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 가족여행 >
"동양원 부인, 제발 고정하세요."
나는 몸부림치는 동양원 부인의 소맷자락을 잡고 말했다.
"이거 놓으세요. 나는 폐하께 가봐야겠어요!"
동양원 부인은 그리 부르짖었다. 하지만 내가 전력을 다해 소맷자락을 끌어당겨서 못가고 있었다.
"부인, 유배라 하지만 대장군의 사병과 하인들이 함께 갔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상산백! 상산백이 유배를 갔어도 정윤비는 가만히 있을 건가요? 그런 상황에서 사병들이 상산백을 따라갔다고 하면 정윤비는 마음을 놓을 수 있나요?"
동양원 부인이 나를 보며 외쳤다.
'음 그건 그렇군. 아버님이 유금필처럼 되면 나도 울화가 터지겠지.'
"……"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머뭇거렸다. 그 틈에 동양원 부인은 날 떨쳐내려고 했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 떨떠름한 표정의 왕건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환상이 떠올랐다.
-아니, 연우야! 내가 동양원 부인을 잘 달래라고 그리 당부를 했는데 이거 하나를 못해! 동양원 부인도 못 달래는데 여러 대호족들을 달래가며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니? 어허, 이거 참. 그래! 연우 너의 능력을 이번에 알게 됐구나.
너무 실감나는 환상 때문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왕건은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야. 우선은 동양원 부인을 막아야지. 왕무를 위해서라도.'
그래서 나는 더 강하게 동양원 부인의 소맷자락을 움켜쥐었다. 내가 버티자 동양원 부인도 많이 화가 난 기색이었다.
"폐하께서, 폐하께서 나를 막으라고 정윤비에게 명을 내리셨죠? 그리고 정윤비는 폐하의 신임을 얻기 위해 나를 이렇게 막는 거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궁궐 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동양원 부인은 예리한 면이 있었다. 내 속내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나는 동양원 부인의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했으나 곧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지금 동양원 부인께서 이리 분노한 와중에 폐하께 가면 일이 풀리겠습니까? 폐하께서 진노하시면 대장군이 더 힘들어집니다. 부인과 대장군을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부인께서는 그럼 폐하 앞에 가서 폐하의 마음을 돌릴 확실한 방안이 있으십니까? 그게 있어서 폐하께 가시는 거라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저 단순히 폐하께 호소를 하러 가는 거라면 막을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둘러대려고 한 말이었는데 생각해보니 내 말이 옳았다.
"정윤비의 말에 일리는 있지만 그래도 폐하를 만나야 뭐가 되죠. 대책이 없어도 나는 갈 수밖에 없어요."
동양원 부인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동양원 부인도 왕건에게 달려간 이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유금필이 수군을 키워 이 상황을 타개하려고 한다는 걸 동양원 부인에게 알려주면 좀 잠잠해질까? 아니야. 그런 군사와 관련된 사안은 될 수 있으면 비밀로 하는 게 좋아. 나는 왕무에게도 이 이야기를 안했는데 동양원 부인에게 해줄 수는 없지. 그러나 그냥 말린다고 동양원 부인이 내 말을 들을 기세가 아닌데.'
뭔가 새로운 방책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런 내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부인. 부인이 폐하를 그리 만나고 싶으시다면 저에게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동양원 부인에게 말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동양원 부인은 솔깃한 기색이었다.
"예, 잘 들어보십시오."
나는 동양원 부인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속삭였다. 내 속삭임을 들은 동양원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정윤비 말이 맞아요. 그럼 바로 그 계책을 사용하면 안 되나요?"
"바로 쓰기에는 때가 좋지 않습니다. 폐하를 좀 안심시킨 뒤 일을 추진하겠습니다."
내가 강하게 말하자 결국 동양원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휴우."
동양원 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당장 왕건에게 달려갈 마음은 포기한 것 같았다.
다음날 나는 한림원에 나갔다. 왕건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서신을 쓰고 있었다. 요 근래 왕건은 사방의 호족들에게 서신을 쓰느라 하루를 다 보냈다.
호족들을 포섭해서 삼한통일을 끝낼 작정인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왕건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 휴가를 좀 내고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 폐하께서 발해 유민들을 보살피는 일을 저에게 맡겼습니다. 그런데 저는 돈만 약간 대고 고려에 온 유민들을 시찰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한번 살펴보고 싶습……"
"그건 절대 안 된다. 연우 네가 지금 동양원 부인을 붙들고 있는데. 네가 사라지면 내가 큰일이다."
왕건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동양원 부인의 마음도 달래드릴 겸 발해 유민을 시찰하는 일에 함께 모셔가려 합니다. 발해 유민들이 개경 교외에 정착했으니 거리가 멀지도 않고……"
"오오오, 연우 너의 충효에 감탄할 뿐이다. 동양원 부인이 잠시 궁밖에서 지내면 실로 좋은 일이야. 당연히 허락해야지. 그래 동양원 부인이 연우 너와 함께 간다고 하더냐?"
왕건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내가 연우 너의 유능함 덕에 산다. 암 발해 유민들을 보살펴야지. 될 수 있으면 오랫동안 발해 유민들의 정착지를 보고 오너라. 아예 정윤도 함께 가라. 내가 군사들을 넉넉히 내주마. 그 군사들을 부려서 발해 유민들 일손도 거들어주고 해라."
왕건은 인심을 쓰는 척 그리 말했다.
'동양원 부인이 잠시 개경을 떠난다니까 기뻐하는 모습 좀 봐. 기가 막혀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겉으로는 왕건에게 고마워하는 척했다.
또 다시 나주원이 들썩거렸다.
"우와, 교동도에 이어 또 놀러가는 건가요?"
오지수가 외쳤다.
"지수야. 발해 유민들의 민생을 살피는 일이다."
왕무는 근엄하게 오지수에게 말했다. 그런 왕무 곁에서 나주 왕후는 약간 흥분된 기색으로 말했다.
"나도 참 오래간만에 궁 밖을 나서는구나."
나주원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일이 커졌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다 보니 나주왕후와 오지수도 우리와 함께 발해유민 시찰에 나서게 됐다.
'그런데 동양원 부인과 함께 가는데 나주 왕후는 두고 가는 것도 이상하고.'
졸지에 개경 교외로 가족여행을 하게 됐다.
"발해 유민들에게 줄 물자를 다 마련하면 움직일 거 같습니다. 그때가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나주 왕후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그래 그전에 내가 준비를 다 끝내마. 일이 많은 것 같은데 너희들은 돌아가 쉬거라."
나주 왕후가 나와 왕무에게 말했다. 우리는 나주 왕후에게 인사를 하고 처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각자의 침상에 앉았다.
다만 침상에 앉아서도 내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이번 발해유민 시찰은 여러 가지를 한 번에 노린 거야. 동양원 부인을 데려가서 왕건을 안심시키는 것이 물론 주목적이야. 거기에 더해 이제는 슬슬 발해 유민들을 한번 둘러봐야 해. 그들이 이젠 중요한 변수가 된다.'
나는 열심히 연도 계산을 했다.
'올해가 아직 931년이다. 발해 태자 대광현은 934년에 고려에 오지. 지금부터 준비를 해놔야 발해 세력을 우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대광현과 함께 올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준비를 해놓으면 자연스레 나와 왕무 쪽으로 그들을 포섭할 수 있다. 다른 호족들이 그들을 끌어들이고 싶어도 준비가 안 돼 있으면 소용없지.'
내가 그렇게 큰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왕무가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국선은 생각이 많아 보입니다. 피곤하지 않습니까? 혹여 이번 여행 준비가 부담이 되는 것은?"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나는 나를 걱정해주는 왕무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다만 왕무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 속도 복잡했다.
'유금필과의 일은 왕무에게도 말을 안 했는데 괜찮은 걸까? 왕무는 내 남편이기도 하고 정윤인데 왕무에게는 다 말을 하고 움직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런 일은 될 수 있으면 비밀을 지켜야 해. 거기에 대광현이 오는 일은 내 미래지식으로 알아낸 건데. 이건 말 못하고. 왕무에게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는 고민했다. 그런데 그렇게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 머릿속이 점점 맑아졌다. 어깨도 시원했다.
"앗. 전하."
나는 순간 놀라서 외쳤다. 어느 틈엔가 왕무가 내 등 뒤에 와서 내 어깨를 주물러 주고 있었다. 힘이 좋은 왕무가 주물러 주니 어깨도 시원해지고 머릿속도 상쾌해진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겨 그 안마를 받으면서도 못 느끼고 있었다.
"국선이 나를 위해 요사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느라 피로해 보여 걱정입니다."
왕무는 내 어깨를 주물러 주며 그리 말했다. 나는 기분이 좋았지만 정윤인 왕무가 이러니 부담이 됐다. 그리고 부끄럽기도 했다.
'어느 틈에 이리 자연스럽게……'
나는 살짝 손을 들어 왕무의 손을 어깨에서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정윤 전하. 사실 유금필 장군의 일로……"
나는 왕무에게는 유금필의 일에 대해 알려주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왕무는 내 어깨로 다시 자신의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런 일은 차차 나중에 설명해줘도 됩니다. 국선이 나를 위해 뛰는 것을 아는데 일일이 나에게 말해줄 필요는 없어요. 국선이 피로를 푸는 것이 중요합니다."
왕무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모든 걸 말하려고 했는데 왕무가 저렇게 나오니. 뭐 내 탓은 아니야.'
나는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왕무를 보며 그냥 왕무의 손에 몸을 맡겼다. 왕무는 열심히 내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나는 전신의 피로가 싹 풀리는 것을 느꼈다. 다만 약간은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왕무가 요새 점점 과감해지는데 뭔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설마 왕무가 그럴 리가?'
나는 성실해 보이는 왕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자면 다음날 상쾌하게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선."
과연 왕무는 그렇게 말하더니 깔끔하게 손을 떼며 자신의 침상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왕무는 믿어도 돼.'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발해 시찰을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나, 왕무, 나주 왕후, 동양원 부인, 오지수는 수레에 나눠 타고 개경을 나섰다. 왕건이 내준 군사 200기가 우리를 호위했다.
여행은 길지 않았다.
고려에서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인 것은 국왕인 왕건뿐이었다. 그래서 대다수 발해인들은 왕건의 본거지인 개경 인근에 정착해 있었다.
솔직히 나는 왕건의 이런 모습에 대해 사서에서 읽고 왕건을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와서 왕건을 겪어보니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발해유민들을 보살피는 거겠지.'
이런 의심이 강하게 들었다.
어쨌든 나와 왕무 일행이 발해 정착촌에 당도하자 발해유민의 지도자들이 우리를 맞이하러 나왔다.
모두간, 박어, 은계종, 정근 같은 사람들이었다. 사실 발해가 926년에 멸망했다고 하지만 각지의 발해인들은 아직도 거란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렇게 싸우다가 힘이 다하거나 식량이 부족해진 발해인들이 수십 명, 수백 명 단위로 고려로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정윤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간이 이곳의 발해인들을 대표해서 왕무에게 예를 올렸다. 모두간은 발해의 좌수위 소장이란 관직을 역임한 사람이라 대표로 나선 것이다.
"고생이 많습니다."
왕무가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발해 정착촌의 상황이 팍팍해보였기 때문이다. 왕건이 신경을 써도 한창 백제와 전쟁 중인데 넉넉하게 이들을 지원해 줄 수는 없었다.
'여태까지는 나도 그럭저럭 유민들이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돈만 댔지만 이제는 본격적으로 주머니를 풀어야겠다. 대광현이 수만 명의 유민들을 끌고 올 때를 대비해야지. 왕무도 그럼 좋아하겠지?'
내가 그런 궁리를 하고 있는 와중에 모두간은 왕무를 보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곳 고려는 발해 땅보다 기후가 따뜻해서 농사를 지을 만합니다. 자리만 잡히면 수확량이 괜찮을 것입니다. 우리 발해 유민들은 모두 고려국 폐하를 도와 도적들을 평정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나마 이 시대는 기후가 따뜻해서 농사를 짓기 훨씬 편하지. 조선시대보다 농업기술이 뒤떨어지는데도 그나마 기후가 좋아서 생산력이 나오고 군사를 일으킬 수 있는 거야. 그러고 보니 내가 아는 조선시대 농법을 적용하면 생산력이 급속히 오르지 않을까? 시비법 같은 거!'
내 뇌리에 얼마 전 교동도에서 본 광경이 떠올랐다. 여기서 가까운 교동도에는 말들이 수천필이나 살고 있었다. 말똥도 많이 나올게 뻔했다. 그것들을 가져와 퇴비로 만들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