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96화
96. 속내
아찬 김굉과의 연회는 별 탈 없이 이어졌다. 사실 술자리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김굉이 상당히 무례하게 굴었다.
하지만 유긍달이 그런 김굉 곁에 붙어서 저자세로 나오니 모두 화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나서서 김굉을 탓하다가 유긍달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모두가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다.
‘하, 이거 참. 어쩌지?’
나는 그런 장내의 분위기를 느끼며 술을 들이켰다. 갑자기 현대의 취준생이었을 때 일이 생각났다.
‘나는 대학원생 생활만 해서 면접을 볼 때 이야기할 거리가 없었지. 그런데 내 옆에 앉아 있는 지원자는 온갖 인턴이며 대외활동을 많이 해서 줄줄이 그걸 자랑하고.’
그때 나는 면접장에서 그냥 뛰쳐나오고 싶었다. 나 같아도 나 같은 사람은 안 뽑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대로 준비도 안 하고 면접을 보겠다고 온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는데 앉아 있으려니 참 곤욕스러웠다.
지금 신라 사신 곁에서 접대를 하는 유긍달의 모습을 보니 딱 그때 그 심정이었다.
‘내가 신라 조정이라도 유긍달을 믿고 그쪽과 혼인을 하겠다. 내가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알량한 꾀를 쓴다고 뒤집을 수가 없다.
신라 왕실과의 혼인 문제는 이미 결판이 난 거나 다름없다.’
그 생각을 하니 나는 울화가 터져서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계속 술을 들이붓는 내 오른 손목을 누군가가 강하게 쥐었다.
“국선! 술이 너무 과합니다. 일전에 속이 좋지 않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왕무가 나선 것이다. 왕무의 힘이 좋긴 좋았다. 내가 술잔을 내 입에 가져가려고 했는데 진짜 팔이 꼼짝도 안 했다.
나는 재빨리 왼손으로 왕무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앗!”
그러자 간지러움을 못 참은 왕무가 얼굴을 붉히며 손의 힘을 풀었다. 나는 그 틈에 손을 빼서 재빨리 술을 들이켰다.
‘이게 내 지략이다. 흐흐흐. 오늘은 좀 술을 마셔야겠어. 기껏 구상해낸 신라 왕실과의 일이 시작도 하기 전에 나가리가 됐으니. 흐흐흐.’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국선!”
왕무가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그렇게 외쳤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면서 팔을 내밀어 내 어깨를 끌어당겼다. 나는 어느덧 자연스럽게 왕무의 품에 얼굴을 기대게 되었다.
‘근육 때문에 베개용으로 딱 좋아. 편해.’
그런 생각을 하니 졸음을 몰려왔다. 원래 나는 이 연회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으려 했다.
그런데 어차피 일이 유긍달의 뜻대로 될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자 긴장이 풀렸다. 그냥 빨리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나는 졸린 눈으로 유긍달을 바라보았다. 김굉 곁에 붙어서 웃는 유긍달을 보니 다시 옛날 생각도 나고 짜증도 났다.
그러다가 퍼뜩 나는 정신이 들었다.
‘지금 내가 뭐 하는 짓이지?’
나는 술에 취해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왕무에게 반쯤 안겨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왕무에게 너무 거리낌 없이 스킨십을 하고 있었다.
‘김선우! 정신 차려. 너가 이러면 안 되잖아.’
나는 속으로 그렇게 부르짖으며 왕무에게서 몸을 떼었다. 나는 흐트러진 머리를 양손으로 정리하며 왕무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윤 전하. 제가 너무 무례했습니다.”
“국, 국선? 괜찮습니다. 무례도 아닙니다.”
갑자기 돌변한 내 태도에 왕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런 왕무의 모습을 보니 나는 가슴이 저미듯이 아팠다.
‘이게 뭐야. 괜히 나 때문에 왕무가 헷갈려 하고 있어. 왕무야 한창 나이 때 내가 곁에 붙어 이러면 마음이 흔들리는 게 당연해. 그런데 나는 다르잖아. 나는 김선우고 남자인데 그동안 왜 그랬지? 나는 나이도 왕무보다 훨씬 많은 어른이야. 내가 잘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들을 떠올리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앞으로는 제대로 처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연회장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유긍달과 이야기를 나누며 술을 들이켜던 아찬 김굉이 꾸벅꾸벅 졸더니 잠들어버린 것이다. 다른 고려 중신들도 지쳐 보였다.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끝나는 분위기였다.
“자, 이만 연회를 끝냅시다.”
연회를 관장하는 왕무가 그런 분위기를 읽고 외쳤다.
“명을 받듭니다.”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반갑다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사람들이 각자의 처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와 왕무도 어색한 가운데 처소로 돌아왔다. 나와 왕무는 그동안 같은 처소를 쓰고 있었다. 물론 왕무는 나와 따로 침상을 썼다.
“나는 군영을 감독할 겸 군사들과 함께 지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를 느꼈는지 왕무가 그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정윤 전하.”
나는 왕무에게 더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럼.”
왕무도 나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등을 돌렸다. 그런 왕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허전함을 느꼈다.
‘다정한 말도 없고 손도 서로 안 잡고, 그동안 그런 것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어. 그게 좋긴 좋았는데. 어느새 이상한 관계가 되어버렸어. 어쨌든 형식상으로 왕무와 부부가 되었는데 언제까지 이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
나와 왕무 사이는 지금 부부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런 관계였다.
“다 나 때문인데. 하아.”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 * *
나는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정윤비 마마, 정윤비 마마. 일어나십시오.”
그런데 시녀가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고려군이 고창성에 오래 주둔하면서 왕건은 나를 위해 고창 출신의 시녀를 붙여주었다.
“왜?”
나는 짜증이 나서 외쳤다. 창밖을 보니 아직도 새벽이었다.
‘아직 깰 시간도 아니고, 아니 무엇보다 급한 일도 없어서 내가 늦잠을 자도 되는데 왜 이래?’
나는 고창 출신의 시녀를 노려보았다.
“폐하께서 정윤 전하와 정윤비 마마를 급하게 부르십니다. 정윤 전하께서 여기 안 보이셔서 군영에도 사람이 급히 달려갔습니다.”
“뭐 폐하가?”
나는 이를 갈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진짜 더 자고 싶은데 잘 수가 없으니 이가 갈렸다.
‘왜 하필 오늘 이래?’
확실히 어제 술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몸이 힘들었다. 그래도 시녀들의 도움으로 씻고 옷을 챙겨 입은 나는 왕건의 처소 쪽으로 달려갔다.
“정윤비 마마 오셨습니까?”
한림원령 최언위가 나에게 따뜻한 인사말을 건넸다. 왕건의 처소에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왕무, 유긍달, 선필, 최언위 같은 사람들이었다.
‘내가 제일 늦게 왔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왕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를 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몸을 일으켜 예를 올렸다.
“오늘은 편한 분위기 속에서 일을 논의하려고 하니 모두 앉도록.”
왕건은 그런 명을 내렸다.
‘편하게 해주려면 왜 새벽에 사람을 불러?’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예, 폐하.”
그러면서도 나는 다른 사람과 보조를 맞추어 입으로는 그리 말했다.
“어제 연회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나도 다 들었다. 신라 사신이 매우 고깝게 굴었지? 뭐 나도 익히 예상했다. 서라벌 사람들은 예전부터 그랬어. 내 앞에서도 아니꼽게 굴던 사람들이야. 사신으로 온 사람마다 충고랍시고 나더러 이래라저래라하고. 아니 신라에 제대로 된 군사도 없는데 뭘 믿고 저러는지 황당했다. 처음에는 일부러 저러나 생각했는데 몇 년 보니까 그것도 아니야. 원래 그런 족속들이야.”
왕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
장내의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눈치만 봤다.
“그런데 일통삼한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선 그것도 다 받아주는 게 답이다. 어쩌겠어? 그냥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다 참아야 해. 이제 견훤의 기세를 꺾었으니 신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아니꼬운 서라벌 인간들과 협상을 할 만한 비위 좋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제 짐짓 나는 연회장을 비웠다. 여러 중신들 중 이 일을 맡을 만한 사람들을 알아내기 위해. 그게 그대들이다.”
왕건이 말했다.
장내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어제 신라 사신 김굉의 무례함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왕건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역시 신라 사신에게 잘 대해줘야 한다는 내 생각이 맞았어. 그 덕에 이 일에 낄 수 있게 됐군.’
나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건의 말을 듣고 유긍달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신라를 어찌 처리하실 요량이십니까?”
그러자 왕건은 문득 나를 보며 말했다.
“연우 네가 나를 볼 때마다 견훤과 신라에 대해 한 말이 있다. 그것을 다시 한번 말해보거라.”
“견훤도 신라왕도 폐하께 스스로 항복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나는 슬며시 주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연우의 말대로다. 견훤의 항복은 확실히 무리다. 하지만 신라의 항복은 받아내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고려 문자명왕에게 부여가 귀부하고 신라 법흥왕에게 금관국이 항복한 것처럼, 신라가 우리 고려에게 굴복하는 것이 가장 보기 좋다. 그것도 군사동원 없이 그래야 해. 서라벌을 고려군이 둘러싸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은 의미 없다.”
왕건이 그렇게 자신의 의중을 밝혔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전에 그런 사례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선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보께서 많이 힘을 써주셔야 합니다. 조만간 우리 고려군이 개경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상보께서 계속 재암성에 주둔하며 신라 조정과의 일을 맡아주십시오.”
왕건이 선필에게 정중히 말했다.
“명을 받듭니다.”
선필이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실 어떻게 신라를 굴복시킬지 구체적인 방안은 나도 아직 떠올린 것이 없다. 오늘은 그저 내 뜻만 밝히려고 그대들을 불렀다. 그러니 그대들도 좋은 방안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진언을 올리도록. 나는 잡찬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잡찬이 충주의 진골들과 인맥을 만들어 놨으니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인맥을 바탕으로 계속 서라벌 쪽과 접촉하도록 하라.”
“예, 폐하.”
유긍달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정윤과 정윤비도 신라를 항복시켜야 한다는 큰 구상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
왕건은 우리 쪽을 보며 당부를 남겼다.
“예.”
“한림원령 역시 서라벌의 6두품들과 긴밀하게 의견을 교환해 주시오. 어떻게든 신라 내에서 고려에 귀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여론을 일으켜야 하니.”
“알겠습니다.”
최언위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럼 됐다. 이제 고창에 더 머물러 있을 필요는 없다. 신라와 한번 접촉해 보려고 여태 주둔한 것이다. 오늘은 군사들로 하여금 짐을 싸게 할 것이고 내일 개경으로 출발할 것이다. 아예 정윤이 전군에 명을 내려 철군 준비를 하라. 개경을 너무 오래 비웠구나.”
왕건은 그런 명을 내렸다.
장내의 사람들은 모두 물러났다. 다만 나는 왕무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잠시 기다리자는 신호를 보냈다.
다른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우리가 기다리고 있자 왕건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왕가의 지하통로에서 폐하의 선대와 신라 조정 사이에 껄끄러운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혹여 폐하께서 그 일은 어찌 처리하실지 궁금해서…….”
나는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말했다. 괜히 왕건의 말만 믿고 너무 친신라적으로 나섰다가 왕건이 나중에 선대의 원한을 운운하면 위험할 수 있었다.
‘어쩌면 유긍달은 이 사실을 모르니 이걸 이용해 보내버릴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음흉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왕건이 상쾌하게 말했다.
“난 어릴 적에 할아버지 얼굴도 못 봤다. 절에 들어가 계셔서 진짜 한 번도 못 만났어. 다만 숙부님께는 도움을 워낙 많이 받았다. 그래서 숙부님 청이라서 할머니를 위해 구산사까지 지었다. 이젠 다 끝난 일이다. 그걸 가지고 신라를 때려잡을 수는 없다. 그럼 일통삼한이 안 된다. 너희들도 그냥 이 사실을 묻어두고 입 밖에 내지 말거라. 특히 정윤은 명심해라. 나중에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이 일을 떠올리면 안 된다.”
왕건은 우리 얼굴을 보며 신신당부를 했다.
“알겠습니다.”
나와 왕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왕건이 다시 한번 정윤에게 왕위를 물려줄 거라 확언을 했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