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 : 교토삼굴 >
나와 최언위는 수레를 타고 유금필의 저택 앞에 도착했다. 나는 준비해 온 상자 하나를 들고 수레에서 내렸다. 최언위도 곧 내 곁에 섰다.
유금필의 저택 앞은 어수선했다.
"빨리 이 짐도 챙겨라! 서둘러. 주인 어른을 모시기 위해 우리도 내려가야 한다."
"평산 본가에도 전갈을 보내. 호위할 군사를 보내라고 해."
유금필의 하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유금필이 거느린 하인들도 곡도로 내려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유금필이 그냥 쉬러 간다는 왕건의 말도 아예 허튼 말은 아니야.'
그 광경을 보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시대는 귀족들이 저마다 사병을 거느리고 있어서, 혹독한 유배를 명하긴 어려웠다. 홀몸으로 유배지에 가서 죽음을 기다리라고 하면 당연히 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거병해 싸울 게 뻔했다.
'김순식의 선조들도 왕위계승 경쟁에 져서 명주로 쫓겨나긴 했지만 사병이며 물자는 다 거느리고 갔지.'
유금필은 억울하게 쫓겨나는 것이라 왕건도 많은 배려를 해줬다. 그래서 유금필은 곡도로 자기 세력을 이끌고 가는 것이다.
유금필은 대호족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나름 세력이 탄탄했다. 그런 유금필 휘하의 사람들이 모두 곡도로 내려갈 준비를 하니 저택이 시끄러웠다.
그래도 나와 최언위가 대문 앞에 서있자 곧 유금필의 하인들이 달려왔다.
"정윤비 마마와 한림원령 최언위가 유금필 공을 만나러 왔다."
최언위가 그렇게 말하자 유금필의 하인들이 재빨리 우리를 안으로 안내했다.
"주인 어른께서는 별채에 계십니다."
별채에 가니 이곳은 이미 짐을 다 쌌는지 조용했다. 유금필은 그 가운데 앉아서 혼자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우리의 모습을 보자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선 유금필이 말했다.
"이곳에 앉으십시오. 하인들이 곧 차를 내올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나와 최언위는 입을 모아 대답하고 유금필 맞은편에 앉았다. 하인들이 기민하게 차를 내왔다. 나와 최언위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자 유금필이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폐하의 말씀을 전하려고 왔습니다. 폐하께서 유금필 공이 이리 떠나는 것에 대해 상심이 크십니다. 곡도에서 너무 걱정하지 말고 쉬다 오라고 하셨습니다."
최언위가 나서서 유금필과 대화를 나눴다.
'왕건이 언제 상심을 했어? 이 아저씨도 참.'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최언위를 보며 혀를 찼다. 다만 굳이 대화에 끼지는 않고 차를 마시며 관망만 했다.
"제가 처신을 잘못해서 떠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폐하께서 이리 소장을 걱정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유금필은 최언위에게 정중히 예를 올리며 말했다. 억울하다는 티를 조금도 안 냈다.
'이런 걸 보면 유금필도 정치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아니야. 그동안 선물도 안 받고 중립을 지킨 것만 봐도 그렇고. 그런데도 결국 이리 날아가다니! 정치가 어렵긴 해. 다만 유금필 같은 경우에는 워낙 똑똑한 사람이라 탈출구도 마련해 놨지.'
최언위와 유금필은 그 이후로도 계속 비슷한 말만 반복했다.
최언위는 왕건이 얼마나 유금필을 걱정하고 있는지 말을 늘어놓고, 유금필은 계속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두 사람도 지친 모양이었다.
"……"
어느 순간 할 말이 없어졌는지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나는 빈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동안 대장군께 병법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장군께서 곡도로 떠나시니 앞으로 병법에 대해 궁금한 점이 생겨도 물어볼 곳이 없습니다. 그게 안타깝습니다."
"궁금한 것에 대해 지금 물어보셔도 괜찮습니다. 또 곡도는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닙니다. 나중에 서신도 보내십시오."
유금필은 웃으며 대답했다.
한쪽에서 최언위는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언위를 내보내고 유금필과 단 둘이 대화를 나누는 게 편한데. 하지만 권력을 잃고 곡도로 쫓겨나는 유금필과 밀담을 나눈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어. 사람들의 의심을 살 공산이 크다. 최언위는 왕건의 사람이니 그 앞에서 대화를 나눠야 한다.'
그런 생각과 함께 나는 한쪽에 있는 붓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지난번에 했던 놀이를 대장군과 다시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지난번에는 언제 올지를 논했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올지에 대해 논하고 싶습니다."
옆에 최언위가 있었기에 나는 일부러 말을 애매하게 했다. 나와 유금필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대화를 나눠야 했다.
예전에 나와 유금필은 견훤이 언제 올 것인지 각자 종이에 써서 비교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 나와 유금필은 7월에 견훤이 올 것을 정확히 예견해냈다. 나는 그때 일을 거론한 것이다.
그 일은 나와 유금필만 알고 있으니, 최언위는 내 말을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모를 것이다.
"좋습니다."
유금필도 역시 붓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각자 소매로 종이를 가리고 뭔가를 썼다. 그리고 동시에 종이를 공개했다.
내 종이 위에는 해(海)라고 적혀있었다. 유금필은 종이 위에 수(水)라고 적었다.
'역시 유금필도 곧 견훤이 수군을 동원해 공격할 것을 예상하고 있군. 역사서에도 유금필이 이에 대해 대비해 놨다고 적혀있다. 다만 어떻게 이걸 예지했지? 나처럼 미래에서 왔나?'
나는 다시 그런 의심이 들어서 유금필을 노려보았다.
"역시 정윤비 마마께서는 병법에 조예가 깊으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유금필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대장군이 곡도로 떠나시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저도 대장군이 어찌 아셨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곁에 있는 최언위를 의식해 동문서답같은 답을 내놨다.
'왕건이 유금필을 고향에 보내주려고 했는데도 유금필 본인이 굳이 자청해서 곡도로 가게 됐다. 그걸 보고 바다에 뭔 일이 날 것을 예측했다고 둘러댄 건데. 유금필이 알아들었겠지?'
나는 슬쩍 유금필의 눈치를 봤다. 유금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유금필도 내 의중을 눈치챈 것 같았다.
"거란 사신."
유금필은 짧게 대답했다.
'견훤이 수군으로 올 줄 어떻게 알았냐고 물은 건데 왜 거란 사신 타령이야.'
나는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하하.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나는 잘 모르겠다는 신호로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수달은 수영을 잘 하는 동물입니다. 그 수달이 수영을 하지 않으면 수상한 것입니다."
유금필이 선문답을 하듯이 말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래 언제 한번 견훤이 배를 통해 거란 사신을 돌려보내다가 걸린 적이 있었다. 그때 왕건이 백제와 거란이 결탁해서 무슨 짓을 하는 게 아니냐고 걱정한 적이 있었어. 즉 백제는 이미 거란땅까지 배를 보낼 능력을 몇 년 전에 갖추고 있었다. 배를 보내 거란 사신을 백제 땅까지 태워왔으니 돌려보내다가 걸린 거지. 그런데도 백제 수군은 여태 가만히 있었다. 능력이 있으면서도 잠잠한 백제 수군을 보고 유금필은 견훤의 노림수를 눈치 챈 거야! 그래서 유배지도 곡도로 택한거다. 거기서 수군을 키워 백제를 막으려고. 실제 역사에서도 그랬지.'
나는 이제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참 대장군의 충의는 놀랍습니다."
나는 유배를 가면서도 견훤을 막으려는 유금필을 칭찬하기 위해 그리 말했다.
"교토삼굴이 더 정확합니다."
유금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견훤의 수군을 막아 유금필 본인이 개경으로 복귀할 계책을 세운 거니 그걸 충의라고 올려치지 말라는 거군. 어쨌든 대단해.'
나는 감탄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대장군께서 먼길을 떠나시니 제가 선물을 준비해왔습니다. 곡도에서 쓰십시오."
나는 미리 준비해온 상자를 유금필에게 건넸다. 상자 안에는 내가 나주원에서 챙겨 온 은병이 들어있었다.
'유금필은 곡도에서 수군을 키울 계획이다. 수군은 돈이 많이 드니 이 은병이 나름 보탬이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유금필을 바라보았다.
'유금필은 그동안 중립을 지키기 위해 호족들로부터 오는 모든 선물을 거절했다. 선물을 받으면 그것은 그쪽에 가담한다는 의미가 되니. 유배를 떠나게 되는 지금도 선물을 거절할까? 나도 알 수가 없군.'
유금필도 내가 건넨 상자를 보고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선물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를 유금필도 아는 것이다.
그러다가 유금필은 상자를 자기 쪽으로 끌고 갔다.
"아무래도 앞으로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니 받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허허허."
유금필이 말했다. 유금필은 곡도에서 키운 수군으로 견훤을 막아내고 개경에 복귀할 작정이었다.
유금필 입장에서는 반드시 성공해야 조정에 돌아올 수 있었다. 결국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내 은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유금필은 이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왕무를 도울 수밖에 없다. 아니 애초에 가장 힘들 때 이만한 은병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른 대호족들도 유금필을 왕무의 파벌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유금필에게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었다.
"제 성의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정윤비 마마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유금필도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그럼 곡도까지 살펴가십시오."
나는 유금필에게 그런 작별인사를 건넸다. 유금필과 필요한 말은 모두 나누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최언위 역시 따라서 일어났다.
"정윤비 마마께는 감탄할 뿐입니다."
유금필은 그렇게 나를 칭찬하며 대문까지 우리를 전송했다.
나와 최언위는 수레에 올라 우선 한림원으로 가야했다. 왕건에게 일이 어찌 되었는지 보고를 해야하는 것이다.
자신의 수레에 오르기 전 최언위가 나에게 말했다.
"병법이 매우 심오한 학문 같습니다. 정윤비 마마와 유금필 공이 나누신 병법에 대한 문답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허허허. 혹여 제가 있어 불편하셔서 그런 것입니까?"
최언위는 어느 정도 내 의도를 눈치챈 것 같았다.
"아닙니다. 원래 대장군과 대화를 나눌 때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앞 뒤 맥락을 생략하면 대화를 신속히 진행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림원령께서 궁금하시면 자세히 풀어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최언위는 웃으면서 수레에 올랐다. 그리고 나와 최언위는 그대로 한림원으로 향했다. 왕건은 아직 한림원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최언위가 나서서 왕건에게 보고를 올렸는데 그 기억력이 대단했다. 유금필의 저택에서 있었던 대화를 그대로 왕건에게 하나하나 전했다.
나와 유금필 사이에 오간 병법 문답도 왕건에게 보고됐다. 그러나 왕건은 병법 문답에는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책을 보며 이야기를 다 들은 왕건이 말했다.
"그래 그런 구구한 이야기는 의미없고 유금필의 반응은 어땠나? 표정같은 거 말이야."
"폐하의 은혜에 계속 감사를 표했습니다. 진심같아 보였습니다."
최언위가 그렇게 대답했다.
"유금필이 마음을 편하게 먹은 것 같아 다행이군. 그리고 우리 연우가 생각 외로 의리가 있구나. 유금필을 위해 선물까지 마련하고. 어쨌든 선물까지 받았으니 유금필이 더 안심했겠지. 잘했다. 서신을 보내는 것도 잘 됐다. 유금필이 안심할 수 있게 개경이야기를 좀 해줘."
왕건이 내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예, 폐하."
나는 내심 안도하며 왕건에게 굽신거렸다. 이러면 유금필에게 서신을 보내는 일도 허락을 받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병법을 그렇게 이론으로만 배우면 한계가 많은데. 선문답을 하면 그럴 듯하고 재밌긴 하겠다만. 하긴 왕무가 무장으로서 뛰어나니 걱정은 없다. 그래 가봐라."
왕건이 말했다.
내가 왕건에게 인사를 하고 물러나려는데 왕건이 다시 나를 불렀다.
"아 참. 연우야. 동양원 부인은 진짜 너만 믿는다. 유금필이 선물도 받고 하인, 사병들도 데려간다고 동양원 부인에게 잘 말해줘. 응. 제발 잘 달래줘라. 뭣하면 휴가를 내도 좋아."
그러더니 왕건은 그런 신신당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