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99화
99. 오해
‘나는 팔관회 이후 시를 논할 때 최치원의 정체를 눈치챘다. 그걸 최치원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군. 놀라운 재주야.’
그 사이 최언위는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중얼거리고 있었다.
“허허허. 정윤비 마마께서 최승우를 꺾었을 때 알아챘어야 했습니다. 지금 삼한 땅에서 최승우를 손쉽게 꺾을 수 있는 사람은 고운 사형 밖에 없습니다. 아마 정윤비 마마께서도 사형의 가르침을 받아 최승우를 꺾은 것 아닙니까? 그 이후 여러 가지 일들도 그렇고.”
최언위는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아니 방금 최치원이 본인 입으로 팔관회 이후 정체가 드러났다고 말했고 내가 고개까지 끄덕였잖아. 그런데 최언위가 저런 생각을 하다니.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든 모양이군.’
나는 최언위를 바라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최언위가 하는 오해가 딱히 나에게 불리한 것도 아니야. 내가 미래지식을 이용해 연거푸 활약을 한 것에 대해 사람들이 의혹을 품을 수 있어. 그런데 최언위가 말한 것처럼 내가 최치원의 가르침을 받아서 그랬다고 하면 그런 의혹을 해소할 수 있다. 최치원의 제자란 오해를 받으면 오히려 나중에 큰 득이 되지.’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고 최언위가 오해를 하게 내버려 뒀다.
당황한 것은 최치원뿐이었다.
“그건 자네의 오해네. 나는 최승우와의 대결 때 손을 쓴 것이 없어. 정윤비 마마께서 최승우를 이겼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놀랐네. 그때부터 정윤비 마마께 관심이 가서 이것저것 묻다가 내 정체가 드러난 것 같군.”
최치원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나는 그 곁에서 일부러 애매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사형이 그런 식으로 세상일에 끼어든 것을 숨기고 싶어 하시면 사형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최언위는 나와 최치원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최치원의 말을 안 믿는 기색이었다.
“허허허. 그래. 그건 그렇고 정윤비 마마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최치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저 선생께서 이제는 이름을 드러내고 고려에 머물러 계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내가 곤경에 처해 있는데 선생이 모습을 드러내시면 그 문제가 해결됩니다.”
나는 간곡한 어조로 호소했다.
왕건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시끄러운 일을 만들어 보라고 했다. 그런데 신비롭게 실종된 최치원이 모습을 드러낸 것만큼 화제가 될 일이 없었다.
최치원이 이름을 드러내면 고려 전체가 한동안 난리가 날 것이다.
‘거기에 이러면 사람들이 최언위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최치원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아는 거지. 그런 나를 한림원에서 쫓아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러면서 나는 최치원의 얼굴을 보고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최치원의 정체가 드러났고 최언위가 이 사실을 안 이상 최치원은 고려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최치원이 어디로 떠나려고 하면 모든 고려 사람들이 붙잡을걸. 흐흐흐. 최치원은 내 말대로 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최치원도 아마 이 사실을 깨달은 것 같았다.
“허허허. 팔관회 이후 찜찜한 기분이 들었을 때 바로 떠났어야 했는데. 정윤비 마마께서 어린 시절 만난 기인이 남긴 시가 몇 수 있다고 하셔서 그게 보고 싶어서 머뭇거리다 이리되었습니다.”
최치원이 가볍게 탄식했다. 확실히 나는 최치원의 정체를 눈치챈 이후 최치원을 붙들어두려고 계속 은근슬쩍 이규보의 시에 대해 거론했다.
아마 그런 내 계책이 통한 모양이었다.
“사형, 그럼 고려에 계속 있으실 겁니까?”
최언위는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최치원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대답했다.
“잘됐습니다. 폐하께서도 크게 기뻐하시고 사형을 중용하실 것입니다.”
최언위는 최치원의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최언위의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내가 무슨 낯으로 출사를 하겠나? 그것은 말도 안 되네. 나는 내 조국이 이리 무너지는 것을 막지도 못했어. 나는 너무 어린 시절에 당에 유학을 가서 삼한 말을 어눌하게 하는 신세네. 이런 내가 신라를 살리겠다고 나섰으니 사람들이 따를 리 없지. 이런 내가 무슨 출사란 말인가?”
최치원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확실히 최치원의 삼한 말은 억양이 좀 어색하긴 했다. 나도 그래서 처음에는 최치원이 왕창근의 친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이 고려는 다를 것입니다. 어쨌든 사형께서 정체를 숨기긴 했어도 개경에 오신 것을 보면…….”
최언위가 말끝을 흐렸다.
“세상이 어찌 바뀌는지 궁금해서 이 개경에 온 것이네. 그냥 어떤 세상이 열릴지 조용히 지켜보다가 생을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그러더니 최치원은 약간은 나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어쨌든 선생의 이름이 드러났으니 계속 이 상단에 계시기 어려워졌습니다. 우선 상산저로 가시지요. 앞으로 시에 대해 논하려면 친정인 상산저에 선생이 계셔야 제가 오가기 편합니다.”
내가 그렇게 일을 밀어붙였다.
‘이규보의 시를 미끼로 던졌으니 최치원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최치원이 정치에 대해서는 의욕을 잃은 모양이야. 그럼 최치원에게 남은 것은 문학밖에 없지. 거기에 최치원이 사치를 부리는 성격도 아니라서 좋아. 밥할 때 밥 한 그릇 더 만들고 종이나 붓 같은 것만 넉넉히 대주면 된다. 그런데 최치원이 상산저에 머무르게 되면 나와 상산의 위상이 엄청 높아진단 말이지. 흐흐흐.’
과연 내 생각대로였다.
“그럼 정윤비 마마께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최치원은 체념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밖에 수레가 있습니다. 자 선생을 모셔라.”
나는 나를 경호하는 군졸들에게 명했다. 최치원은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 수레에 올랐다. 나도 따라 오르려고 하는데 최언위가 나를 붙들었다.
“저는 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다만 그사이에 사형이 또 떠나려 할 수 있으니 잘 붙잡아주십시오.”
최언위는 그런 당부를 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 *
상산저는 발칵 뒤집혔다. 나와 최치원이 도착하자 상산부인은 어쩔 줄 몰랐다.
“아니 연우야! 이런 귀한 손님을 모시고 오려면, 며칠 전에는 알려줬어야지.”
상산부인은 허둥대며 나를 탓했다. 하인들이 별채를 청소하느라 난리였다.
“그냥 평소에 손님을 맞을 때처럼 하면 됩니다. 어머님.”
“어찌 그럴 수 있니?”
상산부인은 그리 대꾸했다. 최치원은 매우 부담된다는 표정으로 별채에 들었다. 그런데 곧이어 하인들이 달려와 외쳤다.
“큰일 났습니다. 폐하의 어가가 곧 상산저에 온다고 합니다. 지금 의전을 위해 천우위 상령 군사들이 저택 앞 거리에 쫙 깔려 있습니다. 이웃사람들도 모두 놀라서 무슨 일인지 묻고 있습니다.”
나와 상산부인은 재빨리 담장 쪽으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과연 깃발을 든 상령 군사들이 서 있었다.
‘왕건이 직접 오려는 모양이군. 하긴 삼장법사 마후라가 왔을 때도 직접 마중 나간 게 왕건이다. 최치원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달려올 수밖에. 다만 오늘은 그래도 좀 쉬고 내일 올 줄 알았는데.’
왕건도 마음이 급하긴 한 모양이다.
“에구머니나. 이를 어째! 준비한 게 하나도 없는데.”
상산부인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면서도 상산부인은 하인들을 지휘해서 왕건을 맞이할 최소한의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차를 끓이고 다과를 준비하고 다실을 치우는 사이 마침내 왕건이 당도했다.
* * *
상산저 사람들은 모두 저택 문밖까지 나가서 왕건을 맞이했다. 왕건은 나를 보자마자 외쳤다.
“아니 나는 적당히 시끄럽게 만들라고 명을 내린 건데. 이건 뭐, 시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나라를 발칵 뒤집어놨구나.”
“송구합니다.”
나는 짐짓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아니다. 그럴 필요는 없고 잘했어. 그런데 내가 시끄럽게 만들라고 하자마자 바로 터뜨린 걸 보면 미리 준비를 해놨다는 건데. 연우 네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쟁여놓은 계책이 몇 개 있지? 그게 뭐니? 나한테만 좀 말해주렴.”
촉이 좋은 왕건이 그런 식으로 캐물었다.
“최 선생의 정체는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쟁여놓은 계책 같은 건 없습니다.”
나는 당황해서 손사래까지 치며 대답했다.
“뭐 그건 차차 알아가면 되고. 어쨌든 최 선생이 모습을 드러내다니.”
그러더니 왕건은 최치원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최치원 역시 왕건을 맞이하기 위해 대문 밖에 나와 있었다.
왕건은 아예 최치원을 향해 읍을 했다. 삼한 땅에서 최치원의 명성은 대단했다.
거기에 내가 다년간 관찰한 결과 왕건은 명망 높은 사람들을 모으기 좋아했다. 그래서 파격적으로 예를 갖춘 것 같았다.
“최 선생을 이리 만나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그런 왕건을 보고 최치원은 당황해서 외쳤다.
“폐하 이러지 마십시오.”
“자 우선은 들어가서 여러 일을 논해봅시다.”
왕건은 그리 말하며 사람들을 이끌고 상산저 안으로 들어갔다.
* * *
상산저 안 다실에는 여러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왕건이 가장 상석에 앉고 그 맞은편에는 최치원이 앉았다.
왕건이 모두 편하게 앉으라고 해서 나와 상산부인 역시 의자에 앉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임희도 우리 곁에 앉았다. 이외에 왕건을 따라온 최언위를 필두로 한 학사들도 둘러앉았다.
“최 선생을 위해 조정에 자리를 곧 마련하겠습니다. 우리 고려국의 태사로서 조정에 나와 주십시오. 이외에 저택이며 적당한 식읍도 준비하겠습니다.”
착석하자마자 왕건은 운을 떼었다.
“폐하, 폐하의 후대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소생은 진성왕 폐하의 큰 은혜를 이미 입었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도 못 했고 무너지는 신라를 구하지도 못했습니다. 죄 많은 소생이 다시 출사할 수는 없습니다. 생계도 홀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상단에서 일하며 모아둔 가산이 있습니다.”
최치원은 결연한 표정으로 아예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우선 일어나십시오. 허허허. 알겠습니다. 최 선생의 뜻을 존중하겠습니다.”
왕건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눈치가 빠른 왕건이라 최치원의 뜻이 몹시 굳은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최치원은 그제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나이가 많으신데 홀로 지내시는 것은 안 됩니다. 큰며느리와 인연이 있는 것 같으니 이 상산저에 머무르십시오. 사돈, 내가 비용을 댈 테니 부탁 좀 합시다.”
왕건은 임희를 보며 농담조로 말했다. 짐짓 상산백이라 안 부르고 사돈이라 부르며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한 것 같았다.
다만 그런 왕건의 농담에 임희는 혼비백산해서 말했다.
“최 선생을 모시게 되면 소신에게 오히려 영광입니다.”
“허허허. 어쨌든 그동안 큰며느리가 항상 놀라운 재주를 보여줘서 놀랐는데 확실히 뛰어난 스승이 뒤에 있었습니다.”
왕건은 대화의 방향을 그쪽으로 돌렸다. 아마 왕건도 최언위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정윤비 마마의 재주는 타고난 것입니다. 소생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저도 정윤비 마마의 활약을 듣고는 크게 놀랐습니다.”
최치원은 그렇게 진실을 밝혔다. 그 순간 나는 일부러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왕건은 나와 최치원의 얼굴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항상 최 선생의 뜻을 존중합니다. 그렇게 믿겠습니다.”
그러나 왕건은 최치원의 말을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최치원은 사람들이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자 억울한 표정이었다.
왕건은 흐뭇한 표정으로 잡담을 이어나갔다. 최치원이 조정에 나오지 않더라도 고려에 있는 것만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었다.
‘아마 사람들은 고려에 천명이 있다는 생각을 더 하게 되겠지. 신비롭게 사라진 최치원이 다시 등장했으니. 나와 왕무에게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흡족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