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02화
102. 위독
“연우야! 너 그 소식 들었니? 격구단이 다시 생기고 격구대회를 연다더라!”
흥분한 임연객이 나에게 외쳤다. 나는 그런 임연객의 말을 듣고 격분했다.
‘아침부터 임연객이 매우 다급한 표정으로 찾아왔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나는 무슨 큰일이 터진 줄 알았다. 나는 시큰둥한 어조로 임연객에게 말했다.
“나는 진작 알고 있었어.”
한림원에 다니는 덕에 나는 이 정보를 미리 입수했다.
‘흐흐흐, 이 맛에 한림원에 다니긴 하지.’
내가 속으로 흐뭇해하는데 임연객은 나를 원망했다.
“그 중요한 소식을 왜 나한테 바로 안 알려줬어?”
“오라버니가 그 소식을 빨리 알아서 뭐하게?”
“당연히 우리 집안도 격구단을 만들어야지! 연우야. 너는 고생할 필요 없어. 힘든 일은 내가 다 할 테니까, 돈만 대줘. 은광에서 나는 은을 그리 쌓아만 두면 무슨 의미가 있어?”
임연객이 옆구리를 짚으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격구단은 무슨. 아버님께 말씀드리든지.”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버님은 연우 너한테 말해보라고 하셨어. 그리고 상산의 돈으로 격구단을 만들 수 있었으면 예전에 진작 만들었지! 네 도움이 절실해.”
임연객이 말했다. 아마 임희에게도 떼를 쓰다가 온 것 같았다.
“그 은은 발해 유민들을 돕기 위해 모아둔 거야.”
“연우야. 네가 고안해 낸 은 추출법을 전문가들이 계속 발전시켜서 지금은 수익이 엄청나. 연우 너한테는 격구단 하나 만드는 게 부담되는 일이 아니야. 격구단도 소박하게 운영하면 돈이 많이 안 든다.”
“오라버니. 그러고 보니 조만간 승진할 거라는 소문을 들었어. 사실이야?”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임연객은 승진 얘기를 좋아하니까 이 이야기를 하면 잠잠해지겠지.’
“요 사이에 공을 세운 사람이 많아서 그냥 벼슬을 뿌리기 때문에 승진한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어. 내가 병부경이 된다고 해도 다 같이 승진을 했기 때문에 일하는 건 지금과 똑같아. 그리고 연우야 이걸 봐라. 내가 격구단 운영과 관련된 비용을 추산해 왔다.”
그러더니 임연객은 품속에서 두툼한 소책자 하나를 꺼냈다. 대강 훑어보니 내가 알려준 그래프까지 그려가며 격구단 사업에 대해 적어왔다.
“병부에서 일을 이렇게 했으면 오라버니가 지금 병부령이 되지 않았을까?”
아침나절에 소식을 듣고 순식간에 이만한 소책자를 만든 임연객을 보니 나는 기가 막혔다.
“병부 일이야 죽지 못해 하는 거고 격구단은 어렸을 때부터 갖고 싶었다고. 진주 임씨 애들이 격구단이 있다고 얼마나 자랑했는데. 연우야. 제발.”
임연객이 발을 동동 굴렀다.
“병부에 일 보러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오늘 휴가 냈어. 요사이 일이 없어. 백제가 그냥 망할 분위기라.”
임연객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이걸 어떻게 떼어내지? 나는 할 일도 많은데.’
나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이제 삼한통일까지도 몇 년 남지 않았다. 그전에 최대한 공을 많이 세워두고 입지를 확보해야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그리고 나와 왕무도 살아남았다.
‘그런데 왕건이 호족들 힘을 빼려고 격구단을 만들라고 하는 줄도 모르고 이러다니. 참 철이 없어.’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나는 그냥 입을 닫고 대꾸를 안 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임연객은 눈을 굴리더니 주변에 누가 없나 세밀히 살폈다.
그리고 엿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입을 열었다.
“연우야. 내가 격구단을 만들자고 하는 건 단순히 내가 갖고 싶어서만은 아니야. 사실 격구단을 만들면 돈이 들어가니 대호족들의 재정에 타격이 가지. 폐하께서 이걸 노리시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거기에 잡찬 어른이나 좌승 어른은 격구에 취미도 없어. 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다 격구단을 만든다. 이유가 뭐겠니?”
임연객의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시대 사람들도 모두 왕건의 음흉한 속내를 알고 있다고? 나만 아는 게 아니었어? 임연객이 알 정도면.’
“왜 만드는데?”
나는 임연객 쪽으로 몸을 숙이며 물었다.
“그야 격구단을 만들어두면 개경에서 합법적으로 기병을 20기~25기 정도 사병으로 거느릴 수 있으니까. 격구는 10명이 한다. 선수들을 훈련시켜야 하니까 연습경기 하려면 최소 20명은 있어야 격구단이 되는 거지. 그러다가 무슨 일 터지면 격구단을 기병으로 활용할 수 있어.”
임연객이 나름 예리한 말을 했다.
‘앗 그러고 보니 임연객이 병부에서 오래 근무를 했지!’
나는 새삼 그것을 느꼈다. 확실히 임연객의 말이 맞았다. 개경에 머무르는 호족들은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그 숫자나 무장에는 제한이 많았다.
특히 기병을 거느릴 수가 없었다. 당연히 수도인 개경에서 무제한으로 사병들을 거느릴 수 있게 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이래서 대호족들도 왕건 손에 놀아날 수밖에 없는 거군.’
나는 왕건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오라버니 말이 맞긴 한데 또 기병 20기를 거느리자고 돈을 그만큼 쓰는 것은 고민이야. 격구단을 만들면 선수들을 화려하게 치장시켜야 하고 상금도 줘야 하니. 기병 70~80기를 유지할 비용이 들걸.”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성비가 안 맞았다.
“연우야. 제발. 에잇. 점심 먹고 다시 얘기하자.”
“점심 먹고 다시 오게?”
“아니 여기서 먹을 건데? 설마 나주 왕후 마마가 날 쫓아내진 않으시겠지.”
임연객이 끈질기게 외쳤다.
“그래 마음대로 해. 다만 나는 머리가 아프니까 나가서 나주원이나 구경하고 있어.”
나는 손을 휘저으며 임연객에게 나가라는 시늉을 했다.
* * *
하지만 나는 임연객에게 나가라고 말한 것을 후회하게 됐다. 슬슬 점심 때가 돼서 밥을 먹기 위해 나는 처소에서 나섰다.
그런데 멀리 정원에서 임연객과 오지수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공주 마마. 격구단이 생기면 무조건 좋은 거예요. 나주원의 격구단이기도 하니까 공주 마마가 학관에서 자랑하셔도 되고.”
임연객이 열심히 오지수를 세뇌시키고 있었다.
“그, 그런가요?”
오지수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앗 오지수는 이런 유혹에 약한데.’
나는 당황해서 그쪽으로 달려가는데 소용이 없었다.
“언니! 우리도 격구단을 만들면 어때요?”
이미 세뇌당한 오지수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그리 외쳤다.
‘임연객을 나주원 안에 풀어두면 안 됐는데.’
나는 속으로 그리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 * *
나, 왕무, 나주 왕후, 오지수, 임연객 다섯 사람은 모여서 점심식사를 하게 됐다. 임연객이 눌러앉는 바람에 상을 하나 더 차려야 했다.
거기에 요새는 마치 전쟁이 다 끝난 것 같은 분위기라서 왕무도 군영에 일이 많이 없었다. 나주원에 머물러 있을 때가 많았다.
“오래간만에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니 좋구나.”
나주 왕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말을 들은 임연객은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그리고 또다시 격구단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라를 위해서라도 격구단을 만들어야 해. 격구 같은 걸 하면서 뛰어난 기마술을 익힐 수 있고 전장에서도 활약할 수 있어.”
“그게 말이 될까? 정식으로 군사 훈련을 받아야지. 무슨 공놀이를 한다고…….”
나는 기가 막혀서 핀잔을 줬다.
“허어. 아무것도 모르고. 훈련을 해야 겠다고 마음먹고 말을 몰아봤자 효과가 없어. 안 그렇습니까? 정윤 전하.”
임연객은 왕무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잘 모르겠……아 임 낭중이 곧 승진을 할 거란 말이 있던데?”
왕무가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어! 왕무가 대답을 명료하게 못 하는 거 보니 임연객 말이 맞나?’
나는 왕무의 표정에서 어색함을 느꼈다.
“아니 정윤 전하께서도 격구를 자주 하시고 좋아하셨는데 모를 리가 있습니까? 전하께서도 격구단 하나 있었으면 좋겠죠? 격구단이 만들어지면 전하께서 좀 선수들 훈련도 도와주시고 하면 좋을 것을.”
그러더니 임연객이 은근슬쩍 또 내쪽을 바라봤다.
“아니다. 내가 격구를 좋아한다니…….”
왕무가 임연객을 보며 손사래를 쳤다.
‘거짓말이다!’
그러나 나는 민감하게 그것을 알아챘다. 왕무를 알게 된 지도 몇 년이 지났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왕무의 언행을 보고 그 속내를 맞출 수 있었다.
‘왕무는 내 눈치를 보고 있어. 하 이거 참. 어찌 처리해야 할지.’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점심식사를 마쳤다.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처소에 돌아왔다. 임연객은 찰거머리처럼 밥을 먹자마자 여기까지 쫓아왔다.
“폐하의 부인들은 몰라도 왕후를 배출한 외척들은 다 격구단을 만들었어. 황주 황보씨, 충주 유씨 거기에 외부 활동을 안 하는 유천궁 대인도 격구단은 만들 거야. 우리도 구색은 갖춰야지. 제발.”
임연객은 애걸하듯이 말했다.
“알았어. 생각해 볼게.”
마침내 나는 두 손을 들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 마음이 가벼워졌다. 점심을 먹으면서 왕무의 표정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서 내 마음이 불편했었다.
‘생각해 보니 왕무는 무슨 낙으로 살까? 어렸을 때부터 외가인 나주의 상황이 어려워서 남들이 하는 것도 못 해보고. 격구단도 다른 외척들은 확실히 있었을 텐데 왕무만 없으면…….’
꼬마 왕무가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쓸쓸하게 지내는 환영이 내 뇌리에 계속 떠올랐다. 그 와중에 임연객이 계속 떠들어대니 버틸 수가 없었다.
“와! 그럼 만드는 거지. 잘 생각했다. 잘 생각했어.”
임연객은 내 두 손을 잡고 흔들었다.
“폐하께는 내가 내일 한림원에서 말할게. 최대한 돈을 덜 쓰는 방향으로.”
나는 한숨을 쉬며 임연객에게 말했다.
“걱정 마. 연우야.”
* * *
“폐하. 격구에 대해 잘 몰랐는데 여러 사람들로부터 의견을 듣고 마음을 바꾸게 됐습니다. 격구단을 저도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다음날 한림원에서 나는 왕건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하하하. 이리될 줄 알았다. 돈이 없어서 못 만들면 몰라도 돈이 있는데 격구단을 안 만들 수는 없지. 주변에서 가만히 있지를 않아요. 그래 하나 잘 만들어봐라.”
왕건은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또 왕건에게 놀아났어. 그래도 두고 봐라. 왕건이 조만간 놀랄 테니.’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왕건에게 굽신거리며 물러났다. 왕건은 웃으면서 여러 문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서경 유수 왕식렴이 개경에 올라오기를 청합니다. 왕숙 어른의 병세가 심상치 않아 한동안 개경에 머무르고 싶어 합니다.”
전령의 보고를 들은 왕건의 표정은 침중해졌다.
“나도 왕숙 어른의 병환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염상으로 하여금 왕식렴을 대신해 서경을 지키도록 하고 왕식렴은 서둘러 올라오게 해라. 허허. 너무 안타깝구나. 일통삼한이 코앞인데. 왕숙께서.”
왕식렴의 부친인 왕평달의 병세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었다.
‘워낙 고령이니 각오를 해야겠지. 나도 병문안이라도 가야 하나?’
왕평달은 나와도 인연이 있는 왕족이었다. 그런데 딱 왕건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럴 게 아니라 나도 병문안을 가야겠다. 연우야. 너도 함께 가자꾸나. 정윤도 부르고. 왕숙 어른은 너희와도 인연이 깊은 분이니. 왕숙 어른은 지금 스스로 구산사에 머무르고 싶어 하셔서 구산사에 계시다. 뿐만 아니라 작년에 온 삼장법사 마후라 대사도 병세가 심상치 않다는구나. 이것 참. 구산사에 머무르는 두 분께서 이러니 공교롭기도 하지. 연우 네가 그 천축 음식이라도 마련해서 가야겠다.”
삼장법사 마후라 역시 확실히 나이가 많긴 했다.
‘카레를 만들어서 가야겠군.’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왕건에게 대답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