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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06화 (106/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06화

106. 인정

내가 2년 뒤 있을 백제 수군의 침공을 근심하고 있을 때 임연객이 다급하게 말했다.

“자, 오지도 않을 외적 걱정하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자고. 빨리 말부터 보자.”

거기에 오지수와 내 친구들도 속속 배에서 내렸다.

“우와 저 말들 좀 봐!”

“개경 가까이에 이런 곳이 있었네. 진작 찾아올 걸 그랬다.”

교동도의 풍광에 감탄한 소녀들이 한마디씩 하면서 주변이 떠들썩해졌다.

‘정말 나라 걱정을 계속 할 수 없는 환경이야. 에라 모르겠다. 백제 수군이 올 때쯤 교동도와 인근 섬 목장의 관리들과 목동들만 빼내면 되겠지. 말들이야 백제 수군이 노획하게 내버려두자. 그런 타격을 입어도 결국 고려가 통일을 하긴 하니.’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내가 외적이나 해적 소리를 안 하자 비룡성 관리도 홀가분한 기색이었다.

하긴 수도에서 온 정윤비가 오자마자 그런 소리를 하니 부담이 됐을 것이다. 비룡성 관리는 일행을 향해 외쳤다.

“제가 축사 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거기서 찬찬히 말들을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룡성 관리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나도 오지수를 비롯한 학관 친구들에게 둘러싸였다. 친구들 사이에 배수현은 없었다. 지금이 신혼인데 교동도까지 여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윤비 마마께서 그냥 졸업해버리셔서 너무 서운했어요. 어느 날 갑자기 학관에 안 나오시고 한림원령께서 정윤비 마마는 졸업하셨다고 알려주고. 너무 황망했습니다.”

친구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게 다 유긍달 때문이야. 왕건이 유긍달 체면은 세워줘야 한다고 학관은 그만두라고 해서.’

다만 졸업을 할 때 따로 친구들을 만나러 가지 않은 것은 내 잘못이었다.

“미안.”

나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마마. 이렇게 교동도에 데려와 주셨으니. 하하하.”

친구들이 밝게 웃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오지수가 외쳤다.

“그러고 보니 곧 팔관회가 열리네요. 우리가 2년 전에 연우 언니를 국선으로 만들었죠. 올해도 나서서 연우 언니와 함께 또 멋진 공연을 해볼까요?”

“와아아아.”

오지수의 선동에 친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그 사이에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원래 그런 거 좋아하지도 않아. 그때는 진짜 혼인을 피해 보려고 나선 거고.’

그런데 결국 혼인을 못 막고 지금처럼 됐다. 내가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오지수와 친구들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안 그래도 수많은 개경 사람들이 정윤비 마마의 공연을 기대하고 있어요. 작년이야 전쟁통이라 그런 걸 생각할 엄두도 못 냈지만 올해는 다르죠.”

“맞아. 맞아.”

그때였다. 조용히 걷던 왕무가 불쑥 나서더니 입을 열었다.

“안 된다. 절대 안 돼. 지수야. 국선을 곤란하게 만들지 마.”

“오호. 오라버니는 다른 사람들이 연우 언니 노래를 듣는 게 싫은 모양이죠? 하긴 연우 언니가 노래를 부르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상산저 앞에 몰려가긴 했죠.”

그러자 오지수는 음흉한 표정으로 왕무에게 말했다.

“응.”

왕무는 그런데 흔들림 없이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와, 어떡해! 어떡해!”

“우리가 정윤 전하 생각을 못 했어.”

그런 왕무의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손뼉을 치고 난리가 났다.

그리고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왕무는 왜 남의 일에 저렇게 나서? 내가 뭐라 하기도 전에 왜?’

하지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나도 이제는 유부녀가 됐으니……아니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사이 오지수와 친구들이 더 왁자지껄하게 떠들어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비룡성의 관리가 헛기침을 하며 외쳤다.

“험험 축사에 도착했습니다. 그럼 병부낭중께서 말들을 고르시고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저는 귀빈들이 묵을 숙소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숙소 안내 소리를 듣고 오지수와 친구들의 관심은 그쪽으로 쏠렸다. 나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축사를 바라보았다. 고려 기병을 위한 군마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축사인 만큼 규모가 엄청났다.

“그럼 슬슬 시작하겠습니다. 정윤 전하.”

임연객이 소매를 걷어붙이며 말을 고를 채비를 갖추었다. 그리고 같이 말을 고르자고 왕무를 불렀다.

그런데 왕무는 임연객 쪽은 안 보고 내 쪽을 보며 말했다.

“국선, 팔관회에 나가는 일은 지수의 말을 따르지 마십시오.”

왕무는 엄청 근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예, 정윤 전하. 그리고 저도 전하와 오라버니와 함께 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나는 왕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위해 그리 말했다.

한쪽에서 오지수와 친구들은 자신들이 묵을 숙소 쪽으로 가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가 그 사이에 끼면 왕무는 혹여 내가 분위기에 휩쓸려 팔관회에 참가할까 봐 걱정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 구경이나 하기로 했다.

“고맙습니다. 국선.”

왕무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왕무, 임연객과 함께 말 구경을 시작했다. 임연객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말들을 살폈다. 그러다가 가끔 왕무에게 의견을 물었다.

쩌억.

말을 볼 줄 모르는 나는 하품을 하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다녔다. 그래도 그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반시진 만에 왕무와 임연객은 말 20필을 골라냈다.

“확실히 여기 말들은 다 괜찮습니다. 벌써 훌륭한 말을 20필이나 골랐습니다. 비룡성 관리가 자랑할 만합니다. 격구단을 만들며 비룡성에서 25필의 말을 살 권리를 우리가 받았습니다. 5필의 말을 더 살 수 있지만 그건 남겨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혹시 나중에 비룡성의 다른 목장에서 진짜 보기 드문 명마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20필만 있어도 우선 격구단 운영은 가능합니다.”

임연객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낭중의 뜻대로 하도록.”

왕무도 임연객의 일처리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선 20필에 대한 서류 작업을 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마 이게 시간이 꽤 걸릴 것입니다. 정윤 전하께서는 푹 쉬고 계십시오.”

임연객은 그렇게 말하고 비룡성 관리를 찾아 축사를 나섰다. 축사에는 졸지에 나와 왕무 둘만 남았다.

‘뭔가 또 묘하게 어색하네.’

그런데 다행히도 왕무가 먼저 나섰다.

“국선, 계속 축사에 있기는 그러니 밖을 둘러봅시다.”

“예, 전하.”

나와 왕무는 축사를 나와 교동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교동도는 좋은 말을 기르기 위해 환경조성을 잘해 놨다. 그래서 사람이 걷기에도 좋았다.

왕무는 나와 나란히 걷다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교동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혈구도가 있습니다. 그곳도 한번은 둘러볼 만한 요충지입니다.”

혈구도면 오늘날의 강화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사학도인 나는 알고 있었다.

“예, 전하. 혈구도면 수만 명이 유사시에 대피할 만한 곳입니다.”

나는 무심코 그리 말했다.

“그런가?”

왕무가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표정을 보고 나는 내 실수를 알아챘다.

‘지금이야 강화도가 큰 섬이지만 이 시대에는 그냥 적당히 큰 섬이야. 지금은 현대보다 기온이 따뜻한 때라서 바닷물 수위가 높아. 그래서 강화도도 지금보다 훨씬 작아. 아직 간척 사업이 이루어지기 전이고.’

이 시기는 기후가 따뜻해서 북방의 발해 땅도 농사가 잘되고 인구가 많았다. 지금 기준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제가 착각했습니다. 혈구도는 그래도 간척을 하면 그리될 수 있는 곳입니다.”

나는 재빨리 그렇게 정정했다.

“국선의 말이 옳습니다. 나중에 국선과 함께 혈구도에도 한번 가봤으면 좋겠습니다.”

왕무는 그렇게 말했다. 왕무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도 좋다.’

한가롭게 걸으며 잡담을 나누는 데 마음이 편했다. 그냥 계속 이렇게 걷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우울해졌다.

“정윤 전하. 저에게 한쪽 팔을 내주십시오.”

나는 왕무에게 말했다.

“팔이라면?”

왕무는 의아한 기색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내밀었다. 나는 그 팔을 쥐고 왼쪽으로 끌어당겼다.

왕무는 그대로 왼편으로 움직였다. 나는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왕무를 끌어당겼다. 왕무 역시 그대로 오른편으로 움직였다.

‘그 엄청난 괴력을 지닌 왕무가 내가 이끄는 대로 끌려다니네.’

나는 전장에서 말을 몰며 창을 휘두르던 왕무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선 왜 그러시오?”

의아한 표정으로 내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던 왕무가 한숨 소리를 듣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정윤 전하.”

나는 짐짓 미소를 지으며 왕무의 팔을 놓아주었다.

‘왕무는 나를 좋아해.’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창 나이의 남녀가 결혼을 하고 수많은 일을 함께 겪었는데 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왕무가 나에게 품은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왕무에게 품은 감정은…….

‘현대에서 나는 별 볼 일 없는 남자였어. 그런데 왕무처럼 보기 드문 미남이 곁에 붙어서 다정하게 대해주고 내 말대로 움직여 주니, 나는 으쓱해진 걸까? 그래서 이리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걸까? 어쨌든 우리의 관계에서 내가 문제야.’

그런데 갑자기 왕무가 나를 끌어안았다.

“연우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러더니 왕무는 오른손으로 내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이러면 안 돼.’

나는 왕무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방금 전에는 내 말을 잘 듣던 왕무가 지금은 자기 마음대로 했다.

나는 왕무 품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뭐야. 얄밉게! 이럴 때는 내 뜻을 안 따르고. 아니지. 왕무가 정말 내 뜻을 안 따른 걸까?’

나는 또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와 왕무가 껴안고 있는 사이 멀리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왕 온 김에 해안도 구경하고 가자! 그런데 정말 내일 아침에 떠나야 하나요? 내일 오후쯤 나가고 싶은데.”

오지수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왔다.

“오후에는 이 섬에서 나가는 배가 없습니다. 정 그러시면 내일모레 나가시는 것이.”

비룡성 관리가 그리 대답했다.

“그건 안 되는데.”

오지수가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학관 친구들끼리 웃고 박수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왕무의 품속에서 빠져나와 그쪽으로 달려갔다. 왕무도 담담한 기색으로 말없이 내 뒤를 따랐다.

“어, 연우 언니!”

오지수가 내 모습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학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왕무는 조용히 다시 일행에 합류했다.

* * *

교동도에서 먹는 저녁은 정말 맛있었다. 말을 관리하는 목동들이 밖에서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웠다.

나야 전쟁터도 다닌 몸이라 이런 것에 익숙하지만 오지수와 학관 소녀들은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진짜 맛있다.”

“계속 이렇게 지냈으면 좋겠어. 내일 꼭 떠나야 하나?”

목동들이 잘라준 고기를 먹으며 오지수와 학관 소녀들이 말했다.

‘숙소가 확보된 상태에서 고기만 밖에서 구워 먹으니 좋지. 전쟁터에서 노숙하면 힘들다고. 나와 왕무뿐만 아니라 지수와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이 고려를 안정시켜야 하는데.’

나는 해맑은 소녀들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나와 왕무가 패하면 왕무의 누이인 오지수뿐만 아니라 정윤파로 분류되는 친구들도 불행해질 것이다.

내가 그러는 동안 임연객은 비룡성 관리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왕무도 그 사이에 끼어 있었다.

나는 잠시 어디로 갈지 고민하다가 친구들 쪽으로 걸어갔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 일행은 교동도를 떠났다. 커다란 배에 임연객이 고른 20필의 말들이 탔다. 나는 고생한 비룡성 관리와 목동들을 위해 주머니를 풀었다.

“고생 많았다.”

나는 은조각을 주머니에서 꺼내며 말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비룡성 관리는 은조각을 받기도 전에 굽신거렸다. 그러다가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은조각은 이 주변에선 쓸 수 없고 개경까지 와야 쓸 수 있는데. 그냥 나중에 그대들에게 곡식을 좀 주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이 당시 민간에서는 곡식이나 면포로 거래를 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불편할까 봐 나는 그리 권했다.

그런데 비룡성 관리와 목동들은 입을 모아 외쳤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지금 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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