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92화 (92/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92화

92. 승리

“으하하하, 소금 맛이 어떠냐?”

“소금을 뿌리니 백제 무리들이 괴로워한다. 과연 지렁이의 부하들이로구나!”

고창 군졸들은 성벽 위에서 통쾌하게 웃고 있었다. 치열하게 싸우던 어제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밤새 뿌려둔 소금 때문에 고창성 밖 땅은 다 녹아 있었다. 그 효과는 대단했다.

‘현대처럼 아스팔트로 길을 깔아둔 것도 아니고 흙바닥인데 언 땅이 녹아버렸다. 다 진창이 되어 버렸어.’

나는 성벽 아래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운제를 끌고 오던 백제군사들이 아무리 운제를 밀어도 바퀴가 헛돌고 있었다.

당황한 백제군은 운제를 뒤로 빼려고 하는데 그것도 안 되고 있었다.

운제를 담당하는 백제군졸들은 진짜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힘을 쓰고 있었다.

거기에 그냥 사다리를 들고 달려오는 백제 보병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고창성 밖에 만들어진 뻘밭도 사실 맨몸이면 그럭저럭 다닐 만했다. 하지만 무거운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걷는 것은 무리였다.

겨우겨우 고창 성벽 앞에 도달한 백제군사들은 기진맥진해서 비틀거리고 있었다.

“화살을 쏴라! 백제군이 힘을 못 쓴다.”

김선평이 그 모습을 보고 명을 내렸다.

“아아악.”

백제 군사들은 그대로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쿠쾅!

물론 백제군의 발석거는 계속 돌을 쏘고 있었다.

‘확실히 임연객이나 삼태사의 말이 옳구나. 발석거의 엄호를 받으며 백제군이 성벽을 넘는 것이 진짜 무섭지 발석거 자체는 별 게 아니었어.’

나는 한결 여유 있게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발석거의 돌이 성벽을 때려서 충격을 주기는 해도 이것만으로 성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퇴각하라!”

마침내 백제군 장수들이 그렇게 외쳤다. 백제군은 고창성 공격을 중단하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끌고 갈 수 없는 운제들도 그대로 버리고 물러났다.

“와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이겼어.”

그 모습을 보고 고창 군졸들이 함성을 질렀다. 그러다가 내 쪽을 바라보며 부르짖기 시작했다.

“정윤비 마마의 계책이 통했다! 고려 만세!”

“만세.”

삼태사도 내가 앉아 있는 문루 쪽으로 다가왔다.

“허허허, 정윤비 마마께서 일어나셔서 군민들의 환호에 답을 좀 해주십시오.”

김선평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공을 세운 것이 없는데 부끄럽습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나는 문루에 그냥 앉아만 있어도 그리 무서웠다. 직접 싸우는 사람들의 고통은 얼마나 컸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작은 꾀를 낸 것을 자랑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정윤비 마마의 계략이 아니었다면 이 성을 지키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삼태사는 입을 모아 나에게 말해줬다. 곁에서 임연객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나도 너를 인정한다.”

삼태사가 나에게 칭찬을 하니 기쁘면서도 쑥스러웠다. 그런데 임연객이 끼어들자 나는 속이 뒤틀렸다.

‘임연객, 저 선동꾼 녀석이 뭔데 인정한다고 나서는지.’

내가 고창 백성들에게 차분하게 설명을 하려고 할 때 임연객이 또 끼어든 일을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물론 분위기 자체는 좋아지긴 했어.’

그 선동 덕에 고창 군졸들이 지렁이와 관련한 농담을 하며 웃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차피 내 계책대로 소금을 뿌려 고창 성 밖 땅만 녹이면 분위기와 관계없이 백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런데 굳이.’

나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임연객을 노려보았다.

“이젠 백제군이 물러갔고 소금만 밤마다 뿌려놓으면 어제와 같은 위기는 없어. 얼굴에 힘 안 줘도 돼.”

임연객은 태연하게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울화가 터져서 임연객에게 싸움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삼태사 중 하나인 장길이 입을 열었다.

“이 고창성에서의 싸움은 우리가 유리합니다. 하지만 성 밖에서 벌어질 폐하와 견훤의 결전이 모든 것을 판가름할 것입니다. 그 싸움은 어찌 흘러갈지? 허허허.”

지금 고창성을 친 백제군은 일부에 불과했다. 백제군의 주력은 고창성을 구원하러 달려오는 왕건의 고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군도 뻔히 그것을 예상하고 한판 결전을 준비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에서 고려군이 지면 고창성에서 아무리 잘 싸웠어도 소용이 없었다. 삼태사는 그 생각을 하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정윤 전하도 계시고 그 싸움은 우리 고려가 이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고창성에 직접 와 있는 것입니다. 승리가 확실합니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삼태사에게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장길이 가볍게 웃으면서 말했다. 다만 나는 내가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여기서도 굳이 왕무 얘기를 꺼내다니 내가 참 왜 이러지? 고려군 선봉도 유금필이고 작전을 세운 것도 유금필이야. 유금필을 믿는다고 말하는 게 맞았어. 나 참.’

그 생각에 또 괴로워하는 나에게 김선평이 말했다.

“이제는 정윤비 마마께서 굳이 문루에 계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러나 아직은 싸움이 끝난 것이 아닌데.”

그 말에 나는 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정윤비 마마의 모습을 숨기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김선평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무슨 생각이 있으십니까?”

나는 당장 김선평의 말대로 성벽에서 내려와 좀 쉬고 싶었다. 그래도 김선평의 얼굴을 보니 무슨 계책이 있는 표정이라 체면상 물었다.

“성벽 주위 땅이 이 상태면 백제군은 고창성을 제대로 공격하기 어렵습니다. 이 상황에서 정윤비 마마께서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면 백제군은 필시 우리가 방심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틈을 노려 백제군이 밤이나 새벽에 한번 기습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 우리가 군사들을 매복시켜 두면 백제군을 격파할 수 있습니다.”

김선평은 신이 나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줬다.

‘괜찮은 계책이네. 김선평의 생각이 빗나가서 백제군이 기습을 안 해도 고창성에 손해날 일은 없고. 무엇보다 내가 좀 쉴 수 있다.’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말했다.

“반드시 성주님의 말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계책을 위해 성안에서 좀 쉬겠습니다. 하하하.”

나는 웃으면서 그대로 성벽 아래로 내려왔다.

* * *

삼태사는 나를 위해 자신들의 가족이 쓰던 전각을 내주었다. 삼태사의 가족들이 나를 맞이했다.

“아 살 것 같다.”

나는 전각의 한 방에서 팔다리를 쭉 펴고 누우며 외쳤다. 진짜 날이 선 무기들을 안 보고 방에서 뒹굴뒹굴하니 너무 행복했다.

그렇게 쉬고 있는데 내가 머물고 있는 방 밖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나는 방문을 열고 바깥을 살폈다. 삼태사의 가족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일을 하고 있었다.

군사들이 먹을 밥이며 국을 만들고 물도 수통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외에 군사들이 밖에 던질 돌을 모아 나르는 사람들도 보였다.

수성전을 하는 동안 후방도 정말 바쁜 것이다.

‘하 이러면 내가 마음이 불편해서 못 쉬는데.’

고창성의 건장한 장정들은 다 성벽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 후방에서는 노약자들이 열심히 이런 일들을 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도 수통에 물을 붓는 일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으려니 너무너무 찜찜했다.

‘에잇, 일을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섰다.

“정, 정윤비 마마.”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저도 여러분들을 돕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내가 일하는 게 어설프긴 했다.

‘쉬워 보이니 그냥 밥을 그릇에 옮겨 담는 일이나 해야겠다.’

그 생각에 나는 가마솥 뚜껑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이 가마솥 뚜껑이 생각 외로 무거웠다.

가마솥 뚜껑을 들고 비틀거리던 나는 치맛자락을 잘못 밟아 그만 넘어져 버렸다.

그 와중에 가마솥 뚜껑에 내 팔이 찍혔다.

“아아악.”

나는 너무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정윤비 마마 괜찮으십니까?”

놀란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내 쪽으로 달려왔다.

“아이구. 빨리 의원을 불러.”

“찬물을 가져와서 상처를 식혀.”

내가 넘어지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냥 방안에 가만히 있을걸.’

나는 그런 후회를 했다. 어쨌든 사람들은 나를 업고 전각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의원도 후다닥 달려와서 내 팔을 살폈다.

“가벼운 화상이라 흉터가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가마솥 뚜껑에 찍힌 거라 상처 범위가 큽니다. 한동안은 쉬십시오.”

의원은 그리 말하며 고약을 바르고 내 팔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상처가 엄청 쓰라린데 괜찮을까?’

의원은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으나 나는 걱정이 됐다.

‘큰 흉터가 남으면 어쩌지? 아니야 흉터가 남으면 어때?’

어쨌든 팔이 쓰라려서 나는 일을 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전각의 한 방에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누워 있는 사이 고창성의 상황은 다급하게 돌아갔다. 성 밖의 백제군은 김선평의 예상대로 움직인 모양이었다.

“백제군이 밤에 몰래 성벽을 넘어오려다가 우리 군사들의 매복에 걸려서 대패했습니다. 그 이후 백제군이 제대로 공격할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고창성 사람들이 아픈 팔을 붙들고 있는 나에게 그리 알려주었다.

“잘 됐습니다.”

병상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창성의 싸움은 어려운 고비를 확실히 넘긴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상처도 서서히 나아갔다. 쓰라린 것이 덜해지고 상처도 옅어졌다.

“팔에 상처가 나서 소매에 쓸리면 아프니까 계속 붕대를 감아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도 이제 얼추 상처가 다 나았습니다.”

나를 살피는 의원은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누워 있는 나에게 전갈이 왔다.

“지금 성 밖에서 군사들이 오고 있습니다. 정윤비 마마께서도 나와 보십시오.”

성벽 쪽에서 나에게 그런 전갈이 왔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재빨리 일어나 전각 밖으로 나섰다.

성벽 쪽으로 향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고창 성내의 남녀노소 모두 성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고려군이 온다. 고려군이 온다고!”

중간중간 그렇게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성벽의 문루에 올랐다.

성밖에 백제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내 눈에 익은 고려군의 깃발이 보였다. 고려군이 고창성에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명확했다.

“이겼구나!”

나는 감개무량함을 느꼈다. 이미 미래 역사를 알고 있는 나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고창성의 다른 사람들은 성벽 위에서 이미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만에 하나 백제군의 계략일 수도 있으니 얼굴을 확인하고 성문을 열겠습니다.”

김선평이 억지로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겠다는 태도였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고려군의 선두에 눈에 익은 장수들이 보였다.

대장기 아래 유금필이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고창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곁에 박수경, 박술희, 황보금산 같은 고려의 대장들이 나란히 말을 몰아 오고 있었다.

다만 이들이 다가오는 속도는 느렸다. 고창성 주위 땅이 진창이 되어 있어서 말들이 걷기 힘들었다.

그 사이 고창성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느릿느릿 다가오는 고려군사들도 웃으면서 고창성 쪽으로 손을 흔들어줬다.

‘왕무도 선봉부대에 껴서 왔구나!’

나는 박술희 곁에서 말을 몰고 오는 왕무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느덧 고려군이 성벽 아래 도착했다.

그래도 삼태사는 고지식하게 절차를 다 밟았다. 성 밖으로 군졸하나를 내보내 고려군이 가져온 왕건의 명령서를 확인하는 요식행위를 다 했다.

‘나 참 숨넘어가겠네. 그냥 뻔히 얼굴을 아는데 성문을 열어주지.’

마침내 왕건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본 삼태사가 고창성의 성문을 열었다.

“와아아아!”

고창성 안은 승리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국선!”

왕무는 그대로 문루 위로 달려왔다. 성 밖에서도 문루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보인 모양이었다.

“정윤 전하.”

나도 왠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데 붕대가 감긴 내 팔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왕무가 임연객을 노려보며 말했다.

“병부낭중. 대체 일을 어찌했기에 국선의 팔이…….”

왕무는 임연객을 꾸짖는 기색이었다.

“전하! 이것은…….”

임연객이 원통하다는 표정으로 뭐라 말하려 했는데 왕무는 그저 내 팔만 살피고 있었다.

“하하하.”

나는 임연객이 억울하게 당한 것이 통쾌해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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