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93화
93. 이름
나는 왕무를 꼼꼼하게 살폈다. 치열한 전투를 거쳤을 텐데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문득 호기심이 일어서 나는 입을 열었다.
“밖에서 벌어졌던 전투는 잘 흘러갔습니까? 아니 우리 고려군이 이긴 것은 알지만 과정이 궁금하긴 합니다.”
나는 고창성 안에 들어와서 수성전을 벌였다. 그래서 왕건과 견훤의 결전을 보지 못했다.
‘역사학도로서 엄청난 기회를 놓친 셈이야. 그런데 내가 전투를 관찰하자고 거기 있었으면 공을 하나도 못 세웠겠지.’
나는 왕무에게 전투 경과를 캐물어서 정보를 얻을 작정이었다.
“나는 그냥 열심히 싸웠습니다.”
그런데 왕무는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군사들의 대형이나 작전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 왕무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내가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 내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투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저에게 물으십시오. 아니 그것보다 제가 먼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고창성 주위 땅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 겨울에 진창이 만들어져 있어서 말을 타고 오기 힘들었습니다.”
유금필이 문루에 올라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고창성의 호족들이 더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나는 불쑥 끼어든 유금필에게 왠지 모를 짜증을 느끼며 대답했다. 유금필이 빨리 삼태사에게 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나는 그리 말했다.
“먼저 정윤비 마마께 이 성에서 있었던 일을 묻는 것이 절차 같습니다만.”
유금필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에게 먼저 보고를 하라는 것이었다.
하긴 고창성의 호족들은 고려에 귀부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었다.
유금필 입장에서는 그들을 믿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성에 있었던 일에 관해 나에게 먼저 묻는 것이 맞긴 했다.
“국선, 그럼 대장군과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유금필이 다가오자 왕무가 그렇게 말하고는 빠져버렸다. 그래서 나는 유금필에게 고창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빨리 말해주고 나도 빠져나와야지.’
그 생각에 최대한 간략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유금필은 궁금한 것이 많은지 이것저것 자세하게 캐물었다.
“소금을 사용해서 언 땅을 녹였다니 놀랐습니다. 하지만 아쉽기도 합니다. 소금은 워낙 비싼 물건이니 이런 식의 작전을 자주 쓸 수는 없겠습니다. 그래도 참 기발하긴 합니다. 이런 기책을 떠올리시다니 역시 정윤비 마마와는 이야기를 나눌 만합니다.”
유금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왜 이리 말이 길어?’
나는 갑갑함을 느끼면서도 공손한 척 대답했다.
“예.”
“정윤 전하께 밖에서 벌어진 야전에 대해서 묻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정윤비 마마의 심정은 저도 익히 이해가 갑니다. 정윤비 마마야 워낙 병법에 관심이 많으시니 궁금한 것이 많으실 것입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그랬습니다. 그때 생각이 나서 정윤비 마마께 제가 직접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유금필은 자기가 호의를 베푼다는 태도로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문득 예전에 유금필과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제 뜻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정윤비 마마를 또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분명 그때 유금필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았다.
‘설마 그게 인사치레가 아니라 진심이었나? 그러고 보니 나도 유금필에게 병법을 배우겠다고 말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빈말이었는데.’
나는 당혹감을 느끼며 헛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그러자 유금필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병법에 조예가 깊으시니 기쁘실 것입니다. 자 그럼 보십시오.”
그러더니 유금필은 문루 바닥에 그림까지 그려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창성은 작은 성이라 문루 바닥도 흙을 다져놓아 만들었다. 그래서 유금필이 막대기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사실 저는 병법에 조예가 없습니다.”
나는 유금필의 말이 너무 지루해서 정직하게 대답했다.
‘유금필은 내가 무슨 병법의 대가인 줄 알고 있어. 나와 대화를 나눌 만하다고 생각해서 나를 붙들고 있는 것 같은데. 그냥 사실대로 말하고 빨리 빠져나와야지.’
그런데 유금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만하지 않는 것은 참 좋은 태도입니다. 정윤비 마마의 미래가 기대됩니다. 저는 고창에 군사를 배치할 때 일부러 단순한 진형을 택했습니다. 견훤은 군사를 신속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복잡한 진형을 펼치면 견훤이 움직일 공간만 주는 셈입니다. 그래서 고창에서 우리 군사들은 우직하게 진군하며 야전을 펼쳤습니다.”
유금필은 자신이 야전을 펼친 인근의 지형을 그려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참 유익하긴 한데 왜 이리 괴롭지? 왕무에게 듣는 것보다 유금필에게 듣는 것이 정확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긴 해. 그런데 지루하다.’
어쨌거나 유금필은 고창 전투에 대해 나에게 자세히 알려주었다.
“대장군의 지략이 놀랍습니다.”
나는 유금필이 말을 끝내자 그리 대답했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이 8천명이나 전사했으니 유금필의 공이 크긴 컸다. 사실 그래서 내가 눈치를 보며 못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
“어떻습니까? 제 말대로 7월에 견훤을 막지 않은 것이 옳은 선택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내가 7월에 견훤이 움직일 것을 예상하고 왕건에게 알려주려 했다.
그때 유금필이 그런 나를 막았는데 유금필은 그때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예. 대장군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나는 순순히 그렇게 말해줬다.
“정윤비 마마의 통찰이나 지략도 놀랍습니다. 그리고 정윤 전하께서도 엄청 분전하셨습니다. 고창성으로 서둘러 가야 한다고 마구 돌격하셨습니다. 나중에 제가 병법서를 쓰게 된다면 신혼인 젊은 장수를 활용하는 법에 대해 써놔야겠습니다. 정윤비 마마께서 성안에 계시니 정윤 전하께서 제 예상 이상으로 활약을 해주셨습니다.”
유금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야. 유금필이 대승을 거둔 직후라 기분이 좋아서 농담을 한 거 같은데. 이리 재미가 없을 수가?’
* * *
유금필이 입성하고 나서 오래지 않아 주력을 거느리고 있는 왕건으로부터 서신이 당도했다.
-3일 뒤에 전장을 수습하고 고창성에 들어가겠다.
“서둘러 성을 청소해라!”
삼태사 중 하나인 김선평이 그 서신을 읽고 다급하게 명을 내렸다. 왕건이 직접 온다니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성안 곳곳이 어수선해졌다.
“아이구. 날씨가 풀려서 성밖 길이 여전히 진창이니 어찌할지?”
김행도 걱정이 되는지 군사들을 이끌고 성밖에 나가 길을 닦았다. 이 고창 전투에서 이긴 이상 왕건은 대세를 탄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창성에 먼저 입성한 고려군도 열심히 갑옷과 투구를 닦았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2년 전만 해도 공산에서 겨우 탈출했던 게 왕건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바뀌겠구나.’
그동안 나는 한림원에서 왕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매일 견훤이 병으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며 근심하던 왕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던 사람이 이리 이긴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예정대로 3일 뒤 왕건은 대군을 거느리고 고창성에 당도했다. 나와 왕무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왕건을 맞이하기 위해 성밖으로 나섰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왕건은 매우 담담한 기색이었다.
‘뛸 듯이 기뻐할 줄 알았는데 아니네. 참 알 수 없는 사람이야.’
나는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가볍게 우리의 인사를 받아준 왕건은 고창성에 들어갔다. 그리고 삼태사를 불러 엄청난 상을 내렸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감격한 삼태사가 군례를 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 고창의 이름을 바꿔 안동(安東)이라고 해라. 진짜 이곳에서 내가 동쪽을 평정했구나!”
왕건은 좌우를 둘러보며 그런 명을 내렸다.
“명을 받듭니다.”
왕건 주위의 신하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왕건의 네이밍 센스가 대단하긴 해. 안동이란 이름을 현대까지 쓸 정도니.’
이 외에도 왕건은 여러 지역의 이름을 바꿨는데 현대까지 그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왕건이 의외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 이런 이름을 잘 짓는 것이다.
“그리고 진보성의 이름도 앞으로는 의성(義城)이라고 불러라. 내가 너무 늦었구나. 내가 6개월만 더 일찍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다면 홍술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늦었어. 홍술의 의리에 내가 보답을 못 해줬다.”
왕건은 씁쓸한 표정으로 그런 명을 내렸다.
왕건이 침울한 기색이라 주변의 분위기도 가라앉았다. 평소의 왕건을 아는 사람에게는 참 당혹스러운 변화였다.
‘지난 2년간 연전연패 하면서도 웃고 농담을 하던 사람이 막상 대승을 거뒀는데 이러니.’
나도 왕건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침울한 왕건의 기분은 길게 가지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사방에서 호족들이 사신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1~2명의 호족들이 사신을 보낸 것이 아니었다. 주변 110개 성의 호족들이 사신을 보내서 왕건에게 인사를 올렸다.
나와 왕무도 바쁘게 움직였다. 이들을 접대하고 묵을 숙소를 마련하는 일을 해야 했다.
‘참 견훤도 억울하긴 하겠어.’
고창 전투 때 견훤이 8천에 이르는 군사들을 잃었기는 하지만 지난 2년간 왕건이 잃은 고려군의 숫자는 더 많았다.
‘죽거나 항복한 고려의 대장만 해도 20명 가까이 되고 잃은 군사도 1만 명이 넘는다. 그래도 호족들이 눈치만 보면서 억지로 견훤을 따랐는데.’
그런데 왕건 같은 경우에는 한 번 이기자마자 사방에서 호족들이 따르겠다고 달려오는 것이다.
신라는 원래 전국을 9개 주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 밑에 400개 남짓한 군현이 있었다.
‘이 시대 강력한 호족들은 1개 군현을 장악하고 군소 호족들은 2~3인이 1개 군현을 나누어서 다스렸다. 그런데 그런 호족들 110명이 새로 고려에 가담했으니 승부는 거의 났다.’
이제는 왕건 밑에 집결한 세력이 견훤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건은 이 와중에 죽는 소리를 내었다.
“아이고 내가 이러다가 술을 마시다가 죽겠다.”
왕건은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주변에는 나와 왕무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앉아 있었다.
고창성에 주둔하면서 왕건은 자신을 만나러 온 110개 성의 사신들을 한 명씩 다 만나줬다.
아무리 세력이 작은 호족의 사신이라도 1명씩 만나고 식사를 한번 같이 해줬다. 그렇게 밥을 먹다가 술도 자연스레 같이 마시게 되는 것이다.
‘진짜 밥 먹고 술을 마시다가 몇 달이 훅 지나갔다. 아침을 사신들과 함께할 수는 없고 점심, 저녁만 가능하다. 그래서 하루에 2명씩 만난다고 치고 110명이니 매일 만나도 55일이 걸려. 그런데 왕건이 매일 술을 먹다가 죽을 거 같아서 며칠 쉰 적도 있으니. 시간이 엄청 걸렸지.’
왕건은 진짜 요 몇 달 동안 급격하게 살이 찌긴 했다. 그래도 그 덕에 사신들을 다 만나기는 했다.
“주변의 요충지에 군사를 배치하는 일도 다 끝냈습니다. 앞으로 견훤이 절대 사벌주에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는 개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수들을 대표해서 유금필이 입을 열었다. 왕건이 술을 마시는 동안 유금필을 비롯한 장수들은 요충지를 장악하는 일을 해놓았다.
“나도 슬슬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사람이 사신을 안 보냈구나.”
살이 찐 왕건이 숨을 몰아쉬며 그리 말했다.
“그게 누구입니까? 웬만한 호족들은 다 사신을 보냈습니다.”
유긍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김부 이 인간은 왜 사신을 안 보내?”
왕건이 상당히 짜증스럽게 말했다.
“그 사람이 그래도 신라왕인데 우리가 먼저 사신을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유긍달이 조심스레 말했다. 왕건은 아마 서라벌의 신라조정이 먼저 굽히고 들어오기를 기다린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