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08화
108. 평정
외척들이 왕건에게 아부를 하는 사이 구정에서는 격구경기가 시작됐다.
“이젠 격구나 봐야겠군.”
왕건의 그 한마디에 외척들은 입을 모두 다물었다. 한동안 경기를 보던 왕건이 다시 혀를 찼다.
“저걸 봐. 아니 저걸 왜 저렇게 처리했어?”
그러자 황보제공이 말했다.
“요새 아이들은 팔 힘이 약해서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왕건이 못마땅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말들은 비룡성에서 전문적으로 훈련시킨 것들이라 훌륭합니다.”
박수경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맞는 말이야. 지금이야 비룡성이 그나마 제대로 굴러가지. 나 참. 옛날에는 주먹구구식으로 군마를 키웠어. 내가 비룡성을 그럭저럭 수습한 거야.”
왕건이 그런 식으로 허풍을 쳤다.
“요즘 선수들이 그나마 부족한 실력에도 말 덕분에 격구를 할 수 있습니다. 모두 폐하의 은혜입니다.”
가만히 있다가 임명필도 그렇게 치고 들어갔다.
“하하하. 정말 내가 젊었을 때 이랬으면 좋았을 것을.”
왕건이 흡족한 듯 웃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몹시 초조했다.
‘나도 빨리 왕건이랑 친한 척을 해야 하는데. 아 이래서 아버님이 격구단주로 와야 했어.’
격구경기를 보고 있는 만큼 격구나 말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는데, 나는 그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왕건과 다른 외척들이 웃으며 떠드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친한 척을 해야 하는데. 아 모르겠다. 다음에 준비를 더 잘하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유천궁은 미소만 지으면서 왕건과 외척들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 부럽다. 나도 안전만 확보되면 유천궁처럼 구경이나 하고 싶어.’
뿐만 아니라 유긍달 역시 고고하게 앉아 있었다. 굳이 무리해서 왕건에게 아부를 하려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속셈일까? 어쨌든 유긍달이 안 움직이니 뭐. 나도 이번에는 그냥 가만 있어도 되겠지.’
나는 임연객으로부터 유긍달도 격구를 그리 즐기지는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돈이 그리 많은 사람이 격구단에는 큰돈을 안 써서 격구단은 고만고만한 수준이야. 진짜 딱 기병을 좀 거느리려고 구색만 갖춰서 격구단을 만들었어.
그러니 이 자리에서도 그냥 조용히 있는 것이다. 이외에 좌승 함규도 별말이 없었다.
그사이 누각 위로 시종 하나가 조심스럽게 올라왔다. 그러더니 왕건에게 말했다.
“잡찬의 저택에서 급히 전해야 할 소식이 있다고 사람이 왔습니다.”
“여기까지 사람이 찾아왔으면 급한 일인가 보다. 잡찬은 일을 보도록. 급한 일이면 오늘은 집에 가 봐.”
왕건이 뚫어져라 구정에서 벌어지는 격구 경기를 보면서 그리 말했다.
“예 폐하.”
유긍달은 고개를 숙이더니 누각에서 내려갔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럴까? 어쨌든 부럽다. 격구 경기 다 안 보고 집에 갈 수 있어서.’
나는 여러모로 일이 안 풀리기도 해서 그냥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왕무가 요새 일이 없어서 집에 자주 들어오지. 그냥 잠깐 얘기라도 하다가 잠이나 푹 잤으면 좋겠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유긍달이 다시 누각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 사람은 집에 안 가고 굳이 또 돌아오네. 에잇 나도 딴생각할 게 아니라 자리를 끝까지 지켜야지.’
자리에 앉는 유긍달을 바라보며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이오? 혹여 급한 일이라도 터진 것은?”
유긍달과 친한 황보제공이 약간 걱정스럽게 물었다. 사실 왕과 함께 격구경기를 보고 있는데 소식을 전하러 온다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이긴 했다.
나는 귀를 기울여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좋은 일이오.”
유긍달은 웃으면서 답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
어쨌든 그 이후부터는 별일 없이 격구 경기가 무사히 끝났다. 경기 결과는 박수경이 만든 평주 격구단의 승리였다.
확실히 무장 출신 외척들은 격구 경기에 꽤 몰입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런 망신이 있나? 내가 얼마나 당부를 했는데.”
자신이 만든 격구단이 패하자 황보제공이 중얼거렸다. 기분이 몹시 나빠 보였다.
“자 모두 술이나 먹자. 연회를 미리 준비해 놨다. 허허허.”
왕건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거기까지 내가 따라가야 하나? 가봤자 나는 할 얘기도 없는데.’
그런데 안 가면 또 왕건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나는 군말 없이 연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때 유긍달이 왕건 가까이 오더니 말했다.
“폐하, 폐하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말씀드리려다가 격구경기를 보는 폐하의 흥이 깨질까 봐 여태 기다렸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왕건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신라가 평정된 것 같습니다.”
유긍달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듣자마자 외척들은 크게 동요했다. 여태 신선처럼 행동하던 유천궁마저 표정이 흔들렸다.
나도 순간 깜짝 놀랐다. 그러다가 곧 무언가를 떠올리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흥, 뭐 평정됐다고 믿으면 기분은 좋겠지. 내가 미래 지식이 없었으면 이 소리를 듣고 당황하긴 했을 거야.’
왕건도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그럼 방금 전에 잡찬의 집에서 그 소식을 전한 건가? 그러면 격구고 뭐고 빨리 말을 했어야지. 자 모두 우선 안에 들어가자.”
왕건이 바쁘게 움직였다. 누각에서 긴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 진지한 논의를 해보려는 것 같았다.
유긍달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왕건의 뒤를 따랐다.
다른 외척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다. 한참 격구 얘기를 하며 왕건의 비위를 맞췄는데 유긍달의 한방에 의미가 없어졌다.
그러나 나는 유긍달이 오히려 고마웠다.
‘연회 자리에서 지겨운 격구 얘기를 안 할 것 같아 다행이야.’
* * *
“제가 충주의 진골 인맥을 통해 알아본 결과 신라왕은 우리에게 굴복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하는 신라 중신들이 많아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간곡히 권하고 선필 공도 애를 많이 써서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유긍달이 왕건 앞에서 차분하게 말했다.
“아니 그래서 언제 항복하는데? 기한을 정하지 않고 말만 그러면 소용이 없어.”
왕건이 초조하게 말했다.
“내년 1월, 2월쯤에 서라벌에서 사람이 올 것입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유긍달이 말했다.
“잡찬이 그리 말하면 확실히 오겠군. 어허. 내년 1, 2월이면 금방인데. 그래 2월, 2월에 오라고 해. 1월이면 너무 촉박해.”
왕건이 그런 명을 내렸다. 오늘이 팔관회 날로 11월 15일이었다. 내년 2월도 사실 큰일을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 말을 듣는 여러 외척들의 표정은 더 우울해졌다. 이러면 유긍달과 충주가 일통삼한 과정에서 최대의 공을 세우는 것이고, 차기 왕위계승 경쟁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나도 좀 떨떠름하긴 했다.
‘나는 재암성주 선필이 우리 쪽과 인연이 있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서라벌에 대한 공작을 하며 선필이 유긍달과도 인연을 맺었어. 유긍달이 선필을 챙기는 것을 보니 심상치 않아.’
다만 나는 신라의 항복 소식 자체는 걱정하지 않았다.
‘유긍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신라가 유긍달의 말처럼 움직이긴 할 것이다. 다만 서라벌 진골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약속을 바로 지키겠어?’
역사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알지만 신라는 왕건의 삼한통일 직전에야 완벽하게 항복한다.
‘역사서를 보면 신라가 시간을 얼마나 끌었는데. 유긍달도 아마 앞으로 몇 년간 마음고생을 많이 할걸. 아직 시간은 있다. 향후 몇 년간 미래 역사의 흐름을 아는 내가 잘 움직이면 된다. 더 큰 공을 세울 수도 있어.’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번에 신라왕이 폐하를 서라벌로 초청할 것입니다. 폐하께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서라벌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러기로 말을 다 해놨습니다.”
유긍달이 기세등등하게 말을 이었다.
“좋다.”
왕건은 흥분해서 외쳤다. 왕건이 신라의 동의를 받고 고려군을 이끌고 서라벌로 들어가면 상징하는 바가 컸다.
“기병 1천 기 정도를 이끌고 서라벌에 들어가십시오. 그 이상이면 신라를 핍박하는 느낌이 드니 1천 기 정도만.”
유긍달이 조심스레 권했다.
“그럴 순 없다. 50기, 그래 50기만 거느리고 서라벌에 들어가야겠다.”
왕건이 불쑥 내뱉었다.
“예?”
유긍달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른 외척들도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폐하, 신라가 항복하기로 했지만 50기는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황보제공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신라가 거의 망해가긴 해도 서라벌에 자체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냥 중소호족의 세력권에 들어가도 호위 50기만 거느리면 찜찜할 텐데 왕건이 저러는 것이다.
나는 미래에서 와서 왕건이 50기만 거느리고 서라벌에 들어가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이 시대에 와서 직접 경험해 보니 단순히 아는 것과 느낌이 달랐다.
‘이게 정말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유긍달도 조심스레 말했다.
“50기는 무리 아니겠습니까? 서라벌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뭐 그러니 조치를 철저히 취해야지. 신라가 서라벌 내의 무장을 해제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 군사 5천 명을 동원해서 서라벌 외곽을 둘러친다. 무슨 일이 나면 바로 진입하게. 내가 딱 50기만 거느리고 서라벌에 들어가면 얼마나 모양새가 좋아.”
왕건이 당당하게 내뱉었다.
‘그냥 호위 1천 명만 거느리고 가면 아무 일도 없을 텐데 번거롭게 쇼를 하려고 5천 명을 고생시켜?’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댔다.
“알겠습니다. 폐하. 군사 5천을 준비하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가만히 있던 박수경이 그리 치고 나갔다. 큰 공은 유긍달이 가져가더라도 군사 5천 명으로 서라벌을 포위하는데 끼어 공을 세우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다른 외척들도 마찬가지였다. 황보제공마저도 그게 유리하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바꿔 박수경을 거들었다.
“예, 폐하. 그럼 신라 조정이 무장을 해제하도록 잘 말해보겠습니다.”
유긍달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유긍달은 신라 조정에 또 어려운 부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음 그래. 순하고 군율을 잘 지키는 군사 5천 명을 각별히 뽑아야 한다. 서라벌에 가서 고려 군사가 사고를 치면 진짜 모든 게 끝나는 거니. 우리 군졸들이 서라벌 사람을 때린다든가 물건 뺏는다든가 하는 일이 생기면 그 군졸을 지휘하는 장수들에게 책임을 묻겠다.”
왕건이 그런 당부를 했다.
“명을 받듭니다.”
군사를 동원해야 하는 외척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래. 정윤비. 정윤비도 이번에 서라벌에 함께 갈 것이니 채비를 하라. 정윤비도 그렇고 공주들도 데려가야겠다. 내가 딸과 며느리를 데리고 서라벌에 가면 진짜 얼마나 보기 좋겠느냐?”
왕건이 오늘 처음으로 나를 보고 명을 내렸다.
“예, 폐하.”
나는 고개를 숙였다. 다만 왕건의 이 명을 들으며 나는 속이 떨떠름했다.
‘이건 단순히 모양새만 신경 쓴 게 아니라 신라 왕실과의 혼사까지 염두에 두고 이러는 거다. 결국 신라 쪽과 인맥이 만들어져 있는 충주원이 신라와 이어지는데……. 나 참. 이걸 막을 방법도 없고. 다만 이번 서라벌 방문이 끝나면 뭔가 일이 풀릴 것도 같고.’
나는 내 미래지식을 바탕으로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지 열심히 계산했다. 그러면서 새삼 임희의 말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직접 와서 왕건과 외척들의 동태를 살피는 게 나아. 아버님으로부터 이런 소식을 전해 들었으면 현장감이 없었을 거야.’
이제 대강의 일을 마친 왕건과 외척들은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여러 외척들이 일제히 유긍달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다.
왕건도 연거푸 유긍달을 칭찬했다.
‘신라는 다루기 어려울걸?’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