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95화
95. 진골
“고려군이 고창에서 견훤을 크게 깨뜨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 폐하께서도 기뻐하셨습니다. 이에 국서와 예물을 바칩니다.”
신라 사신으로 온 아찬 김굉이 왕건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하하하 신라에서 이리 축하해 주니 고맙소. 서라벌은 평안합니까?”
왕건이 웃으면서 물었다.
“견훤의 군사들이 모두 달아나서 서라벌은 평온해졌습니다.”
김굉의 말을 듣고 왕건은 더 크게 웃었다.
“으하하하. 참 다행입니다. 견훤을 몰아낸 것을 축하합시다. 여봐라! 연회를 준비하라. 정윤과 정윤비를 비롯해 여러 중신들도 빠짐없이 참석하라.”
왕건은 그런 명을 내렸다. 어차피 왕건이 신라 사신을 부른 것은 고려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따로 논의할 실무적인 일은 없었다.
그래서 신라 사신에게 인사를 받자마자 왕건은 연회를 열라고 명한 것이다.
‘아, 안 그래도 속이 불편한데 또 연회? 나는 밥을 조금만 먹어야지.’
나는 그런 생각이 들어 못마땅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연회가 열릴 전각에 으리으리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왕건이 가장 상석에 앉고 그 아래 나와 왕무가 앉았다. 그 외의 중신들도 서열대로 앉았다. 신라 측에서도 아찬 김굉을 필두로 여러 사람들이 와 있었다. 연회가 시작되자 왕건은 신라 아찬 김굉에게 직접 술을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김굉은 조심스레 술을 받았다. 왕건 역시 술을 한 잔 먹고 잠깐 앉아 있더니 말했다.
“내가 요사이 몸이 안 좋아 술이나 음식을 많이 못 먹는다. 일전에 의원이 나에게 식사를 줄이라고 말한 사실은 그대들도 알고 있을 거고. 그러니 나는 돌아가 쉬겠다. 정윤이 나 대신 신라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라. 중신들도 좀 편하게 즐기며 신라 사람들과 친분을 쌓으면 좋겠다. 서로 통성명도 하고. 허허허.”
그러더니 왕건은 몸을 일으켜 연회장을 떠났다.
“폐하, 푹 쉬십시오.”
왕무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런 왕건을 배웅했다.
왕건이 과식 때문에 몸이 안 좋다고 며칠 전에 말한 적도 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이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몹시 이상함을 느꼈다.
‘세력이 아주 작은 호족의 사신들도 왕건이 일일이 시간을 내서 다 만나줬다. 살이 지금처럼 뒤룩뒤룩 찔 때까지 그랬던 사람이 신라 사신이 왔는데 자리를 비운다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연회장에서는 고려 중신들과 신라 사신들 간에 통성명이 이루어졌다.
“잡찬 유긍달이라 합니다.”
“나는 대상 황보제공이다.”
여러 중신들이 신라 사신들에게 이름을 밝혔다. 신라 사신들도 자기소개를 했다.
‘아찬 김굉도 그렇고 다 김씨가 왔네. 신라 쪽에서 진골 김씨들로 사신단을 꾸렸군.’
신라 사신들은 고려 중신들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당연히 나와 왕무는 신분이 특별한 만큼 굳이 자기 이름 소개를 안 해도 됐다.
‘아, 정윤비가 되니 좋긴 좋구나. 공식서열은 이제 내가 높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연회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보 박수경이라 하오.”
그러다가 박수경의 이름을 듣자 신라 아찬 김굉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박씨? 그럼 진골의 후손이시구려.”
김굉은 반갑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 시기 박씨는 모두 신라를 세운 박혁거세의 후손들이었다. 그래서 성씨만 들어도 신라계임을 알 수 있었다.
“뭐 그렇게 됩니다.”
박수경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지금 어디 살고 계시오?”
김굉이 꼬치꼬치 캐물었다.
“평주요.”
“참 아쉽소. 소경에라도 계셨으면 확실히 진골이라 볼 수 있는데 당신 가문은 지금 득난의 신분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도 제가 서라벌에 가면 그대와 그대의 가문이 진골 신분을 회복할 수 있도록 힘을 쓰겠습니다. 큰일이긴 하지만 폐하께서 결단만 내리시면 가능할 것입니다.”
김굉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박수경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박수경은 고려 내에서 잘 나가고 있었다.
박수경은 군략에 능한 사람이라 군부에서 위상이 높았다. 왕건의 장인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박수경의 가문이 예전에 진골 신분이었던 것은 맞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박수경은 황당해하고 있었다.
“너무 부담 갖지 마시오. 내 기필코 폐하께 청을 올리겠소.”
하지만 김굉은 자신이 마치 엄청난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말했다.
“허허허.”
박수경은 난감해져서 웃었다. 다만 장내에는 무슨 말이 오가는지 이해를 못 한 사람도 있었다.
“득난이 뭐요? 박 장군이 왜 득난이야?”
황보제공이 곁에 있는 유긍달에게 물었다. 황보제공은 서열이 높아서 나와 왕무 쪽에 가까이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황보제공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득난은 6두품이오.”
그러자 재빨리 유긍달이 그렇게 말해줬다.
“6두품이라 하면 되지 왜 굳이 득난이라고 하는지.”
그런데 그사이 김굉은 선필과 인사를 하고 있었다.
“재암성주 선필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김굉은 흐뭇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선필, 네가 견훤과 싸우는데 나름 활약을 했다고 들었다. 너를 통해 고려와 연락도 할 수 있었다. 승부 출신이라 들었는데 과연 능력이 있다. 득난의 신분임에도 조정을 위해 애를 쓰니 장하다. 내가 서라벌에 가서 네 공에 대해 말하겠다.”
그러더니 김굉은 선필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 모습을 본 고려 중신들은 모두 안색이 변했다. 선필은 이번에 왕건의 장인이 되었다. 고창 전투 때도 지도를 가져와서 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고려 중신들은 선필에게 어느 정도 고마워하고 있었다.
거기에 선필은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왕건이 선필을 상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중년의 나이인 김굉이 선필에게 저러니 고려 중신들이 약간 화가 난 것이다.
그런 김굉을 보며 선필은 쓴웃음을 짓더니 두 손을 모아 예를 올리며 말했다.
“예, 아찬 어른. 감사합니다.”
“그래.”
김굉은 흐뭇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 이거 심상치 않은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재빨리 나섰다.
“아찬. 선필 공은 고려의 국구이며 우리 폐하께서 상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예, 이 사람의 공이 크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김굉은 내 말을 듣고 약간 의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내가 굳이 왜 끼어든 건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내가 나선 덕에 장내의 분위기는 누그러들었다. 통성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곁을 힐끔 바라봤다.
왕무는 약간 불쾌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김굉의 행동에서 미묘한 불쾌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레 왕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왜 그러시오? 국선.”
나는 유긍달 등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듣지 못하게 왕무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흐흐흐. 나는 왕무한테 이렇게 귓속말을 해도 되지만 유긍달과 황보제공은 절대 서로 이러지 못할걸?’
황보제공이 유긍달 귀에 대고 속닥거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속으로 키득거리면서 왕무에게 속삭였다.
“신라 사신이 아마 연회장에서 곧 사고를 칠 것 같은데 그때 정윤 전하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저 사람을 구해주세요. 기다리고 있다가 재빨리 움직여야 해요.”
이런 판을 깔아둔 왕건의 의도가 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진 미래지식을 바탕으로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신라 쪽에는 호의적으로 대하는 게 답이라 생각했다.
‘역사서를 보면 왕건이 신라에게 엄청 퍼주고 결국 항복을 받아낸다. 왕건의 의중이 그쪽에 있다면 신라에 잘 대해주는 게 우리에게 유리하다.’
그러면서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왕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고창 전투 무렵 왕무는 한번 내가 잡은 손을 뺐다.
그 이후 나는 왕무에게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떨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마 왕무가 또?’
내가 왕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왕무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왕무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렇도록 하겠소. 확실히 저 사람이 일을 터뜨릴 것 같소.”
왕무의 숨결이 내 귀에 느껴져서 나는 온몸이 간지러워졌다. 약간 부끄럽기도 해서 나는 곁눈질로 유긍달 쪽을 살폈다.
유긍달은 나와 왕무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가나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연회장에선 최언위가 아찬 김굉과 인사를 나눌 차례가 되었다. 고려 중신들은 모두 벼르는 표정이었다.
최언위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홍유가 끼어들어서 말했다.
“이분은 우리 고려의 한림원령으로 삼한 땅에 그 명성을 날리는 최언위 공이오. 우리 고려국 왕공귀족의 자제들은 모두 한림원령의 가르침을 받고 있소.”
홍유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선필이야 자신을 재암성주로만 소개했다. 그래서 그때는 김굉이 잘 모르고 진골 신분을 믿고 6두품 출신인 선필에게 무례하게 대했다고 사람들이 억지로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홍유가 나서서 최언위의 관직을 거론했다. 이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그럼에도 김굉이 무례하게 굴면 가만히 안 있겠다는 분위기였다.
“최언위입니다.”
이 분위기를 느낀 최언위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그런데 김굉은 태연하게 그런 최언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너의 이름은 예전부터 들어왔다. 네가 글재주로 신라의 이름을 떨쳤구나. 앞으로도 계속 정진토록 하라. 수고가 많다.”
최언위는 난감한 기색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다른 고려의 중신들은 크게 노했다.
최언위의 관직이며 위상을 자세히 밝혀 경고를 줬는데도 그걸 무시하고 저러니 열이 받은 것이다.
“자 아찬은 가까이 와서 술을 받으라.”
그 순간 왕무가 벌떡 일어나더니 외쳤다.
“예.”
아찬 김굉은 태연한 표정으로 왕무에게 가까이 왔다. 그 바람에 화를 내려던 고려 중신들은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연회장에 사람이 많은데 일일이 통성명을 하니 힘들 것 같다. 우선은 좀 먹고 마시며 쉬도록 하자.”
왕무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왕무의 명대로 통성명이 중단되니 사람들은 자리에 앉아 먹고 마시기 시작했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냉랭했다.
고려 중신들은 당연히 화가 나 있었다. 거기에 신라 사신들도 고고하게 앉아서 자기들끼리만 대화를 나누었다.
따지고 보면 그나마 김굉이 따로 말을 건 사람은 진골의 후손이거나 6두품 출신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신라 기준으로는 평민들이니 아예 말도 안 건 거 아닌가?’
나는 그런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장내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연회가 이어지는데 문득 유긍달이 몸을 일으켜 아찬 김굉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찬. 나는 유긍달이라 합니다.”
그러더니 유긍달은 김굉 앞에서 읍을 하며 말을 걸었다. 그 모습을 본 장내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유긍달은 고려 내에서 위상이 높았는데 김굉에게 저자세를 취한 것이다.
나도 유긍달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궁금해서 상황을 유심히 살폈다.
“아 그러십니까?”
김굉은 데면데면하게 짧게 대답하고 나서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충주를 지금 맡고 있는데 충주에 살고 있던 김행상 어르신을 아십니까?”
유긍달이 대뜸 그런 말을 꺼냈다.
“아 그 어르신이 살아계십니까? 확실히 그분이 중원경에 계셨는데 사방에 도적이 일어 소식을 못 들었습니다. 그분을 알고 계십니까?”
그러자 김굉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예, 내가 충주를 지키며 도적들과 싸울 때 그 어르신의 가르침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분 일가들도 내가 다 알고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허허허. 사방의 도적들 손에 5소경의 진골들은 모두 전멸한 줄 알았는데 중원경은 무사했군요. 혹시 김찬은 어찌 됐습니까? 그 친구도 중원경에 있었는데.”
김굉은 아예 유긍달을 붙들고 앉아서 대화를 시작했다.
“키가 작고 거문고에 조예가 있는 분 아닙니까?”
유긍달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김굉은 크게 기뻐했다.
신라는 전국의 중요도시에 5소경이란 일종의 부수도를 만들었다. 서원경 청주, 금관경 김해, 북원경 원주, 남원경 남원. 그리고 중원경 충주였다.
5소경에는 진골 귀족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진성왕 이후 신라 전국에서 호걸들이 일어나며 5소경도 차례로 함락됐다.
‘서원경, 남원경, 금관경은 견훤 손에 떨어졌으니 당연히 그곳에 살고 있는 진골들도 다 죽었을 거고. 북원경은 처음에 도적 출신 양길이 점령했는데 거기 살고 있는 진골들을 보살필 리 없다. 유긍달만이 충주를 장악하고도 옛 진골들을 보호했군.’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황보제공이 혼자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저 친구는 수십 년간 쓸모도 없는 식충이들을 먹여 살린 일이 뭐 자랑이라고 저래? 돈만 엄청 썼지.”
그 말을 듣고 나는 아찔했다. 유긍달이 수십 년에 걸쳐 준비를 철저히 해왔음을 느낀 것이다.
‘이미 유긍달은 신라 왕실에 접근할 수 있는 인맥을 다 확보해 놨구나. 이러니 신라왕실이 유긍달 쪽과 혼인을 맺을 수밖에 없지. 신라 왕실이 유긍달을 믿을 수밖에 없게 판을 다 짜놨어. 내가 아무리 미래 지식이 있어도 이걸 뒤집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