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10화
110. 토사구팽
신라조정에서는 왕건과 우리 일행을 임해전에 초대했다.
“이곳이 바로 문무왕께서 지으신 그 임해전입니까?”
왕건은 고사에 상당히 밝아서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신라왕 김부는 그리 대답했다. 왕건은 찬찬히 임해전을 둘러보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는 아무 탈 없이 순조롭게 이어졌다.
‘왕건은 겉으로 보이는 예의는 엄청 잘 지키니.’
나는 김부에게 예를 갖추며 정중하게 대화를 나누는 왕건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왕건을 따라온 고려 신하들도 조심스레 술을 받았다.
‘애초에 일개 군졸도 실수를 하면 안 된다고 왕건이 신신당부를 했어. 여러 신하들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지.’
나도 혹시 무슨 실수를 할까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면서 몇몇 신라 인물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김부 바로 아래에는 신라 태자가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왕무보다 좀 더 나이가 많은 청년이었다.
‘저 사람이 끝까지 신라의 항복을 반대했던 마의태자인가?’
물론 이 연회자리에서는 마의태자도 웃는 얼굴이었다. 외국 사람들이 와 있으니 그 앞에서는 예를 철저히 갖추는 것 같았다.
‘뭐 마의태자나 항복에 반대하는 신라 왕족들도 나중에 다 쓸모가 있지.’
나는 내가 가진 정보를 토대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러던 와중에 왕건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나는 신라 국왕 폐하와 함께 임해전 옆에 있는 월지를 둘러볼 것이니 그대들은 따라오지 말라. 허허허, 여기까지 왔으니 문무왕이 만드신 호수를 한번 둘러봐야지.”
그러더니 왕건은 김부와 단 둘이 월지 근처까지 갔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연히 그 목소리가 임해전에선 들리지 않았다.
‘고려왕과 신라왕이 단 둘이서 밀담을 나누다니. 뭐야? 무슨 내용이야? 그 내용을 알아내서 현대에 전한다면 학계가 발칵 뒤집힐 텐데.’
나는 목을 쭉 빼고 월지 근처를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왕건과 김부를 바라보았다.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도 온 신경을 그쪽에 쏟는 것 같았다.
연회 분위기는 급격하게 식어갔다.
왕건과 김부는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왔다.
“이거 원 벌써 술자리가 끝났습니다. 허허 그럼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습니다.”
왕건이 김부를 보고 말했다.
“이미 처소를 마련해 놨습니다.”
김부가 왕건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리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신라 시종들이 우리를 객사로 안내했다.
객사로 가는 길에 나는 재빨리 왕건 곁으로 다가갔다.
“어 연우야. 왜 그러느냐?”
왕건이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일전에 제가 폐하께 삼장법사 마후라 대사에게 받은 주머니 속도 보여드렸습니다. 헤헤. 저도 방금 전에 폐하께서 신라왕과 나누신 대화가 궁금해서……. 무슨 일을 논하셨습니까?”
나는 갑자기 탐구욕이 솟아올라서 이렇게 나섰다.
‘왕건이 마후라의 주머니 일로 나에게 빚을 졌으니 내 부탁을 거절하진 못할 거다. 자세한 건 못 들어도 대강 알려주긴 하겠지. 역사적인 대발견을 하겠어. 이걸 알아내면 왕무에게도 좀 유리하지 않을까?’
그런데 왕건은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걸 알려주는 건 나에게 너무 불공평한 일이다.”
“예?”
내가 당황해서 반문했다.
“마후라 대사의 주머니 속 내용은 솔직히 진짜 별 거 아니었다. 이미 입적하신 마후라 대사께 죄송스럽긴 하지만 뻔한 내용이었어. 뭐 마후라 대사가 내가 그 내용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화를 피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별로 그럴 것 같지가 않구나. 그런데 방금 전에 나는 진짜 중요한 얘기를 나눴다. 별거 아닌 비밀을 받고 중요한 비밀을 내주는 건 나에게 너무 불리해.”
왕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내가 미련이 남아서 중얼거리는데 왕건은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비밀이 생기면 그건 말해주마.”
그러더니 왕건은 재빨리 나를 떼어놓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국선.”
멍하니 서 있는 내 곁에 왕무가 다가와서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저, 전하.”
그 덕에 나는 겨우 부글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고 내 처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 * *
첫날 연회가 끝나고 왕건의 서라벌 체류는 수십 일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대내학사 김악이 나와 왕무를 찾아와서 말했다.
“전하. 아무래도 우리가 너무 오래 서라벌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요?”
“음, 그렇긴 합니다.”
왕무도 김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윤 전하와 정윤비 마마께서 폐하께 말씀을 한번 올리시는 것이…….”
김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도 왕건이 너무 오래 서라벌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나도 처음에는 신이 났어.’
신라 조정의 환대를 받은 다음날 나는 따로 황룡사를 방문했다. 그리고 황룡사 스님들의 안내를 받아 9층탑을 살폈다.
‘대강 외부 형태와 내부 구조에 대해 그림을 그려놨다.’
물론 나는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림을 잘 그리진 못했다. 그래도 이게 후세에 전해지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전문 화공을 동반해 그림을 많이 그려놔야지. 그래도 지금 내가 틈틈이 대략의 자료는 만들어놔야 좋아.’
그 생각에 처음 며칠은 나도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요긴한 자료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내가 대강의 작업을 마쳐도 왕건은 서라벌을 떠날 기미가 안 보였다.
‘이거 참. 남의 집에 이리 오래 머물러 있다니 민망하다.’
왕건이 머물러 있으니 신라 조정은 자주 연회를 열고 식비를 대고 있었다.
물론 왕건이 기병을 50기만 거느리고 들어와서 신라 조정에 큰 부담은 아닐 것 같았다. 그래도 체류가 길어지니 당혹스럽긴 했다.
“알겠습니다. 폐하께 말씀을 한번 올려보겠습니다.”
왕무가 김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와 왕무는 왕건의 처소를 향해 나아갔다.
“전하. 폐하께는 제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왕무에게 말했다. 빨리 가자고 말하다가 혹여 왕건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었다. 왕무가 왕건 눈 밖에 날까 봐 대신 내가 나서기로 했다.
“국선의 뜻대로 하십시오.”
왕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건의 처소에 들어가니 소란스러웠다. 딸들에게 둘러싸인 왕건이 외쳤다.
“오늘은 분황사에 소풍이나 가자!”
“와아아아!”
왕건을 따라온 공주들이 환성을 질렀다. 오지수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왕건이 흐뭇하게 그 광경을 바라봤다.
‘이거 좀 어렵겠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왕건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폐하. 우리가 너무 오래 서라벌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
뜻밖에도 왕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경호 문제도 있습니다. 어쨌든 서라벌 내에 폐하께서 이리 오래 머물러 계시면 무슨 일이 터질지.”
내가 왕건의 충신인 것마냥 경호 문제를 꺼내는데 왕건이 손을 내저었다.
“무슨 일이 터질 거면 진작 터졌지. 한참을 머물러 있어도 여태 괜찮지 않니? 내가 서라벌에 또 오기도 어려워서, 이번에 보고 싶은 걸 다 보고 가려 한다.”
“하하하.”
나는 내가 계속 떠나자고 권해봤자 소용이 없을 거 같아 웃으며 물러나려 했다. 그런데 왕건이 불쑥 말했다.
“그래도 너무 오래 머물러 있다는 너희 말도 맞다. 한 3일만 더 있다가 떠나자. 김악이 너희들에게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지? 김악의 표정은 내가 다 간파하고 있어. 김악은 생각을 못 숨기니. 내일 분황사에서 김악 요 녀석을 좀 골탕 먹여줘야겠다. 흐흐흐.”
“분황사에 잘 다녀오십시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왕무와 함께 물러났다. 어쨌든 안 될 거라 생각했는데 3일 뒤에는 떠난다는 왕건의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다만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왕건은 김악의 표정을 읽을 정도로 눈치가 비상하다. 그런 사람이 왜 굳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시간을 끌었을까?’
* * *
그리고 3일 뒤 약속대로 왕건은 서라벌을 떠났다. 왕건은 개경으로 돌아갈 때도 느릿느릿 움직였다.
돌아오는 길에 이제는 완전히 고려에 복속한 사벌주의 호족들도 다 만났다. 재암성주 선필, 안동의 삼태사도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일행은 겨우 개경에 돌아왔다. 나와 왕무, 오지수는 함께 나란히 나주원으로 향했다.
‘에구구. 좀 쉬어야겠다. 내일 한림원에 가려면 푹 쉬어야 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주 왕후에게 인사를 하러 갔는데 나주 왕후의 얼굴색이 심상치 않았다.
“연우야. 피곤하겠지만 동양원에 한 번 들렀다가 오너라. 연우 네가 없는 동안 동양원 부인이 너를 찾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곳에 찾아왔다. 지금 상황이…….”
나주 왕후가 다급하게 입을 여는데 시녀가 들어와서 외쳤다.
“동양원 부인이 정윤비 마마께서 오셨다는 소식에 달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동양원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예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은 초췌해져 있고 눈매도 슬퍼 보였다.
“부인!”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벌떡 일어나서 동양원 부인에게 다가갔다. 동양원 부인은 그대로 나를 껴안았다. 그리고 동양원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아버님이, 아버님이 지금 위험해요. 그런데 폐하도 안 계시고, 연우 아가씨도 없고. 연우 아가씨는 매일 한림원에 나가니까 폐하께 말씀을 좀 올려주세요. 우리 아버님이 억울하다고.”
동양원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때쯤 유금필이 잠시 숙청되나?’
다만 유금필이 유배를 떠나는 것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상황은 나도 몰랐다.
“부인. 무슨 일인지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나는 동양원 부인을 껴안고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
“패서, 패서 사람들이…….”
동양원 부인은 우느라 말을 제대로 못 이었다.
“유긍달, 황보제공, 강기주 같은 분들과 유금필 대장군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
나주 왕후가 곁에서 말을 거들었다. 다만 나주 왕후도 그 구체적 사정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때 시녀가 달려와서 말했다.
“병부낭중이 정윤비 마마를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서둘러 모셔라.”
왕무가 외쳤다. 아무래도 우리가 개경에 없는 사이 큰일이 터진 것 같았다. 병부에서 일하는 임연객이 달려왔으니 사정을 확실히 물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급한 표정으로 들어선 임연객이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유금필 대장군이 군을 다스림에 있어 군율을 가혹하게 적용한다고 여러 호족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자기들이 고려를 위해 보낸 사병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거야. 또한 유금필 대장군이 교만하다고 물러나야 한다고 하고 있다. 원래는 일이 터지자마자 서신을 보내서 알리려고 했는데 아버님이 그러지 말라고 하셔서…….”
임연객의 말을 듣고 동양원 부인은 내 품속에서 통곡했다.
“무슨 그런 이유로?”
임연객의 말을 들은 왕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 호족들이 이제는 삼한이 거의 통일됐으니 유금필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날려 버리려고 하고 있네. 하긴 고창 전투 직후 상황을 보면 호족들이 유금필을 그리 두려워했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나는 정국이 요동칠 거라 예견한 임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태연한 표정으로 서라벌을 구경하던 왕건의 얼굴도 떠올렸다.
‘아버님이 예견한 일을 눈치 빠른 왕건이 모를 리는 없어. 결국 왕건 본인은 모른 척하려고 서라벌에 머물며 시간을 끌었구나. 자기가 없을 때 유금필을 처리하라고.’
나는 이미 예전에 왕무와의 결혼을 파토 내려 할 때 유긍달, 황보제공 등의 여론조작 능력을 실감한 바 있었다.
그 사람들이 일제히 유금필을 치기로 마음먹고 움직이니 개경이 난리가 난 것이다.
“동양원 부인. 좀 진정하세요.”
나는 내 품속에서 흐느끼는 동양원 부인의 등을 두드려 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