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91화
91. 토룡
“오라버니, 지금 몇 시야?”
나는 임연객을 보며 물었다. 먼지를 들이마셔서 그런지 목이 너무 따가웠다.
“오시쯤 됐어.”
“알았어.”
임연객의 대답을 듣고 나는 한숨을 쉬려다가 억지로 참았다.
‘내가 한숨을 쉬는 모습을 보면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지 몰라.’
그런 걱정 때문에 나는 한숨도 마음대로 못 쉬었다. 속이 갑갑해져 왔다.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겨울이라 하늘이 맑았다.
‘밤이 돼야 전투가 끝난다. 그런데 시간이 진짜 안 가네.’
아직도 오시밖에 안 됐다. 이 끔찍한 상황이 끝나려면 한참 남은 것이다.
쿠쾅!
그 와중에 백제군의 발석거에서 날아온 돌이 문루 쪽 성벽을 또 때렸다. 그 충격에 나는 몸을 휘청거렸다.
“막아라!”
내 주위에서 방패를 든 군사들이 고함을 치고 있었다. 백제군의 화살도 쉴 새 없이 날아오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죽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내가 나름 전장 경험이 있다고 생각했다. 청주에서 유금필이 백제군을 격파할 때 나도 함께 갔다.
‘그때는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멀리 후방에서 구경만 했다. 유금필이 백제군을 빨리 물리치기도 했어. 그런 건 전투 경험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였어.’
이 작은 성에서 소수의 군사들과 함께 있으니 그게 느껴졌다. 백제 대군은 전력을 다해 고창성을 치고 있는데 진짜 무서웠다.
‘어차피 역사서에는 고창 전투에서 고려가 이긴다고 나와 있다. 나는 그냥 내려가 있을까? 고창 군사들의 사기가 좀 떨어진다고 해도 그냥 역사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을까?’
나는 너무 무서워서 그런 생각도 들었다. 고창성 가운데 있는 전각에 들어가면 이 갑갑한 기분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나는 내 곁에서 방패를 들고 있는 임연객을 바라보았다. 삼태사는 작은 성안에서 고함을 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부상을 입은 고창 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전사한 사람들의 시신도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모습을 보니 나는 발을 뗄 수 없었다.
‘나는 그냥 편하게 문루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 순간 임연객이 외쳤다.
“백제군의 운제가 온다! 문루를 수비하라!”
이제는 백제군이 문루 쪽으로 타 넘어 들어오려고 운제를 끌고 왔다. 임연객은 군사들을 이끌고 넘어 들어오는 백제 군사들을 상대로 백병전을 벌였다.
이제는 창검 부딪치는 소리까지 들렸다. 나는 임연객을 돕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내가 백병전에 가담해 봤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이래서 왕무가 나더러 가지 말라고 말렸구나. 내가 괜히 고집을 부렸어.’
나는 이제야 왕무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주저 없이 나를 고창에 보낸 왕건과 유금필의 얼굴도 떠올랐다.
‘진짜 못 믿을 인간들이야.’
나는 이를 갈며 왕무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맨 처음 지하통로에서 만났을 때 왕무의 모습, 서경 여행 때 거중기를 실험하며 좋아하던 왕무, 부석사에서 함께 사기를 쳤을 때 일, 그리고 그 이후 도망치면서 왕무와 함께 말을 탔을 때 느꼈던 왕무의 체온,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카레를 먹던 왕무.
그리고 며칠 전 왕무와 싸우고 나서 했던 입맞춤까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왕무와 이렇게 많은 일을 함께 겪었네.’
나는 내 입술을 매만지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나는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몸이 오싹해졌다.
‘나는 왜 왕무가 손을 뺀 것에 그리 슬퍼했던 걸까?’
지금 고창성을 둘러싼 백제군보다 그 질문이 나를 더 두렵게 했다.
‘좀 더 가면 다시는 못 돌아와.’
그런 예감에 사로잡힌 내가 고뇌하고 있을 때 곁에서 누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연우야. 넌 정말 이 와중에 뭔 생각을 하고 있어?”
임연객은 피로한 얼굴이었다. 나는 놀라서 주변 상황을 살폈다. 문루에 배치된 군사들이 무난히 백제군을 격퇴해 낸 모양이었다.
“어, 백제군을 물리칠 방책을 생각하고 있었어. 이대로 있을 수는 없으니. 나는 생각이라도 해야지.”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거짓말을 쳤다.
“진짜 이번에는 너에게 놀랄 수밖에 없다. 코앞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이럴 수 있다니.”
아무것도 모르는 임연객이 나에게 감탄했다.
“…….”
나는 아직도 마음이 복잡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백제군이 물러나고 있어. 이럴 때 좀 쉬어야지. 잠깐 내려가 있자.”
주위를 보니 고창 군사들도 투구를 풀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식사와 물이 배급되고 있었다.
‘드디어 내려갈 수 있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마음껏 쉴 수 있다는 것도 행복임을 이번 일로 느꼈다. 나는 성벽 아래로 내려왔다.
삼태사도 한곳에 모여 물을 마시며 뭔가를 논의하고 있었다. 나는 임연객과 함께 그쪽으로 걸어갔다.
“정윤비 마마. 대단하십니다.”
나를 보자 삼태사 중 하나인 장길이 말했다.
“별로 한 일도 없이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별 도움이 안 됐을 것입니다.”
나는 겸손한 어조로 말했다.
“아닙니다. 정윤비 마마께서 그리 앉아계신 모습만 보고도 군사들의 사기가 올랐습니다.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김선평이 손사래를 치며 끼어들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우울해졌다.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해주기를 바랐는데. 그러면 부담 없이 뒤로 빠질 수 있잖아.’
그런데 삼태사는 내가 계속 문루에 앉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기색이었다.
‘이걸 며칠이나 더 해야 한다고?’
그 생각을 하니 너무 끔찍했다.
“어떻게든 백제군의 공성기구를 처리해야 합니다. 발석거야 소리만 크고 큰 피해를 주지는 못하지만 운제는 정말 위협적입니다.”
임연객이 그런 의견을 제시했다.
‘뭐? 난 발석거에서 돌이 날아오는 게 제일 끔찍했어.’
그러나 군사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른 모양이었다.
“병부낭중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운제를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김선평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운제를 부술 수성구는 없습니까?”
임연객이 물었다.
“식량, 식수, 소금 등은 넉넉하게 있지만 그런 것들은 없습니다. 그나마 부랴부랴 준비한 이동식 사다리가 전부입니다.”
김선평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삼태사는 이 시기 지방 군소호족이라 준비할 수 있는 자원에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조금만 버티면 폐하께서 대군을 이끌고 오실 테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임연객은 재빨리 답 없는 문제에서 빠져나와 그쪽으로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뭔가를 떠올렸다. 나는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소금! 소금이 넉넉하게 있으면 문제가 풀릴 수도 있습니다. 소금이 얼마나 있습니까?”
나는 삼태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소금이야 원래 넉넉하게 수년 치를 비축하고 있었습니다. 사방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시기라 만약을 대비해 잔뜩 모아놨습니다. 그 소금이 다 고창성 안에 있으니 그 양이야 엄청납니다. 백제군에게 넘겨주기는 아까우니 다 끌어왔습니다. 그런데 소금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김선평이 대답했다.
“소금을 성밖에 뿌리면 얼어 있는 땅이 녹습니다. 그러면 백제군이 공성구를 끌어오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내가 부르짖었다. 겨울이 되면 제설을 위해 공무원들이 염화칼슘이며 소금을 뿌리는 모습을 현대에는 자주 볼 수 있다. 내가 봤던 그 광경이 이 순간 떠올랐다.
왕건은 농사일을 마무리 짓고 군사를 일으켜 남하했다. 그리고 사벌주에 들어와 몇 달째 대치하다가 지금 고창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은 겨울이었다.
‘거기에 이 고창성 인근에는 낙동강이 흘러 습기가 많다. 소금을 뿌려 땅이 녹으면 성 인근이 어느 정도 진창이 될 거야. 그 정도만 돼도 백제군이 운제를 자유롭게 움직이기 힘들어진다.’
내가 흥분해서 외치는데 삼태사와 임연객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소금을 땅에 뿌리면 땅이 녹는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김선평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금 소금이 넉넉하게 있긴 하지만 그 귀한 것을 땅에 뿌리란 말씀입니까? 그러다가 성내에 먹을 소금이 부족해질까 봐 걱정입니다.”
김행은 그런 걱정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이 싸움은 며칠 안에 결판이 납니다. 그동안 먹을 소금만 남겨두고 다 뿌리면 됩니다. 그리고 의심이 되시면 실험을 해보면 됩니다. 성 안의 언 땅을 골라 소금을 좀 뿌려보십시오. 몇 시진이 지나면 녹을 것입니다.”
나는 살 길이 보인다는 생각에 열정적으로 말했다.
“정윤비 마마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삼태사는 실험을 해보자는 내 말에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안의 적당히 얼어붙은 땅을 골라 고창 군졸들이 소금을 그 위에 뿌렸다. 그 순간 북소리가 성내에 울려 퍼졌다.
“백제군이 공격해 온다.”
삼태사는 그 소리를 듣고 재빨리 성벽 위로 올라갔다. 나 역시 임연객과 함께 내가 원래 있었던 문루로 돌아왔다.
‘좋아. 오늘만 참으면 내일부터는 한결 나아진다.’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덕에 백제군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 * *
백제군의 공세는 저녁 무렵이 되자 끝났다. 백제 군사들이 속속 물러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임연객과 황급히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삼태사와 합류해 방금 소금을 뿌려놓은 곳으로 달려갔다.
“과연 정윤비 마마의 말씀대로입니다. 땅이 녹았습니다.”
김선평은 손으로 직접 진창이 된 땅을 찔러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확실히 백제군사들이 운제를 굴리기 힘들 것입니다. 설사 끌고 온다고 해도 백제군사들이 성벽 앞까지 오면 지칠 것입니다.”
장길 역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흡족한 기색이었다. 내 계책을 보고 희망을 본 것 같았다.
“오늘 당장 소금을 뿌려놔야겠습니다. 그러면 내일 땅이 녹을 것입니다. 건장한 군사들을 뽑아 사다리를 이용해 성 밖으로 내보내면 됩니다.”
김행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삼태사는 즉시 군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군졸들은 창고에서 소금을 꺼내기 시작했다.
다만 이 모습을 보고 성내 백성들 사이에서는 동요가 생겼다. 백성들이 소금창고 앞에 몰려와 외치기 시작했다.
“이 비싼 소금을 땅에 그냥 뿌린다는 말씀입니까?”
“저게 한두 푼도 아니고. 다 우리가 낸 세금 아닌가?”
백성들의 웅성거림을 들은 삼태사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지금은 작은 성에 갇혀서 견훤의 대군에 맞서는 상황이었다. 백성들을 납득시키고 마음을 달래는 것도 중요했다.
“정윤비 마마께서 백성들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정윤비 마마께서 나서면 민심이 가라앉을 것입니다.”
삼태사는 일제히 나를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섰다.
‘삼태사를 설득할 때와 똑같다. 실험을 해서 보여주면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임연객이 곁에서 끼어들며 외쳤다.
“견훤은 토룡의 후예다. 즉 지렁이의 후예란 말이다. 지렁이에게 소금을 뿌리면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는 걸 모두 보지 않았는가? 견훤의 부하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소금을 뿌린다. 정윤비 마마께 그런 계시가 내려왔다.”
이때는 견훤을 싫어하는 사벌주 사람들 사이에서 견훤이 토룡의 후예라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임연객은 이것을 이용한 것이다.
‘아니 임연객이 또?’
나는 격노해서 임연객을 노려보았다.
“앗, 그건 그렇네.”
“그래 토룡의 부하들이니 소금을 뿌리면 된다는 간단한 사실을 우리가 왜 몰랐을까?”
그런데 임연객의 말을 듣는 순간 고창성의 백성들은 하나같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외쳤다.
“자 그래서 소금을 성 밖에 뿌리라고 한 것이다. 꼼꼼하게 성 밖 곳곳에 뿌려야 한다.”
이 광경을 보고 삼태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명령을 내렸다.
“저희들도 소금을 나르는 일을 돕겠습니다.”
고창성 백성들이 너도나도 나섰다. 그래서 성 밖으로 나간 군졸들은 순조롭게 소금을 고창성 주변에 뿌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