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03화
103. 부탁
며칠 뒤 나와 왕무, 왕건은 구산사로 향했다. 왕평달과 마후라 대사의 병문안을 위해서였다.
며칠이나 기다린 이유는 왕건이 서경유수 왕식렴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숙부님을 볼 때 왕식렴과도 만나야겠다. 긴히 논의할 일이 있다. 왕식렴이 오면 가자. 정윤에게도 그리 전해주렴.”
왕건은 한림원에서 나에게 말했다. 나도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맛있는 카레를 만들어가야지.’
고려시대 재료로 카레를 만드는 것은 처음이라, 지난번에는 시행착오가 많았다. 이번에는 연구를 더 해볼 작정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왕식렴이 개경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서경에서 개경까지 꽤 거리가 있음에도 빨리 왔다. 아버지인 왕평달이 위독하니 전력을 다해 달려온 것 같았다.
‘구산사, 이 절과 나는 인연이 참 깊네. 왕무와 사실상 혼인을 하게 된 것도 여기고. 왕무가 들어가 있던 구산사 지하통로는 잘 있을까? 온 김에 들렸다 가볼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힐끗 왕무를 바라보았다. 왕무도 나처럼 구산사에서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왕무는 그저 담담한 가운데 슬픈 기색이었다.
‘하긴 왕무 입장에서는 작은 할아버지인 왕평달이 위독하니,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겠지. 나도 참. 왜 이러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먼저 마후라 대사를 찾아가자. 연우가 준비한 음식이 식으면 안 되니.”
왕건이 우리를 보며 말했다.
“예, 폐하.”
나와 왕무는 입을 모아 대답하며 먼저 마후라 대사가 묵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구산사의 젊은 승려가 마후라 대사를 돌보고 있었다.
1년 만에 마후라 대사는 살이 많이 빠졌다.
“대사의 몸이 편찮으시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왕건이 먼저 마후라에게 말을 건넸다.
“황송합니다. 폐하.”
마후라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고령의 나이에 이 먼 고려까지 왔으니 몸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카레가 담긴 찬합을 마후라 대사 앞에 내려놓았다.
“제 나름대로 천축음식을 준비해 왔습니다. 드시고 싶을 때 드십시오.”
“허허허, 이것 참 고맙습니다.”
마후라는 찬합을 열고 수저를 들어 카레를 천천히 떠먹었다.
“흠흠.”
내 뒤에서 왕건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왕건은 마후라가 카레를 먹는 모습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고 있었다.
“정윤비 마마께는 참 고맙습니다. 그래도 저번에 주머니를 드렸으니 이제는 드릴 것이 없습니다. 가장 근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 꼭 한번 열어보십시오.”
마후라 대사는 다시 한번 나에게 당부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왕건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도 아직 안 열어본 마후라의 주머니를 열어본 게 왕건이었다. 그 주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니 끼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주 자기가 열어봤다고 티를 내는구만.’
나는 속으로 그리 투덜거리며 왕무를 바라보았다. 왕무는 의젓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듬직하게 서 있었다.
그러자 마후라는 웃으면서 왕건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주머니 안의 글귀가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윤비 마마께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허허허. 그리고 혹여 그 주머니를 열어 글귀를 훔쳐본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인연입니다. 훔쳐본 사람도 그 안의 내용에 대해 지금부터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훗날의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헉.”
왕건은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나도 좀 놀랐다.
‘마후라 대사는 마치 왕건이 주머니를 열어본 것을 아는 것 같군. 왕건이 티를 내서 눈치챈 걸 수도 있지만. 어쨌든 마후라 대사가 준 주머니는 계속 가지고 다녀야지.’
나는 품속에 있는 마후라의 주머니를 꼭 쥐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쨌든 보중하십시오. 대사의 병환이 다 나으면 설법을 들으러 오겠습니다.”
왕건은 정중히 합장을 하며 마후라에게 말했다. 내가 그동안 본 바에 따르면 왕건은 고승, 신통력, 예언, 징조 같은 것을 매우 좋아했다.
마후라의 범상치 않은 언행이 왕건의 마음에 쏙 든 것 같았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만, 인연이 다했습니다. 허허허.”
마후라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마후라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우리는 그 처소에서 나왔다. 나오자마자 왕건은 구산사의 주지 스님을 불렀다.
단숨에 달려온 주지에게 왕건이 말했다.
“마후라 대사의 병환을 잘 돌봐주십시오. 혹여 비용이 부담이 되면 내가 곡식을 넉넉히 보낼 것입니다.”
“삼장법사 마후라 대사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미 비용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마후라 대사를 보살피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앞으로 더욱 정성을 들이겠습니다. 곡식 같은 것은 보내지 마십시오.”
구산사 주지는 합장을 하며 말했다.
“자 그럼 숙부님이 묵고 계신 방으로 안내해 주십시오.”
왕건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일행은 왕평달이 묵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왕평달도 마후라 대사와 마찬가지로 많이 말랐다. 그 곁에서 왕식렴이 부친을 보살피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슬픔을 느꼈다. 왕평달의 혈족인 왕건, 왕무는 더욱 고통이 큰 것 같았다.
“숙부님!”
왕건은 절절하게 외치며 왕평달 곁으로 갔다.
“폐하를 뵙습니다.”
왕평달을 보살피던 왕식렴이 예를 올렸다.
“무슨 이런 자리에서까지.”
왕건은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왕건, 왕평달, 왕식렴 세 사람은 둘러앉아 옛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왕건이 맨 처음 거병해서 궁예 밑에서 일할 때 왕평달이 왕건을 도왔던 여러 일화들이었다.
나와 왕무가 낄 이야기가 아니라서 우리는 한쪽에 가만히 시립해 있었다.
‘지루하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왕무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나는 지루한데 왕무는 자기 집안 이야기라서 그런지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표정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왕건 등이 나누는 이야기에 따라 조금씩 변해가는 왕무의 표정이 나에게 흥미진진했다.
‘잘생기긴 잘생겼어. 부럽다.’
내가 왕무를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데 왕평달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정윤, 정윤비도 이리 오너라. 지루한 옛날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어. 하지만 어차피 마지막이니.”
왕평달은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왕무는 황급히 왕평달 쪽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너희들에겐 고마울 뿐이다. 너희들이 아니었다면 진짜 죽을 때까지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를 못 풀었을 것이다. 평생 아버님을 원망하다가 세상을 뜰 뻔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수수께끼를 남기시다니 아버님도 참!”
왕평달은 왕무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내 손도 끌어와서 잡았다.
“작은 할아버님의 지혜로도 충분히 문제를 해결하셨을 겁니다.”
왕무가 말했다.
“아니다. 정윤비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비밀통로 석벽의 의미없는 조각들만 들여다보고 있었을 거다. 정윤비야. 고맙다.”
“아닙니다.”
나는 겸손한 척 대답했다.
“뭐 그래도 이 구산사를 지어서 너희들에게 조금은 보답했다. 내가 구산사를 지을 때 용이 된 어머님을 위해 지하통로도 만들었다. 그 통로에서 너희들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니? 물론 왜 돈 아깝게 지하통로까지 파냐고 뭐라 한 사람도 있었다만.”
왕평달이 그리 생색을 냈다.
“험험.”
그러자 옆에서 왕건이 헛기침을 하며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건이 왕평달한테 지하통로를 파지 말라고 한 모양이야. 그래놓고 그걸 제일 잘 써먹었군.’
나는 왕무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결혼을 피하려고 했지만 어찌 보면 결혼을 한 게 잘한 건가? 왕무가 아니었으면 침상을 따로 쓰는 이상한 결혼생활을 받아들일 사람이 있었을까?’
그리 생각하니 왕평달에게 더욱 고마웠다.
“그러나 덜렁 그걸로 너희들에게 은혜를 갚았다고 볼 수는 없지. 식렴아.”
왕평달은 그리 말하며 왕식렴을 바라보았다.
“예, 아버님.”
왕식렴이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정윤이 우리 집안의 장손이고, 또 내 숙원도 풀어줬다. 앞으로 장손을 많이 밀어줘라.”
왕평달이 거침없이 말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왕평달의 말대로 왕식렴이 우리를 밀어주기만 한다면 왕무는 걱정이 없어. 왕식렴이 서경 일대에 구축한 세력은 막강하다.’
“아이쿠. 난 화장실이 급해서.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숙부님.”
그러자 왕건은 재빨리 그리 말하더니 왕평달의 방에서 빠져나갔다.
‘아니 이럴 때 좀 같이 있으면서 힘을 보태주지.’
나는 기가 막혀서, 달아나는 왕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들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정윤 전하를 제가 굳이 밀어드리고 말고 할 게 있습니까? 아버님의 말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왕식렴이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크게 실망했다. 왕식렴의 말은 결국 왕평달의 부탁을 거절한다는 의미였다.
왕무의 취약한 정치적 위치를 왕식렴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모른 척 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리와 손을 잡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역사 기록에서도 왕식렴은 고려 3대왕 정종, 유긍달의 외손자 왕요를 지원한다. 하긴 이미 지난 수년간 그쪽과 교감이 있었겠지.’
그런데 왕평달은 물러서지 않고 나서줬다.
“내 마지막 부탁인데도 그럴 거냐?”
죽어가는 아버지가 이리 나오자 왕식렴도 크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아버님. 서경에서 저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제 독단으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서경에 가서 사람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왕식렴이 난감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왕평달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다니.’
나는 왕평달의 손을 꽉 쥐었다.
“작은 할아버님. 당숙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냥 마음 편히 쉬십시오.”
그런데 왕무가 고지식하게 그렇게 나섰다. 친척들 간에 이런 말이 오가는 것을 또 견디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 왕무를 보고 나는 다급해졌다.
‘아니 이 좋은 기회를 이리 놓칠 순 없어. 뭐라도 받아낼 수 있는 때다.’
나는 재빨리 나서서 말했다.
“서경유수의 말이 옳습니다. 누구를 밀어주고 말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중에 저와 정윤 전하가 부탁 하나를 할 때 서경유수께서 들어주시면 어떻습니까?”
나는 왕식렴을 관직인 서경유수로 호칭했다. 이 일은 친척간의 사사로운 정으로 다룰 일이 아니란 것을 왕무가 알아줬으면 해서 신호를 보낸 것이다.
“부탁이라?”
내가 어떤 부탁을 할지 모르니 왕식렴은 또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절대 곤란한 부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경유수께서 곤란하다고 생각하시면 부탁을 거절하셔도 됩니다. 대신 들어줄 수 있는 다른 부탁을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나는 그런 조건까지 덧붙였다.
“그렇다면야.”
왕식렴은 고개를 끄덕이며 왕평달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거라도 해주면 됐다. 나도 이젠 늙고 별 힘이 없어. 이렇게라도 되니 마음이 가볍구나.”
왕평달은 흡족한 기색이었다. 왕평달도 이미 독자적인 세력을 거느리고 있는 왕식렴이 자기 말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진작 알았던 것 같았다.
그나마 왕평달이 고집을 부리는 틈을 타서 내가 조그만 이득이라도 얻어내자 만족한 것 같았다.
“작은 할아버님.”
왕무는 감격한 기색이었다. 나도 왕무와 같은 심정이었다.
내가 이 시대에 떨어진 이후 상산의 가족을 제외하면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힘써준 사람은 왕평달이 처음인 것 같았다.
나는 하루 종일이라도 왕평달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덧 왕건이 왕평달의 방으로 돌아왔다.
“이야기는 다 끝났니? 뭐 그럼 우리는 가봐야지.”
그러더니 왕건이 그리 말했다.
“그래 모두들 바쁜데 가봐야지. 폐하.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십시오.”
왕평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할아버님. 힘내십시오.”
나와 왕무는 입을 모아 말했다.
“그래 잘 살아라.”
왕평달은 침상 위에서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서경유수와는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왕건이 왕평달의 처소에서 나오면서 슬쩍 그리 말했다.
“예, 폐하.”
왕식렴이 재빨리 왕건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왕건과 왕식렴은 진지한 표정으로 꽤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뭔 얘기를 하는 걸까?’
나는 몹시 궁금했지만 가까이 다가가 엿들을 수도 없어서 갑갑했다. 이야기를 마친 왕건과 왕식렴은 고개를 끄덕이며 헤어졌다.
그리고 우리 쪽으로 다가온 왕건이 외쳤다.
“자, 이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