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07화
107. 충성경쟁
나는 비룡성 관리와 목동들에게 은조각을 나눠주고 배에 올랐다. 배는 개경을 향해 나아갔다.
“너무 아쉬워요. 나중에 또 왔으면 좋겠어요.”
오지수가 내 곁에서 아쉬움을 표했다.
“예, 나중에…… 다시 와요.”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개경으로 향하는 배를 타니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교동도에서는 내가 왜 그랬지? 대체 왜?’
나는 뱃전에 몸을 기대며 그런 생각에 휩싸였다. 그나마 왕무가 배에 탄 말들의 상태를 살피려고, 갑판 아래에 내려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런 내 곁으로 임연객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임연객은 뱃전을 주먹으로 가볍게 두드리더니 툭 던졌다.
“연우야. 나도 조만간 결혼한다.”
“헉! 결혼?”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임연객은 이 시대 기준으로 노총각이었다. 이렇게까지 임연객의 혼사가 늦어진 것은 내 탓도 컸다.
‘내가 세력이 미약한 왕무와 혼인을 했다. 즉 상산 임씨는 왕무와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어. 그런 상산 임씨의 후계자 임연객과 혼사를 맺으면 역시 정윤파에 가담한다는 의미니.’
그래서 여러 가문들이 임연객과의 혼사를 망설였다.
‘그런데 나는 왜 이리 임연객한테 미안함을 못 느낄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임연객이 노총각이 된 것은 내 탓이 컸는데, 이상하게 조금도 죄책감이 안 느껴졌다.
오히려 임연객의 결혼소식을 듣는 지금 왠지 모르게 경악하고 있었다.
“우와 축하드려요.”
내 곁에 있던 오지수가 먼저 축하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공주 마마.”
“어…… 어느 가문이랑?”
나는 재빨리 그것을 물었다.
“대목군. 아니 이젠 천안이라고 불러야지. 천안의 노씨 집안이랑. 사실 재작년 팔관회 때 인연이 닿았어.”
임연객이 충격고백을 이어갔다.
천안이면 상산과 이웃한 곳이었다.
‘노씨 집안이면 나도 안다. 세력이 작은 곳이야. 하긴 그래서 과감히 우리와 혼사를 맺기로 결단을 내렸나 봐. 유긍달, 황보제공 등도 그 조그마한 곳까지 손을 대진 않지.’
위협이 될 만한 중간 이상 되는 가문이 정윤파에 가담할 기미를 보이면 그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가문이 이러면 굳이 대호족들도 나서지 않을 것이다.
“축하해.”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쨌든 임연객도 짝을 찾았으니 다행이지. 그런데 임연객도 상당히 음흉하네. 결국 재작년부터 만나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티를 안 내다니. 백년해로 하면 좋겠다. 그런데 나도 그러면 왕무와 백년해로 해야 하나?’
나는 그 생각을 하니 실감이 안 났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왕무가 내 짝이긴 한데. 이대로 백년해로 하면?’
나는 할아버지가 된 왕무가 나한테 ‘국선’이라고 부르면서 침상을 따로 쓰는 모습을 떠올렸다.
‘으아악, 정말 미치겠네.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는데.’
나는 다시 한번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어느덧 배는 벽란도에 당도했다.
* * *
개경에 돌아오고 나서 나는 매우 바빴다. 이런 일, 저런 일을 처리하느라 뛰어다녔다. 그래서인지 왕무 생각도 덜 났다.
내가 격무에 시달리는 사이 개경은 슬슬 팔관회를 준비하느라 들썩이고 있었다.
올해 팔관회는 진짜 범상치 않은 규모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내가 국선 선발전에 나간 2년 전 팔관회는 견훤에게 밀리는 상황에서 억지로 열린 거고, 작년은 고창 전투 직전이어서 이런 축제야 하는 둥 마는 둥 했어.’
그런데 올해는 사정이 달랐다. 연초에 고려가 고창에서 대승을 거두고, 왕건은 동남 3주를 평정했다고 자랑하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왕건은 팔관회 날 격구단들을 출범시킬 계획이었다. 여러 가지가 맞물려서 행사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이미 길거리에 엄청난 숫자의 연등이 내걸리고 귀신 인형이며 탈들도 끊임없이 팔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나는 여러 가지 일을 논의하기 위해 간만에 상산저로 향했다.
임희와 상산부인이 그런 나를 맞이했다.
“왔느냐?”
임희는 약간 지친 기색으로 인사를 건넸다.
“예, 아버님. 그런데 피곤해 보이십니다.”
나는 걱정이 돼서 물었다.
“팔관회 연습 때문에 다리가 너무 아프구나. 궁궐에서 내려온 뒤 폐하께 절을 하는 예식연습을 하는데. 폐하께서 올해는 더 웅장하고 위엄 있는 행사를 해야 한다고 하셔서 예전보다 더 힘들다.”
임희가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다른 가문도 다 이거 때문에 난리란다. 아니 궁궐이 언덕 위에 있는데 거기에서 구정까지 내려오는 연습을 계속 시키니! 그 긴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는지.”
상산 부인도 곁에서 거들었다.
‘왕무가 왕이 되면 진짜 평지로 궁을 옮겨야 해!’
나는 새삼 그런 다짐을 했다.
“그래 네 오라비가 곧 혼인을 하는 것은 너도 알지?”
임희가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예, 오라버니에게 들었습니다.”
“얼마 전 폐하의 혼인이 있어서 때가 겹칠까 봐 연객이의 혼사 날짜를 미뤘다. 그래 해량원 부인은 찾아뵈었느냐? 허허, 나도 해량원을 찾아야 하는데 요새 너무 바빴구나. 해량원 부인의 처소는 잘 마련되었느냐? 네가 그 공사를 감독한다고 들었다.”
임희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해량원 부인은 다름 아닌 재암성 성주 선필의 딸 정혜였다. 내가 교동도에 다녀오고 얼마 안 돼서 정혜 역시 개경에 당도했다.
그리고 혼인식 이후 정혜는 정식으로 왕건의 부인이 되었다.
“공사 막판에는 충주원, 황주원에서도 도움을 줘서 해량원을 완공했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임희에게 말했다. 그동안 훼방을 놓은 것이 양심에 찔리는 지 정혜가 오기 직전에는 그쪽에서도 지원이 왔다.
그래서 공사를 끝내기는 했지만 나도 그전까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뭐 네가 나주원을 대표해서 나섰으니 그쪽도 어쩔 수 없지. 모양새가 나주원은 관대하고 다른 곳은 덕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해량원 부인께서 많이 외로우실 테니 네가 자주 찾아가거라.”
임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예, 그러고 있습니다.”
나는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정혜를 찾아가고 나면 동양원 부인이 나를 볶아대서 요새 힘들었다.
“저 아버님. 사실 오늘 부탁드릴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계속 해량원 이야기만 이어질 분위기라 내가 입을 열었다.
“오 그래 무슨 일이냐?”
“폐하께서 팔관회 첫날 격구단들도 출범시킬 작정입니다. 격구단주들이 폐하 곁에서 팔관회 날 격구 경기도 보고 연회도 함께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격구단주로서 나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격구단 출범을 위한 돈이야 내가 댔지만 격구단주로서는 임희가 나서주는 것이 내 바람이었다.
전 병부령이자 상산백인 임희가 나서주면 격구단도 든든할 것이다.
“윽 다리가!”
그러자 임희가 갑자기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며 외쳤다.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내 앞에 있는 게 아버님이 아니라 임연객인 줄 알았어.’
그리고 곁에서 상산부인도 놀라서 임희의 다리를 같이 주물러줬다.
“네 아버지 몸에 탈이 났나 보다. 그러니 격구단주 일을 어찌할 수 있겠니?”
“일은 오라버니가 다 처리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은 그저 연회 자리에만 나서주시면…….”
내가 다시 권하는데 임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다리가 너무 아프구나. 게다가 거기 가면 유긍달, 황보제공 등과 또 골치 아픈 머리싸움을 해야 하는데. 그런 건 연우 네가 잘하지 않니? 거기다 돈도 네가 댔고.”
임희가 한사코 거절하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 아 참. 돌아가는 길에 최 선생께도 인사를 올리고 가도록 해라.”
임희는 반색을 하며 나에게 그런 당부를 했다.
* * *
결국 임희에게 격구단주 자리를 떠넘기는데 실패한 나는 직접 나서기로 했다.
‘왕무였다면 내가 자리를 떠넘겨도 받아줬을 건데. 근데 하필 왕족은 격구단주가 될 수 없다고 해서.’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구정 한쪽에 마련된 누각으로 향했다.
팔관회 날 왕건이 중신들로부터 인사를 받는 의식이 끝나고 나서, 이 누각 위에서 왕건과 격구단주들이 함께 격구경기를 보기로 되어 있었다.
원래는 인형극을 봐야 했는데 올해는 인형극은 그냥 중간중간 짧게 보고 격구경기를 열기로 했다.
‘또 어떤 말이 오갈지.’
누각에 오르려니 나는 부담이 돼서 배가 살살 아파 왔다. 누각 위에는 이미 유천궁, 유긍달, 황보제공, 함규, 임명필, 박수경, 강기주 같은 쟁쟁한 외척들이 앉아 있었다.
격구단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누각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그들이 일제히 일어나 예를 올렸다.
“정윤비 마마를 뵙습니다.”
“예, 모두 앉으십시오.”
나는 억지로 태연한 척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기분 탓인지 외척들은 하나같이 칙칙하고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것 같았다.
그나마 정주의 유천궁만은 신선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새하얀 수염에 온화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었다.
정치 일선에서 은퇴하고 권력투쟁에 개입을 안 해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유천궁 옆자리에 앉기로 했다. 나와 외척들이 앉아 있는데 매우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필 왕건도 없어가지고.’
나는 누각 가운데 있는 빈 옥좌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폐하께서 나오고 계십니다. 와아아아.”
그런 내 귀에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들렸다. 누각 아래 구정을 내려다보니 백마를 탄 왕건이 격구채를 들고 나서고 있었다.
백마에 온갖 금장식을 덕지덕지 붙여놔서 번쩍거렸다. 확실히 눈에 잘 띄긴 했다.
왕건은 격구 경기가 열리기 전에 본인이 잠깐 선수들과 뛰어보겠다고 저리 나선 것이다.
‘그냥 누각 위에서 구경만 하면 될 것을.’
나는 혀를 차며 누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정에서는 왕건이 격구채를 휘두르며 공을 치고 있었다.
‘이건 뭐 사단장 축구보다 더 해.’
나는 구정에서 펼쳐지는 경기 모습을 보고 기가 막힌 것을 느꼈다. 왕건의 격구채가 닿지도 않았는데 선수들은 왕건 앞에서 도망치기 바빴다.
변변찮게 수비도 못하는 선수들을 뚫고 왕건은 공을 구문에 넣었다.
“와아아아!”
구정의 관중들은 함성을 질렀다. 왕건은 한동안 더 뛰며 공을 구문에 4번이나 더 넣었다. 그러다가 물러났다.
“쉬다가 한식경 뒤에 경기가 열립니다.”
진행을 맡은 관리들이 입을 모아 그리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 사이 구정에서는 인형극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건은 그대로 누각 위로 올라왔다.
“폐하를 뵙습니다.”
나와 외척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그런 왕건을 맞이했다. 그런데 누각 위에 올라온 왕건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어허. 요새 아이들은 몸을 너무 사려서 근심이다.”
누각에 마련된 옥좌에 앉은 왕건이 불쑥 내뱉었다.
“무슨 말씀인지?”
황보제공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국왕인 내가 공을 치는데 어떻게 선수들 중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내가 젊은 시절에는 마군대장들과 격구를 할 때도 비위를 맞춰주려고 말에서 떨어지는 시늉을 했는데. 요새는 이리 몸을 사리니. 나 참.”
왕건이 주먹으로 옥좌 손잡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니 그만큼 해줬으면 됐지. 어……어쨌든 돌아가서 내 격구단 선수들에게 왕건이 나서면 낙마하라고 명을 내려놔야 하나?’
나는 당황해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황보제공, 박수경은 더 난감한 기색이었다. 방금 전에 왕건과 같이 뛴 격구 선수들은 황보제공, 박수경의 격구단 소속이었다.
두 사람은 무장 출신이라 격구단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 두 사람의 격구단이 가장 우수하다고 정평이 나 있었다.
그래서 팔관회 날 경기에 나섰는데 왕건이 이리 나오는 것이다.
“요새 아이들 기마술이 우리 때만 못해서 그렇습니다. 말에서 떨어지면서 안 다치려면 말 옆구리에 붙었다가 딱 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요새 애들이 그런 재간이 없어서.”
황보제공이 그런 식으로 왕건의 비위를 맞췄다.
“그런가? 허허허. 역시 대상과는 말이 잘 통해. 아 천안에는 별일 없나?”
“예, 폐하.”
황보제공이 굽신거렸다.
나는 황보제공과 격의 없이 말을 주고받는 왕건을 보며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꼈다.
‘한림원에 있을 때는 나랑 친한 척해놓고. 하긴 왕건은 안 친한 사람이 없어. 다른 사람과도 단 둘이 있으면 살갑게 굴걸? 딱히 나와 왕무만 총애하는 게 아니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니 초조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외척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모두 왕건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며 왕건과 친한 척을 하려고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