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01화
101. 격구단
나는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동양원 부인에게 사과했다. 하지만 억울한 생각도 들었다.
‘동양원 부인은 구산사에서 나를 속인 적도 있잖아? 그때 나는 화도 제대로 못 내고 어물어물 넘어갔어. 그런데 이번 일로 동양원 부인이 이리 화를 내다니. 뭔가 불공평해.’
나는 할 만큼 했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동양원의 부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헉.”
나는 놀라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동양원 부인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항상 여유만만했다.
나른한 눈매를 하고 나를 놀리던 동양원 부인이 이렇게 울 줄은 몰랐다.
“정윤비 마마는 나와 제일 친한데…… 재암성에서 오는 사람을 위해 어찌 그리 발 벗고 나설 수 있어요?”
동양원 부인은 말까지 더듬었다.
“부인.”
나는 그대로 동양원 부인의 어깨를 껴안아 주었다.
‘앞으로도 왕건은 아내를 더 들일 텐데…… 동양원 부인은 어찌 견딜지.’
그 생각을 하니 나는 슬퍼하는 동양원 부인이 너무 안쓰러워졌다. 나는 찬찬히 동양원 부인의 등을 두드려줬다.
“내가 너무 한심하죠?”
그러다가 울음을 그친 동양원 부인이 말했다.
“아닙니다.”
“궁에 온 이후 새로운 부인이 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도 영 적응이 안 되네요. 폐하께서도 어쩔 수 없는 처지란 것을 알지만 너무 서글프네요.”
동양원 부인이 코를 훌쩍거리며 한탄했다.
‘왕건 이 나쁜 놈.’
나는 속으로 그리 부르짖으며 동양원 부인을 토닥여줬다.
“부인. 죄송합니다.”
동양원 부인의 이런 모습을 보니 안타까웠다. 하지만 나는 일은 계속할 작정이었다.
‘정혜도 어찌 보면 불쌍한 신세라서 내가 돌봐줘야 하고, 무엇보다 정혜를 위해 처소를 지으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있다.’
내가 그러고 있는데 동양원 부인은 나를 보며 말했다.
“정윤 전하께서 새 부인을 들이시면, 정윤비 마마도 지금 내 심정을 이해할 거예요. 그때는 내가 정윤비 마마를 안아드릴게요.”
“예?”
나는 약간 당황해서 반문했다.
‘왕무가 새 부인을 들인다고? 과연? 왕무가 그럴 수 있을까?’
나는 항상 내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왕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다가 문득 역사서에는 고려 2대 왕 혜종, 왕무도 왕후 외의 다른 부인을 맞이했다는 기록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왕무가 다른 부인을 들일 그런 주변머리가 있다고? 그러면 내가 지금처럼 왕무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생도 안 할 텐데.’
나는 내 앞에서 얼굴을 자주 붉히던 왕무의 얼굴을 떠올렸다.
도저히 역사서 속의 왕무와 지금 내 곁에 있는 왕무가 동일인이라 믿을 수 없었다.
‘왕무가 그럴 리 없어.’
나는 막연히 그런 믿음이 들었다.
“이거 참. 내가 경솔한 말을 했어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참 주책이지. 괜히 정윤비 마마의 마음만 어지럽혔네요.”
그러다가 문득 동양원 부인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달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괜찮습니다.”
나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양원 부인과 실랑이를 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다.
“미안해요. 괜한 소리를 해서.”
그리고 동양원 부인이 나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괜찮은데.”
“괜찮긴요. 얼굴이 엉망인데.”
동양원 부인이 그렇게 말했다.
‘거울이 없어서 모르겠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동양원 부인이 나를 안아주니 문득 정신이 들었다.
‘계속 왕무와 이렇게 지낼 수는 없어. 왕무는 정윤이니 후계자가 필요하고……필요하면 다른 부인을 들이기도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한숨소리를 듣고 동양원 부인이 나를 더 강하게 안아주었다.
* * *
어쨌든 동양원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르고 나는 힘없이 나주원으로 돌아왔다. 나주원에서 식사를 하는데 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 나주 왕후도 내가 정혜를 위한 처소를 짓는 것에 기분이 안 좋은가 봐.’
물론 나주 왕후는 딱히 나에게 뭐라 꾸중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힘없이 숟가락질을 하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겨우겨우 식사를 마치고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내 처소로 향했다. 그런데 오지수가 그런 내 뒤를 따라왔다.
“언니, 어떡해요? 재암성에서 새 부인이 온다는 소식에 어머님께서 상심이 크신 것 같아요. 거기에 언니가 새 부인을 위한 처소를 짓는 일을 맡고 있고…….”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공주마마.”
“무슨 방책을 마련해야죠.”
오지수가 말했다. 그나마 오지수는 정혜가 왕건의 새 부인으로 오는 것에 크게 동요하는 것 같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 있나요?”
내가 반갑게 묻자 오지수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새 부인을 위한 처소 공사를 하는 김에 나주원도 싹 다 고치면 어떨까요? 그래서 언니가 새 부인을 위해 일하는 것도 나주원 개축을 위한 연습이라고 둘러대면 되죠.”
나는 그 말을 듣고 고민했다.
‘이거 오지수가 평소에도 나주원을 고치는 걸 원해서 이런 방책을 내놓은 건데. 괜찮은 계책이긴 하네. 확실히 나주 왕후의 마음을 달랠 수는 있어. 아니야. 그래도 조금 더 참아야지.’
사실 나주원의 건물들이 너무 초라하긴 했다. 한번 손을 볼 필요는 있었다. 하지만 내가 노리는 바가 있어서 지금 나주원을 고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네요. 그냥 공주 마마께서 왕후 마마를 달래주세요.”
나는 오지수에게 말했다.
“예, 언니.”
오지수는 약간은 아쉬워하면서도 내 말을 잘 들었다.
* * *
나는 다음 날 학관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림원에 들어섰다.
나는 피둥피둥 살이 오른 왕건을 바라보니 기가 막혔다. 왕건 하나 때문에 진짜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는데 왕건은 태연했다. 동양원 부인이나 나주 왕후를 떠올리면 울화가 터졌다.
“연우야. 얼굴이 왜 그러니? 왜 화가 그득한 표정이니?”
그런데 왕건이 문득 나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숙이며 표정관리를 했다.
“흐음. 연우 네가 이제 학관에서 배울 건 없으니 학관은 졸업하는 것이 어떠냐? 너를 쉬게 해야 한다는 잡찬의 말을 물리치긴 했는데. 잡찬의 체면도 세워줄 필요는 있고. 그러니 영양가 없는 학관을 그만둔 걸로 잡찬의 말을 들어준 셈 치고 한림원은 계속 나오는 거지.”
왕건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왕건의 이 지시는 따르는 것이 나에게 유리했다. 왕건도 나름 나를 생각해 주고 있는 것이다.
‘하! 이런 걸 보면 또 괜찮은 사람인데.’
그러는 사이 왕건은 최언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연우를 학관에서 졸업시키는 일을 잘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아, 그리고 내가 서경에도 학관을 세울 작정인데 이 일도 한림원령이 학사들과 함께 준비해. 뭐 이젠 서라벌만 항복하면 사실상 일통삼한의 대업이 이루어지니. 교육에 신경을 써야지.”
왕건이 최언위를 보며 그런 명을 내렸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벌써 일통삼한? 내가 역사를 잘못 알고 있나? 936년에 통일이 되는데. 아직은 930년이야. 왕건이 왜 저러는지.’
다른 학사들도 마찬가지 생각인 것 같았다.
“폐하, 학교를 세우시는 일은 훌륭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견훤이 완산에서 웅거하고 있습니다. 일통삼한까지는 아직도 고비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최언위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하, 한림원령이야 군사에 대해 잘 모르니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이미 고창 전투이후 동남 3주마저 우리 고려에 다 귀부했다. 군사적으로 백제를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문제다. 오늘도 우산국에서 서신이 왔는데 우리를 따르겠다는 내용이야. 사방에서 항복하겠다는 편지가 와서 답장 보내주기가 힘들어.”
왕건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왕건의 말이 옳긴 옳았다. 신라는 전국을 9주로 나누었다. 그 중에 지금 6개주가 사실상 고려 손에 들어왔다.
특히 9주 중 한산주는 그 크기가 커서 2개 주로 계산해도 됐다. 그렇게 따지면 삼한 땅의 7할을 왕건이 장악한 상태였다.
왕건이 마음을 놓고 있는 것도 이해는 갔다.
‘흐흐흐, 하지만 견훤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야. 왕건이 이렇게 방심하고 있다가 놀랄 일이 몇 번 생길걸? 좋아. 나와 왕무는 이걸 이용해서 입지를 강화시켜야지.’
나는 왕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런 계산을 했다.
왕건이 그리 말하니 최언위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러났다. 왕건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다가 또 거울을 바라보았다.
“이것 참, 살이 빠지지가 않는군. 안 되겠다. 대내학사 김악은 와서 글 하나만 적어라.”
왕건은 김악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폐하.”
김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왕건 가까이 와서 붓을 들었다.
“이제는 난리도 끝나가니 격구대회도 재개해야지. 여러 대호족들이 격구단을 운영할 수 있게 하고, 나도 격구를 좀 하며 살을 빼야겠다. 김악은 이에 관해 조서를 적어라. 내일 어전에서 발표해야겠다.”
왕건이 명을 내렸다. 왕건의 기분은 매우 좋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김악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폐하,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뭐냐?”
“격구대회가 사라져서 저는 너무 좋았는데 그걸 꼭 재개해야 합니까? 살을 빼려면 폐하께서 혼자 격구를 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김악이 또 유학자답게 충언을 올렸다.
“아니 김악 너는 그럼 무슨 재미로 사니? 연등회도 싫어, 팔관회도 싫어, 격구도 싫어. 좋아하는 게 뭐야?”
“그야 뭐 책 읽고 살면 재밌습니다. 돈도 안 들고. 격구대회를 열면 격구단에 돈이 엄청 들어가지 않습니까?”
김악의 대답을 듣고 왕건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기껏 구정을 지어놨는데, 요 몇 년 격구대회를 제대로 못 열어서 손해를 봤다. 이제는 나라를 정상화시켜야지. 조서나 적어.”
“예, 폐하.”
김악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붓을 들어 글을 써 내려갔다. 그 사이 왕건은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연우야. 너도 격구단 하나 만드는 게 어떠냐? 돈도 많지 않니? 내가 외척들도 격구단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이다. 연우 너도 하나 운영할 수 있다.”
“격구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릅니다. 폐하께서는 격구단을 안 만드십니까?”
내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마음이야 나도 만들고 싶지. 그런데 내가 격구단을 만들면 누가 그 격구단과 제대로 경기를 할 수 있겠느냐? 상대가 다 져주지. 그럼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나와 왕족들은 끼지 않기로 했다.”
왕건이 안타깝다는 듯이 대답했다.
“제가 격구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함부로 끼기 어렵습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빠져나갔다.
“아쉽구나.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얼마든지 부탁해라. 하하하.”
왕건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런 왕건을 보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부탁은 무슨. 이미 통일이 거의 다 됐다고 생각하고 호족들 힘을 빼려고 격구대회를 여는 거면서.’
격구단을 만들면 김악 말대로 돈이 엄청 들어갔다.
격구는 이 당시에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경기가 열리면 구경하러 오는 관중의 규모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전광판이 없는 시대에 수많은 관중들이 격구 경기를 잘 볼 수 있게 격구 선수들과 말들을 엄청 화려하게 꾸며야 하는데. 이게 다 돈이지. 거기에 이런 게 또 경쟁이 붙으면 돈을 엄청 쏟아붓게 된다고.’
외척들과 대호족들이 격구단을 운영하기 시작하면 여기에 돈을 쓰느라 사병 쪽에 갈 돈은 줄게 되는 것이다.
왕건이 자신과 왕족들은 격구단을 안 만든다고 쏙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 그 의도야 뻔했다. 역사를 보면 이런 식으로 귀족 세력들의 힘을 빼놓는 사례가 많았다.
‘나는 절대 안 속아 넘어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