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94화
94. 두려움
“따지고 보면 김부 그 사람은 견훤이가 서라벌을 점령하고 나서 세운 왕 아닙니까? 그냥 이 참에 자리에서 내려오게 하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만들면 어떻습니까? 박씨 왕들이 우리 고려와 친했는데 박씨를 왕으로 세워 보답을 해주는 것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황보제공이 불쑥 말했다. 여러모로 신라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왕건이 뭐라 하기도 전에 유긍달이 끼어들어서 말했다.
“그래선 안 됩니다. 그냥 이번에는 우리 쪽에서 먼저 서라벌에 사람을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평소에 조용히 있던 유긍달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말했다.
“나도 잡찬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 먼저 안 보낸다고 왕을 갈아치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개경에 연락을 해서 한림원령을 불러라. 한림원령에게 신라에 보낼 국서를 맡기겠다.”
왕건이 그런 명을 내렸다.
“굳이 멀리 있는 한림원령까지 부를 필요가 있습니까?”
황보제공이 좀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허허허, 황보 공 마음을 좀 푸십시오.”
그러자 곁에서 유긍달이 웃으면서 황보제공을 달랬다.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런 유긍달을 바라보았다.
‘나는 유긍달이 저리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를 알고 있지. 이제 슬슬 왕위계승경쟁이 본격화되는군.’
그 생각을 하니 나는 고창 전투 때보다 더 떨렸다.
‘이젠 역사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역사를 바꿔야 한다.’
역사서를 보면 유긍달의 외손녀가 신라왕 김부와 혼인한다. 이게 나중에 충주 유씨에게 엄청난 힘이 된다.
신라의 정통성과 상징이 충주 유씨의 군사력과 결합하자 엄청난 효과를 냈다. 나중에 유긍달의 외손자들이 차례로 왕위에 오를 때도 그 덕을 많이 봤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고 나면 유긍달의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유긍달이 신라 왕실과 관계를 맺으려고 짐짓 신라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논의를 이끌어 나가는 거지.’
그 생각을 하며 나는 문득 내 곁에 앉아 있는 왕무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결국 왕무는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계속 휘둘리다가 2년 만에 죽지. 왕무의 외가와 집안도 박살 나고.’
내가 이 시대에 빙의한 이후 수십 번, 수백 번이나 떠올린 역사적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왕무와의 혼인을 피하려고 했다.
‘아 근데 내 몸이 왜 이러지? 아파.’
내 가슴이 저리듯이 아팠다. 왕무가 즉위한 지 2년 만에 죽는다. 이 객관적인 사실을 떠올리기만 했는데 통증이 일었다. 생전 처음 경험해 보는 고통이었다.
‘왕무와 혼인을 했으니 이제 왕무가 죽으면 나도 끝장이야. 그래서 나도 이전보다 스트레스를 더 받는 것 같아. 그 스트레스가 가슴통증으로 나타나는 건가?’
나는 내 가슴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국선! 왜 그러십니까?”
왕무가 내 몸이 불편한 것을 귀신처럼 알아채고 작게 속삭였다. 왕무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보자 내 가슴통증이 더 심해졌다.
“아무래도 수많은 호족들의 사신을 접대하면서 저도 음식을 과하게 먹은 것 같습니다. 가슴이 좀 불편합니다. 그래도 참을 만합니다.”
나는 대강 그리 둘러댔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그 말이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이거 진짜 과식 때문에 역류성 식도염에 걸려서 가슴이 쓰린 건가? 따지고 보면 사람이 스트레스 좀 받는다고 이런 통증이 생길 리가 있나? 이 시대에는 어떻게 역류성 식도염을 치료하지?’
그런데 갑자기 왕건이 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연우 너도 나와 증상이 똑같구나! 안 그래도 요 며칠 사이 나도 가슴이 아파서 걱정을 좀 했어. 의원이 큰 병이 아니고 과식을 해서 그렇다고 해도 영 찜찜했는데. 너도 같은 증상이라니 참 다행이다.”
왕건이 나와 왕무가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입을 연 것이다. 중신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으로 쏠렸다.
나는 민망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이 신라에 사람을 보내는 일을 논의하는 사이 잡담을 나눈 것이 드러난 것이다.
‘아니 저걸 듣고 모른 척하면 되지 굳이 거론을 하다니? 그리고 대체 왜 내가 아픈데 다행이란 거야?’
나는 울화가 터졌지만 또 참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왕건은 거의 통일을 앞둔 국왕이라 그 앞에서 몸가짐을 더 조심히 해야 했다.
어쨌든 이런 말이 오가니 더 이상 회의를 이어가기도 어려워졌다.
“한림원령이 오면 신라에 국서를 보내기로 하고 오늘은 좀 쉬자.”
왕건은 좌중을 둘러보며 그리 말했다. 중신들은 왕건에게 예를 갖추고 일어서서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나 역시 왕무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내 쪽으로 유금필이 다가오더니 말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유금필이 가까이 다가오자 왕무는 가볍게 예를 갖추더니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와 유금필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예, 대장군 이제는 괜찮습니다.”
생각해 보니 왕건이 나를 약 올리는 바람에 가슴통증은 어느 순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요근래 유금필이 나에게 말을 자주 거는 것 같은데. 왜 이러지?’
유금필은 내 곁에 서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견훤이 크게 패하긴 했지만 아직 완산주를 지킬 힘은 충분히 남아 있습니다.”
“뭐 견훤을 깨뜨리는데 몇 년은 더 걸릴 것입니다.”
나는 내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적당히 유금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을 주고받던 유금필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물러났다.
나는 왕무와 함께 처소로 걸어가려는데 이번에는 임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님.”
나는 반가워서 외쳤다. 생각해 보니 요 근래 같은 군영에 있으면서도 임희와 대화를 많이 못 나눴다.
그런데 임희는 상당히 심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장군과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느냐? 뭐 말실수를 한 것은 없느냐?”
“그냥 대장군이 내 몸 상태에 대해 물었고 그 외에 백제의 동태에 대해 간단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음 사실 나도 네 몸 상태가 안 좋다고 해서 그게 걱정돼서 왔다. 그걸 먼저 물었어야 했는데. 그래 몸은 어떠냐?”
임희가 그제서야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야 괜찮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건 그렇고 왜 대장군에 대해 그리 신경 쓰십니까?”
나는 임희에게 물었다. 평소와는 너무 다른 임희의 언행에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야전이 벌어지는 것을 못 보고 고창성 안에 들어가 있었구나? 그러니 뭘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임희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도 전투가 어찌 흘러갔는지는 대강 압니다. 우리 고려군이 우직하게 힘을 모아 견훤을 격파했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러더냐?”
임희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장군이 직접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거야 뭐 대장군의 겸양이고. 우리가 힘을 아무리 모아도 대장군이 없었다면 고려군이 패했을 것이다. 대장군의 기병돌격에 견훤이 놀라서 달아나는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구나. 나는 지난 수년간 대장군을 봤지만 그렇게 무서운 사람일 줄은 몰랐다.”
임희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나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임희는 고려의 초대 병부령을 역임한 사람이었다.
수많은 무장들을 만나본 사람인데 유금필에 대해 무섭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대장군이야 원래 뛰어난 무장 아니었습니까?”
“그저 뛰어난 수준이 아니었다. 어쨌든 너도 앞으로는 대장군과 이야기를 나눌 때 조심하거라. 신중할 필요가 있어. 그래 몸이 괜찮다니 다행이다. 앞으로는 과식하지 말거라.”
임희는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고 물러났다. 그러자 그동안 내가 대화를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던 왕무가 임희에게 다가와 예를 갖추었다.
“상산백!”
“아 정윤 전하.”
임희 역시 예를 갖추며 간단히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그러고 나서 임희는 자신의 처소 쪽으로 돌아가고 왕무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정윤 전하께서도 대장군 밑에서 함께 싸우셨는데 대장군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나는 왕무에게 물었다.
“그 당시에는 경황이 없이 싸우기만 해서 대장군에게 신경을 못 썼습니다. 어쨌든 대장군의 말대로 해서 고창성에 입성할 수 있었으니 참 고마운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왕무는 또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임희와는 너무 대조적인 반응이었다.
‘왕무가 전장에서 시야가 좁나? 아니 손긍훈 구출 작전 때는 시야가 굉장히 넓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왕무와 함께 처소로 돌아왔다.
* * *
임희와 대화를 나눈 이후 나는 며칠간 유심히 유금필의 동태를 살폈다. 그리고 유금필이 왜 나에게 말을 자주 거는지 알아냈다.
‘하루 종일 유금필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하나도 없네. 유금필이 말을 걸어도 굽신거리기만 하고. 그나마 대화가 되는 것은 나뿐이군.’
거기다가 황보제공 같은 사람도 유금필과 눈이 마주치면 즉시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야 유금필!’이라고 외쳤던 패기가 다 사라진 모양이었다.
‘진짜 고창에서 벌어진 야전을 내가 봤어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저러는 걸까? 유금필의 공이 큰 것은 알겠는데. 어쨌거나 상황을 보니 유금필도 오래 못 가겠군. 역사대로 일이 흘러가는구나.’
실제 역사에서 유금필은 결국 내년쯤에 호족들의 총공격을 받아 유배를 간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유금필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이 상태가 지속이 될 리가 있나? 조만간 유금필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겠군.’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사실을 이용할지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내가 제대로 못 움직이면 왕무가 죽는다. 역사를 바꿔야 해.’
내가 새삼 그런 결의를 다지고 있는 사이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진행되었다. 개경에서 달려온 최언위는 국서를 작성했고 고려의 사신이 서라벌로 향했다.
지금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는 고창에서 서라벌까지는 매우 가까웠다. 고려의 국서는 순식간에 신라 조정에 전달됐다.
그리고 신라 조정에서도 즉시 답신이 왔다. 곧 사신을 보내겠다는 내용이었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우리가 사람을 보내니 그제서야 움직입니다.”
황보제공은 못마땅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허허허.”
곁에서 유긍달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그런 황보제공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떻게든 유긍달과 신라 왕실이 연결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데. 우리 쪽 사람이 신라 왕실에 가면 좋을텐데.’
그런데 우리 쪽 사람이야 해봤자 뻔했다. 내 뇌리에 오지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뒤이어 김장명에 대해서도 생각이 났다.
‘으, 그건 안 돼. 신라왕이 나이가 많을텐데 오지수가 거기에 시집을 가면. 무엇보다 오지수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아직 현대인의 감수성이 남아 있는 나로서는 오지수를 그런 식으로 이용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명주의 김장명과 이어지는 것도 군사적으로 대단히 유리했다. 나는 아직도 이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내가 가진 패가 너무 적구나. 아니면 차라리 우리 쪽 사람이 아니더라도 유긍달이 아닌 다른 대호족이 신라왕실과 혼인을 맺으면 어떨까? 유긍달 쪽으로 힘이 쏠리지만 않으면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황보제공을 바라보았다. 충주 유씨에 비견되는 가문으로는 황주 황보씨가 있었다. 그리고 황보씨를 어찌 움직여서 신라 왕실과 혼인을 맺게 만들면 충주와 황주 사이의 관계가 나빠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보제공이 서라벌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보면 별 가능성이 없다. 신라 왕실이 자신들에게 묘하게 적대적인 황보씨와 혼사를 맺을 리가 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머리가 아파 왔다.
‘가슴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이게 다 왕무 탓 아닌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왕무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왕무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신기하게 가슴통증과 달리 두통은 왕무의 얼굴을 바라보자 사라졌다.
“아닙니다.”
나는 두통이 사라지자 너무 좋아서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생각에 몰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