실 때가 아닙니까? 동양원 부인께서 요 근래 부친인 유금필 대장군의 유배로 상심이 크십니다. 특별히 선생을 초청해 부인의 마음을 달래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본론을 꺼냈다.
"허허허."
최치원은 웃기만 하는데 내가 계속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유금필 대장군의 일로 요 근래 동양원에 오시길 꺼려하십니다. 선생께서 이번에 동양원에 오시면 동양원 부인만 만나고 가실 수도 있습니다. 물론 폐하께서 동양원에 오실 수도 있지만, 만약 오신다면 동양원 부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정신이 없어서 폐하께서도 선생에게 부담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에 궁에 오시는 게 선생께는 좋지 않습니까?"
최치원 입장에서는 왕건을 만나는 것이 부담일 것이다. 왕건은 최치원을 만나면 출사를 하라고 물고 늘어질 것이 뻔했다. 그점을 고려해 나는 최치원이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