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09화
109. 서라벌
어수선한 가운데 임연객의 혼례식도 열렸다. 나와 왕무 역시 옷을 차려입고 혼인식에 참석했다. 고려의 이름난 호족들이 대부분 참석하거나 선물을 보내왔다.
정윤비의 오라버니가 혼인을 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유긍달, 황보제공도 직접 오지는 않았지만 집안 사람을 시켜 선물을 보냈다.
그리고 이 혼례는 자연스럽게 내가 아버님과 정윤파 사람들과 만날 기회를 제공했다.
‘왕건의 서라벌행이 결정되었으니 이제는 의논을 좀 해야지. 따로 사람들을 모으면 세상 눈에 띄니.’
혼례식이며 연회가 끝나고 상산저의 한 방에서 정윤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모였다.
나와 왕무, 집주인인 임희, 배현경, 박술희 등이었다. 역시 왕무의 기반이 군부인 만큼, 군부의 장수들이 많이 와 있었다. 하나같이 표정이 심각했다.
우적우적.
물론 그 사이에서 박술희는 자기가 직접 가져온 곤충 튀김을 먹고 있었다.
‘참 남의 결혼식에 와서도.’
그래서 나는 박술희에게 물었다.
“장군이 드시는 수많은 곤충들은 대체 누가 그리 잡는 것입니까?”
“제가 구합니다. 혹여 전장에서 군량이 끊긴 상황이 발생해도 저는 걱정이 없습니다. 밖에서 이런 것들을 구해 먹으면 됩니다. 그 연습도 할 겸 평시에도 제가 먹을 것들을 찾습니다. 하하하. 제 솜씨를 따라올 자가 없습니다.”
박술희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며느리인 배수현에게 시키지는 않는가 보군. 수현아 잘 살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박술희가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도 한번 드시고 싶어서 물으신 것입니까? 그러면 제가 잔뜩 잡아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당황해서 손까지 휘저으며 말했다. 나와 박술희 사이의 잡담이 끝나자마자 임희가 입을 열었다.
“자 그 얘긴 이제 그만하고 지금 중요한 사안은 폐하께서 서라벌을 방문하는 일이오. 이게 보통 일이 아니고 이후엔 정국이 요동칠 것입니다.”
임희가 예리하게 말했다. 나도 좀 놀랐다.
‘역시 아버님도 오래 정치를 하셔서 통찰력이 있군. 정국이 요동칠 것을 예상하시다니. 그래 지금이 931년 1월이고 2월에 아마 왕건이 서라벌에 갈 거고. 이후에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지.’
“상산백의 말씀대로요. 신라가 항복하면 사실상 삼한이 통일되는 것인데 유긍달이 최대의 공을 세우며 전쟁이 마무리되겠습니다.”
배현경도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백제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내가 물었다.
“그러나 신라가 항복하면 백제도 그냥 무너질 것입니다.”
배현경이 그리 분석했다.
‘하긴 실제 역사에서도 어쨌든 신라가 완전히 항복하고 다음 해에 삼한통일이 되긴 하군. 신라가 완전히 항복하는 게 935년, 삼한이 통일되는 게 936년이다. 아직은 시간이 있어.’
다만 임희와 배현경은 왕건의 서라벌 방문 때문에 올해나 내년쯤에 삼한이 통일될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신라가 항복하겠다는 말을 꺼냈으니 그리 오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어허. 이거 참.”
임희도 연신 혀를 찼다. 정윤파에게는 참 난감한 상황이었다.
‘신라가 좀 더 버틸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줄 수도 없고. 아직 5년 정도는 시간이 있는데.’
다만 이때 왕건은 신라가 항복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요사이 이 일에 전력을 다 기울이고 있었다.
괜히 내가 신라가 버틴다고 입방정을 떤 것이 새어나가면 왕건이 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에 관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장내에는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왕건이 서라벌을 방문하고 유긍달이 공을 세우는 것에 대해 별 대책이 없었다.
그러다가 배현경, 박술희 등이 모두 임희를 바라봤다. 임희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상산백.”
그러나 배현경이 간곡하게 외치자 마침내 결단을 내린 임희가 입을 열었다.
“정윤 전하. 지금 우리들 처지가 많이 난감합니다. 다만 한 가지 희망은 충주원의 태자들이 어리다는 것뿐입니다. 충주원의 왕요 태자가 아직 9살입니다. 이에 반해 정윤 전하께서는 장성하셨고 전장에서 여러 공을 세웠습니다. 거기에 더해 정윤 전하께서 후계를 얻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손자나 손녀를 안겨드리면, 폐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더니 임희는 나와 왕무를 번갈아 바라봤다.
“…….”
왕무는 별 반응 없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전하께서 혼인을 한 지도 꽤 시일이 지났는데 아직 소식이 없으니…… 참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이 일도 좀 힘을 써주십시오. 생각해 보면 전하께서 군영의 일을 돌보느라 너무 바쁘십니다.”
임희가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아내며 말했다. 왕건의 서라벌 방문 소식을 듣고 정윤파 사람들이 떠올린 방책이 이것인 거 같았다.
다만 다른 장수들이 말하긴 민망하니 가족인 임희가 나선 것이다.
‘어쩌지? 결국 이런 일이. 그러나 아버님과 장수들의 말이 틀렸다고 볼 수는 없어.’
나는 임희의 말을 듣고 가슴이 갑갑해졌다. 나로서는 진짜 답이 없는 문제였다.
“그대들의 뜻은 잘 알았다. 내가 그대들의 진언을 깊이 생각해서 움직이겠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라. 어쨌든 신라가 항복해 오는 것은 우리 고려에 이로운 일이다. 이런 경사를 두고 근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왕무가 위엄 있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장내에 모인 임희와 장수들은 모두 예를 갖추며 답했다. 이후에도 왕무와 정윤파 인사들은 앞으로 정세에 대해 논했다.
다만 나는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기억이 안 났다.
‘어쩌지? 아, 이건 진짜 대책이.’
어쨌든 꽤 긴 회의를 마치고 나와 왕무는 상산저를 떠났다. 내가 수레에 오르려는데 왕무가 자연스레 내 등허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받쳐줬다.
‘헉. 생각해 보니 요 근래 내가 수레에 탈 때마다 왕무가 나를 이렇게 도왔군. 어느 틈에 이렇게 자연스럽게 됐어.’
상산저로 올 때도 왕무가 이랬다. 그런데 나는 그걸 의식조차 못 하고 받아들였다. 다만 방금 임희가 한 말 때문에 나는 새삼 이걸 의식하게 됐다.
왕무는 태연한 표정으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수레는 궁궐 쪽으로 향했다.
두근두근.
나는 심장이 뛰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은 뭔 일이 날 것 같아. 아버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 아버님은 왜 그러시는지. 하긴 그런 진언을 안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잖아.’
-상산백, 아니 장인어른이 그리 애원하시는데 어쩔 수 없잖아.
왕무가 침실에서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는 사이 나와 왕무가 탄 수레는 궁에 당도했다.
왕무는 수레에서 먼저 내려서 자연스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고 편하게 내리라는 것이었다.
여태 도움을 자연스레 받아놓고 이제 와서 거부하는 것은 너무 어색했다. 나는 왕무의 손을 잡고 수레에서 내렸다.
그리고 나주원의 우리 처소에 함께 들었다. 평소처럼 각자의 침상에 누웠는데 나는 계속 불안했다.
그리고 왕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국선.”
“예, 전하.”
내가 긴장해서 대답했다.
“상산백 아니 장인어른이…….”
“헉.”
나는 왕무의 말을 듣고 순간 화들짝 놀랐다. 임희 이야기를 하는 왕무를 보니 무슨 결단을 내린 것 같았다.
“국선 왜 그러십니까?”
왕무가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그냥 좀 놀라서.”
나는 몸을 일으킨 왕무를 보며 침을 삼켰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내 침상으로 다가오는 건가?’
그런데 왕무는 도로 자신의 침상에 누웠다.
“장인어른은 신중한 성격이시라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십니다. 국선이 장인어른의 말씀에 너무 신경쓸까 봐 걱정입니다. 나는 지금 정말 좋습니다.”
왕무는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저, 전하.”
나는 놀라서 왕무를 바라봤다. 나는 웃는 왕무의 얼굴을 보고 문득 청순하다는 표현이 떠올랐다.
‘청순. 진짜 왕무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야.’
“정말 예전의 내 처지에 비하면 지금 너무 행복합니다. 국선이 항상 내 곁에 있고 장인어른도 계시고 격구단에도 조언을 건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폐하도 계십니다. 앞으로의 일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왕무가 자기 침상에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 전하.”
나는 왕무를 보며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왕무는 이불을 덮더니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잠들었다.
* * *
한 달 뒤 서라벌 외곽.
“아니 군사들을 왜 이리 배치시켜 놨어?”
왕건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말했다.
“폐하의 명대로 정병 5천을 가려 뽑아 서라벌의 사방을 포위했습니다. 이쪽 길은 소장이 거느린 1천 명이 막고 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박수경이 약간 당황해서 물었다.
“모양새가 안 좋잖아! 혹여 외곽까지 나온 서라벌 사람들이 군사들을 보면 우리 고려가 신라를 압박하는 것 같아. 군졸 한 30명을 뽑아서 갑옷을 벗고 평상복을 입게 해. 그리고, 음 그래 빗자루질을 해. 누가 물으면 청소를 한다고 대답하고.”
왕건이 그런 지시를 내렸다. 왕건의 명대로 군사들 30명이 평상복을 입고 길에서 비질을 했다. 먼지가 일어나며 뒤에 대기하고 있던 1천 명의 군사들이 얼추 가려지긴…….
‘아니, 먼지를 일으켜 봤자 군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걸 모를 리가 있나? 깃발도 보이는데.’
옆에서 왕건을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2월에 신라에서 항복한다고 하며 왕건을 초청하자마자 왕건은 즉시 나와 왕무, 공주들, 군사들을 거느리고 서라벌로 향했다.
유긍달로부터 말을 들은 이후 왕건은 서라벌에 갈 준비만 했기에 이 일은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왕건이 기병 50기를 거느리고 서라벌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최종 점검을 하는 중이었다.
“좋아. 군사들이 안 보이는군. 군졸들을 교대해 가며 계속 빗자루질을 해.”
그런데 왕건은 너무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군사들이 어떻게 안 보일 수가 있어? 왕무가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해. 폐하도 계십니다라고 한 거 보면 왕무는 왕건을 믿는 거 같은데…….’
문득 나는 그런 결심을 했다.
“예, 폐하.”
박수경이 군례를 올렸다.
“서라벌 안에서 뭔 일이 터지면 내가 연을 띄울 테니 바로 나를 구하러 들어오라고.”
왕건이 자기 안전을 위해 그리 신신당부를 했다.
“예, 폐하. 그리고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신라는 무장을 해제했습니다. 서라벌 내에 지금 신라군이 없습니다. 신라의 병기들도 지금 고려 군영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박수경이 말했다.
“그럼 가자.”
최종 점검을 마친 왕건이 명을 내렸다. 나와 왕무를 비롯한 공주들.
그리고 왕건의 비서 노릇을 할 학사들은 기병 50기의 호위를 받으며 서라벌에 진입했다.
“와아아아. 고려 폐하 만세!”
서라벌 주민들도 길에 나와 환성을 지르며 우리를 맞이했다. 왕건은 기뻐하며 중간중간 서라벌 백성들과 대화도 나누었다.
“사악한 견훤과 달리 고려국 폐하께서 오시니 아버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한 노인이 왕건에게 절을 하며 말했다.
“오오, 일개 백성마저도 이런 말을.”
왕건이 감격해서 부르짖었다.
‘보통 백성이 아닌 거 같은데. 피부도 좋고 옷도 깔끔하고. 신라에서 한 5두품, 6두품을 동원해서 백성인 양 꾸민 거 같은데.’
나는 수레 안에서 그 광경을 보며 그런 분석을 했다.
“김악아. 빨리 오너라. 와서 여기 이 노인장의 말씀을 받아적어라.”
왕건이 재빨리 여기까지 데리고 온 대내학사 김악에게 명을 내렸다.
“예, 폐하. 노인장 다시 한번 말해보쇼. 사악한 견훤이라고?”
붓과 공책을 든 김악이 노인에게 달려왔다.
“예 그리고 고려국 폐하는 아버님.”
서라벌 노인이 또박또박 반복해서 말해줬다. 김악이 야외라서 글을 쓰기 힘든데도 열심히 그 말을 받아적었다.
“얘들아 여기 선물 드려.”
다 받아 적은 김악이 군졸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군졸들이 찻잎과 곡식이 든 상자 하나를 노인에게 건넸다. 노인은 기뻐하며 다시 절을 했다.
“김악아. 이 말도 좀 적어.”
왕건이 행렬의 선두에서 또 외쳤다. 왕건은 서라벌에 방문하자 매우 흥분한 기색이었다.
사실 서라벌에 오니 나도 흥분되고 좋았다. 볼거리가 너무 많았다. 수레 위에서 나는 연신 사방을 살폈다.
‘으 저기 황룡사 9층탑의 모습이 보인다. 저게 정말 있는 거구나. 사진이라도 찍어서 현대에 보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