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11화 (111/216)

< 111 : 이심전심 >

계속 우는 동양원 부인을 다독이다가 나는 결국 아버지인 임희를 부르기로 했다.

'아버님이 와도 별 뾰족한 수는 없을 텐데, 거기에 아버님이 나주원에 오는 것을 지켜보는 눈도 분명히 있을 거고.'

하지만 동양원 부인이 워낙 통곡을 하니 그녀를 달래기 위해 뭐라도 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임희에게 사람을 보냈다.

"상산백!"

임희의 얼굴을 보자마자 동양원 부인은 절박한 표정으로 외쳤다.

"부인도 와 계셨군요."

임희는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과 함께 대장군을 구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겠습니다. 부인께서는 이제 쉬십시오."

나는 동양원 부인에게 권했다.

"나도 함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지금 부인께서 끼시면 대책을 마련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것입니다."

나는 동양원 부인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그렇군요."

동양원 부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모실게요."

오지수가 나서서 동양원 부인의 손을 잡고 한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나와, 왕무, 임희, 임연객은 나주원의 한 방에 둘러앉았다.

"오라버니가 우리에게 개경의 상황을 알리는 서신을 보내려고 했는데, 아버님이 막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임희에게 물었다.

"그야 뭐. 지금 상황이 폐하의 뜻 아니겠느냐? 괜히 네가 서라벌에서 이 상황을 알아서 대장군을 구해보겠다고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힐까봐 막았다."

임희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내 곁에서 왕무가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나는 왕무에게 나서지 말라는 의미로 그 손을 꽉 잡았다. 왕무가 나서면 임희가 솔직한 의견을 내기 어려웠다. 딸인 내가 임희와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 편했다.

"대장군을 이리 쳐내는 게 폐하의 의중인 것이 확실합니까?"

나는 미래에서 온 만큼 이즈음에 유금필이 유배를 가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왕건의 뜻인지, 아니면 호족들에게 떠밀려서 그런 건지는 몰라. 역사서에 사람들의 심리는 적혀 있지 않으니.'

그래서 왕건과 오랜 세월 함께 한 임희의 의견이 중요했다.

"그야 확실하다. 연우 너도 지금 대장군의 상황을 듣고 부랴부랴 나를 불러 이리 대책을 논의하지 않느냐? 폐하께서 대장군을 구할 마음이 있으시다면 바로 사람들을 부르셨을 거다. 그런데 지금 잠잠하지 않니?"

"그렇군요."

"이제 신라마저 항복했으니 백제 잔적들만 토벌하면 통일 대업은 끝난다. 대장군이 계속 군을 통솔하면 잔적들을 토벌하는 공도 모두 대장군의 것이 된다. 이미 고창에서 대장군이 그 큰 공을 세웠는데 더 이상 공을 세우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느냐? 거기에 고창에서 대장군이 공신, 외척들에게 그 수모를 줬으니 무사할 리가 있느냐?"

임희가 서늘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님도 표정을 보니 유금필이 실각하는 것을 나쁘지 않게 보시는군. 고창에서 유금필이 어떤 모습을 보였기에 이리 됐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내가 쥐고 있는 왕무의 손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손만 잡고 있어도 왕무의 속내가 느껴졌다.

유금필이 이리 억울하게 날아가는 상황이 왕무에게는 너무 답답한 것 같았다. 임희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어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로 더 세게 왕무의 손을 쥐며 말했다.

"그러나 고창에서 대장군이 공신, 외척들의 뜻을 꺾었기에 우리가 이겼습니다. 고창 전투에서 대장군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면 우리가 졌을 겁니다. 결국 대장군이 우리 모두를 살리고 고려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지금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왕무가 이런 질문을 임희에게 던지고 싶어 할 거 같아서 내가 대신 나섰다. 과연 내 생각이 맞았는지 꿈틀거리던 왕무의 손이 잠잠해졌다.

"아니 그야 당연히 대장군이 억울하지. 그런데 어쩌겠느냐? 학관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면 한림원령 최언위가 회초리를 들고 학생들을 혼내서 일을 바로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고려 조정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허허허. 대장군도 정치를 잘 아는 사람이지만 결국 이리 되는구나."

임희는 태연하게 말했다. 임희도 확실히 난세를 뚫고 살아남은 사람이라 냉정한 면모가 있었다.

'그래 이게 현실이야. 거기다가 미안하지만 유금필이 잠시 실각당하는 게 나에게는 유리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다만 내가 쥐고 있는 왕무의 손에 힘이 쭉 빠지는 게 느껴져서 가슴이 아팠다.

왕무는 새삼 정치의 냉혹함을 실감하며 기가 죽은 것 같았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길게 끌 일도 아니다. 내일이면 아마 대장군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대장군이 이미 버틸 수 없는 상황이다. 대장군은 폐하께서 돌아오시면 혹여나 무슨 방법이 있을까봐 지금까지 버틴거다. 폐하께서 돌아오셔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니 대장군도 포기할 거다. 폐하께서는 선량한 분이니 그냥 대장군을 개경에서 떠나게 하는 걸로 일을 마무리 지으실 거다."

임희가 차분하게 말했다. 내가 들어보니 딱 임희의 말대로 일이 흘러갈 거 같았다.

'다만 왕건이 선량하다고 평한 것은 틀렸고.'

임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벌써 가시게요?"

내가 묻자 임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 끝날 일이라서 대책을 세우고 말고 할 것도 없다. 다만 상심하신 동양원 부인을 위로하기 위해 이야기를 잠깐 나눈 것이지. 연우 네가 동양원 부인을 잘 달래드리거라. 그리고 정윤 전하의 손을 꼭 쥐고 있는 것을 보니 이 아비의 조언을 잘 따르고 있구나. 허허허. 정윤 전하 그럼."

임희는 웃으면서 왕무에게 예를 갖추고 방을 나섰다. 임연객도 꾸물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동안 내가 출세에 도움이 될 줄 알고 대장군과 친한 척 했는데, 나는 괜찮겠지? 따지고 보면 대장군과 서신 좀 주고받고 대화를 나눈 것뿐이야. 연우야. 네가 이 오라비를 잘 보살펴다오. 이젠 혼인까지 했는데. 정윤 전하. 전하께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임연객은 나와 왕무를 보며 그런 당부를 하고 방을 나섰다.

"휴우."

사람들이 나서자마자 왕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려 정치판의 냉혹한 맛을 보고 싱숭생숭한 것 같았다. 왕무가 듬직하긴 해도 아직은 소년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태연하기는 어려웠다.

'겉만 어리지 속은 나이가 든 나와는 달라.'

"전하!"

나는 왕무가 힘을 내라는 의미로 외쳤다.

"동양원 부인께는 죄송스럽게 됐습니다. 대장군의 운명을 생각하니 내 마음도 무겁습니다."

왕무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내가 뭐라 말해야 될지 몰라 말끝을 흐리는데 갑자기 왕무가 나를 확 끌어안았다.

"국선, 나도 힘든데 동양원 부인처럼 위로해주십시오."

그러더니 왕무가 나에게 몸을 기댔다. 육중한 무게감이 나에게 느껴졌다.

"헉."

나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

'교동도에 다녀온 뒤부터 왕무가 왠지 과감해진 것 같아. 어쩌지?'

나는 내 품에 안긴 왕무를 바라보았다. 내가 밀어내면 왕무는 그대로 밀려날 것이다. 그런데 대뜸 왕무를 밀어내는 것도 답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어찌해야 할 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다만 내 품에 안긴 왕무의 등이 쓸쓸해보였다.

'왕무는 실제 역사에서 유금필이 당한 것 같은 억울한 일을 수도 없이 겪게 된다. 내가 역사를 바꾸기 위해 뛰고 있지만 잘 될지는……'

그런 생각을 하니 왕무를 차마 밀어낼 수 없었다.

'그래. 동양원 부인한테 해준 위로를 왕무에게 안 해주는 건 너무 불공평해! 친한 친구사이에도 할 수 있는 거잖아.'

나는 손을 들어 왕무의 등을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다음날 나는 졸린 눈으로 한림원에 나왔다.

'어제는 너무 늦게 잤어. 아버님과 대화를 나누고 왕무를 위로해주고 하다보니 어느덧 새벽이라서.'

왕건도 아직 한림원에 안 나와 있었다. 어전에서 일처리 할 것이 많은 모양이었다. 나는 하품을 하며 아무 일도 안 하고 한림원의 내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니 왕건이 들어왔다.

그리고 왕건은 들어오자마자 짐짓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서라벌을 둘러보는 사이에 난리가 났군. 유금필이 오늘 스스로 벼슬을 내놓고 곡도로 떠나기로 했다. 내가 굳이 섬으로 갈 필요가 없고 고향에 내려가 있으라고 해도 곡도로 간다고 해서. 참. 내가 서라벌 구경에 정신이 팔려서……"

왕건이 한림원 학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말투가 매우 딱딱하고 어색했다.

'이건 뭐 부조리극의 한 장면이야? 묻는 사람도 없는데 왜 저래?'

학사들도 모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있는데 대내학사 김악이 나섰다.

"유금필 장군이 유배를 떠나게 되다니 안타깝긴 합니다. 폐하께서 그러면 지금이라도 결단을……"

"어허, 김악! 왜 말을 함부로 해! 유배라니? 그냥 잠깐 섬에 내려가 쉬고 오겠다는 사람을 가지고 그런 말을 하다니."

왕건이 얼굴까지 붉히면서 호통을 쳤다.

"잘못했습니다."

김악은 재빨리 목을 움츠리며 물러났다.

"연우야. 이리 좀 와 보거라."

그러더니 왕건은 나를 향해 손짓을 했다.

"예, 폐하."

내가 다가오자 왕건이 가볍게 나를 타박했다.

"내가 입을 열면 며느리인 연우 네가 먼저 와야지 왜 김악이 헛소리를 하게 만드느냐? 응?"

"송구합니다. 폐하. 어쨌든 대장군의 일로 근심이 많으신 거 같은데, 대장군을 구하기 위해 뭔가 일을 터뜨려 볼까요?"

나는 나를 타박하는 왕건을 보고 울화가 터져서 짐짓 순진한 척 그리 말했다. 내가 그러자마자 왕건은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연우 너 피곤하지 않니? 젊었을 때 너무 머리를 많이 쓰면 몸이 축난다. 연우 너도 좀 쉬어야지."

갑자기 친절해진 왕건이 나를 살피는 척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르신 것인지."

"그래. 연우 네가 동양원 부인과 친하지? 그러니 동양원 부인을 잘 보살펴라. 응! 동양원 부인이 울면서 내 처소에 달려오거나 하는 사태를 막으란 말이야. 유금필은 유배가 아니라 그냥 좀 쉬러 간 거야. 그걸 동양원 부인에게 잘 말해줘. 동양원 부인이 나한테 오면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상상만 해도 난감하구나."

왕건이 나에게 그런 지시를 내렸다.

왕건의 통찰력이 대단하긴 했다. 확실히 오늘 아침에 동양원 부인은 왕건에게 직접 달려갈 궁리를 했다.

'이 나쁜……'

이런 일까지 나에게 시키는 왕건을 보고 열이 좀 받긴 했으나 나는 겉으로 티를 안 내려고 애썼다.

아직은 왕건의 신임을 받아야 했다.

"동양원 부인은 너만 믿는다. 연우야. 음 그리고 유금필도 좀 안심시켜야 하는데. 한림원령도 이리 와 봐."

왕건은 최언위를 불렀다.

"예, 폐하."

최언위도 재빨리 달려왔다.

"연우야. 한림원령과 같이 지금 유금필의 집에 좀 가거라. 연우 너는 내 며느리고 한림원령은 내가 매일 보는 사이니 내 측근이라 할 만하다. 유금필에게 곡도에서 안심하고 쉬다오라고 해라. 통일이 되면 유금필을 불러 고창에서의 공을 치하할거야. 내년쯤 되면 통일이 될 거고 유금필도 개경에 올 수 있을 거다. 지금은 유금필도 좀 쉬는 게 더 좋아. 어쨌든 괜히 유금필이 불안해 할까봐 걱정되니 두 사람이 확실히 달래주고 와."

왕건은 그런 명을 내렸다. 왕건이 유금필을 잠시 유배보내긴 했어도 제거할 마음은 없어보였다. 그래서 나와 최언위를 보내는 것이다.

'좋아. 잘 됐다. 자연스럽게 유금필을 만날 수 있겠군.'

나와 최언위는 왕건의 명을 받고 한림원을 나섰다. 한림원 밖에서 나는 최언위에게 말했다.

"나주원에서 가져올 것이 있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정윤비 마마.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최언위의 대답을 듣고 나는 재빨리 궁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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