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90화
90. 삼태사
“그래서 정윤 전하와는 왜 싸운 거야?”
말을 몰고 고창으로 가는 중에 임연객이 물었다.
‘어 싸운 것만 알고 그다음 일은 모르나? 하긴 임연객은 막사 밖에 있었으니 소리만 들었겠지. 그, 그 행위는 소리가 안 나니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입맞춤을 한 건 임연객도 모르는 것 같았다.
“군사적 문제와 관련해서 이견이 있었어.”
내가 일부러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울기까지 했다고? 어쨌거나 제발 정윤 전하와 싸우지 마. 진짜 내가 밖에서 듣고 당황했어. 내가 끼어들어 말릴 수도 없고. 폐하를 모셔오면 너의 부부싸움도 말릴 수 있으려나?”
임연객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렇게 말했다.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마!”
나와 왕무가 싸우는데 왕건이 말리러 온다는 끔찍한 말을 듣자 나는 소름이 끼쳐서 말했다.
“하하하.”
그런 내 반응을 보고 임연객은 가볍게 웃더니 그다음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만 몰았다. 거기에 나는 또 이상함을 느꼈다.
‘임연객이 왜 이리 조용해?’
“오라버니 어디 몸이 안 좋아?”
나는 임연객에게 물었다.
“연우 너 정말 대단하구나! 이 와중에도 평상시와 조금도 다를 게 없어. 개경에서는 네가 진짜 전쟁터를 안 겪어봐서 태연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견훤의 대군이 포위할 고창성에 들어가면서도 이리 침착하다니. 나는 지금 떨려 죽겠다. 말도 겨우 몰고 있어. 다른 군사들의 얼굴을 좀 봐라.”
나는 곁눈질로 다른 군졸들을 봤다. 하나같이 긴장해서 옆의 사람과 말 한마디 못 나누고 달려가고 있었다.
‘나야 이 고창전투의 결과를 알고 있지만 고려 사람들 입장에선 절망적으로 느껴지긴 하겠네. 고창성에 가도 걱정 없다. 삼태사가 버티고 있으니. 거기에 며칠만 참으면 유금필이 끝내 견훤을 격파한다. 며칠만 참으면 돼. 으하하하. 그 덕에 내가 위기에도 태연한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겠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니 흐뭇해졌다. 이런 명성이 쌓이면 나중에 다른 대호족들과 권력투쟁을 할 때도 유리했다.
그래서 나는 짐짓 쉴 때마다 군졸들에게 말도 걸고 농담도 하며 그들을 격려했다. 그러는 와중에 어느덧 고창성에 도착했다.
* * *
“고창성이 작구나. 3천 군사가 주둔할 성은 아니야. 역시 폐하의 예견대로 노약자까지 합쳐서 3천이란 건가?”
눈앞에 보이는 고창성을 바라보며 임연객이 탄식했다.
“쉿, 쉿, 조용히 해! 들리겠다.”
나는 깜짝 놀라서 임연객에게 말했다. 우리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고창성에서도 사람들이 나와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미 전령을 먼저 보내 정윤비인 내가 고창에 갈 것이란 왕건의 서신을 전한 상태였다.
나는 임연객의 그 무례한 말이 고창 사람들 귀에 들릴까 봐 걱정이 됐다.
“저는 김선평이고 이 친구는 김행, 여기 이 친구는 장길입니다.”
내 앞에 다가온 듬직한 체구의 중년인이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 직접 오시다니 고창 군민들은 모두 감격하고 있습니다.”
곁에서 김행도 그리 말했다.
“정윤비 마마의 명성은 저희도 듣고 있었습니다.”
장길도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면서 고창의 세 호족은 일제히 말에서 내려 나에게 군례를 올렸다.
“환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는 깜짝 놀라 말에서 내려 역시 예를 갖추었다.
‘이 사람들이 바로 그 유명한 삼태사인가?’
역사 속에서 고창의 세 호족은 이때 엄청난 활약을 한다. 전투가 끝나고 왕건은 이 세 사람에게 엄청난 상을 퍼준다.
그 이후 이 3인은 삼태사라고 불리며 삼한 전체에 명성을 날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 고창성에 가면 삼태사만 믿고 나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그러면 모든 일이 다 풀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삼태사와 함께 고창성에 입성했다.
“와아아아. 정윤비 마마가 오셨다.”
내가 고창성에 들어서자 수많은 군사들과 백성들이 함성을 질렀다. 내가 왔다는 것은 왕건이 무조건 고창을 구하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다. 그것을 느끼고 고창 사람들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조금만 견디면 반드시 폐하와 고려군이 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나는 손을 흔들면서 백성들에게 외쳤다. 그리고 아예 말에서 내려 백성들의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군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어차피 이길 싸움이다. 나중에 내 공이 큰 것인 양 자랑하려면 좀 의욕적으로 움직여야지. 어차피 실질적인 전투는 삼태사가 다 할 거고. 생색을 내려면 전투 전에 열심히 뛰어야 해.’
그 생각에 나는 적극적으로 고창성 곳곳을 뛰어다녔다.
“소인이 화엄종의 신도라서 부석사에서 정윤비 마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 신통력을 발휘하셔서 견훤을 물리쳐 주십시오.”
고창성에 있는 웬 노인이 그런 말을 했다. 그 노인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순간 뜨끔했다.
‘하긴 이 고창성은 부석사와도 멀지 않은 곳이라 그때 일을 본 사람이 있었구나.’
여기에선 부석사에서 쳤던 사기를 칠 수가 없는데 사람들이 기대를 하는 것이다.
“그때야 부석사라서 선묘 아가씨께서 나서신 것이고 나는 한 일이 없다. 다만 이 싸움은 무조건 고려가 이긴다.”
나는 부담을 느끼면서도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사람들을 격려했다.
“와아아아. 고려 만세!”
내가 그러고 돌아다니자 화엄종 신도들은 다 내 말을 믿고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화엄종 신도들의 절대적인 믿음을 보고 다른 고창 사람들도 기세가 올랐다.
‘좋아. 내가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는 성공했다.’
“연우 네가 상당히 사람들의 사기를 진작시켰어.”
임연객이 곁에서 나에게 속삭였다.
“흐흐흐.”
그 칭찬을 듣고 나는 임연객에게 미소를 지었다. 뿐만 아니라 삼태사도 내가 성 내의 사기를 끌어올리자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부석사에서 활약하신 일을 들었는데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삼태사 중 하나인 장길 역시 나를 칭찬했다.
“기껏 고창성에 왔는데 뒤에 숨어 있지만은 않겠습니다. 문루에 앉아 군사들을 격려하는 일은 저 역시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당당하게 삼태사를 향해 말했다.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김선평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무조건 우리가 이깁니다. 하하하.”
나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히히히, 이 싸움은 고려가 이긴다. 거기에 이 시대는 공성전을 하기가 힘들어. 공성전을 하려면 여러 공성기구가 필요한데 이 시대는 그걸 제작하기가 힘들다. 견훤이 지금 후백제를 건국한 지 30년정도 됐다. 간단해 보이는 공성기구를 만들려고 해도 엄청난 기술의 축적이 필요한데 달랑 30년 가지고 뭐가 되겠어? 발석거며 운제 같은 공성기구 없이는 공성전이 잘 안 된다.’
이 사실을 나는 작년에 느낀 바 있었다. 왕건도 삼년산성을 공격하다가 잘 안 돼서 도망친 것을 내가 목격했다. 고려에도 공성기구를 제대로 제작할 능력이 없었다.
‘기껏해야 사다리를 타고 기어오를 텐데 정신만 차리면 막아낼 수 있어. 위험하지도 않아.’
나는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정윤비 마마의 담력이 놀랍습니다. 그래도 정윤비 마마를 호위할 군졸들은 배치해 두겠습니다.”
삼태사들은 입을 모아 그리 말했다. 그리고 열심히 군사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세 분의 뜻대로 하십시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 * *
그리고 나는 성벽 문루 위에 자리를 잡고 삼태사와 임연객도 그런 나와 함께 있는데 전령이 달려와 외쳤다.
“백제의 도적들이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숫자가 많습니다.”
“전투 준비를 하라!”
전령의 보고를 듣고 김선평이 그런 명을 내렸다. 나도 막상 전투가 시작된다하니 약간 떨리긴 했다.
나는 멀리서 다가오는 백제 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백제 군사들이 무슨 커다란 구조물을 열심히 끌고 오는 것이 보였다.
‘어 저거 발석거 아닌가? 역사서에 남아 있는 그림과 똑같이 생겼네. 저게 왜 저기 있지?’
나는 믿어지지가 않아서 두 눈을 비볐다. 그런데 백제군이 그 발석거 비슷한 것을 작동시키는 모습이 보였다.
쾅!
돌이 날아오더니 내가 앉아 있는 문루 아래 성벽을 때렸다. 엄청난 충격과 진동이 문루 위에 앉아 있는 나에게도 느껴졌다.
‘어, 이건 위험한 거 아닌가?’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치마 아래 다리가 좀 떨렸다.
“허허허, 견훤 저 도적이 서라벌을 약탈할 때 서라벌의 기술자들도 모두 납치해 완산으로 데려가더니 이런 걸 만들어 왔습니다.”
김선평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리 말했다. 별거 아니란 표정으로 좌우를 둘러보기까지 했다.
“많은 호족들이 발석거며 운제를 가지고 오는 백제 도적들을 보고 겁먹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깁니다. 안 그렇습니까? 정윤비 마마.”
장길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나는 기력이 없어서 헛웃음만 흘리는데 이 모습을 보고 장길은 또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자 그럼 백제 도적들을 막으러 가겠습니다. 하하하.”
김행은 검을 뽑아들더니 웃으면서 자신의 위치로 갔다. 다른 삼태사들도 나에게 가볍게 예를 갖추고 백제군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나만 문루에 앉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계산 착오다. 견훤이 서라벌 기술자들을 납치해 간 건 나도 알고 있었는데. 그 사료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어. 2년 전에 납치해 갔으니 그 사이에 신라의 기술을 흡수하고 이런 걸 만들어 올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거기에 왕건이 괜히 삼태사에게 상을 퍼줬겠어? 엄청난 위기가 있었으니 퍼준 거란 걸 알았어야 했는데.’
내가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엄청난 공성전이 시작됐다.
“쏴라.”
백제군이 발석거로 마구 돌을 발사했다. 그러면서 운제를 앞세운 백제군이 달려왔다. 운제는 사다리가 달린 수레였다.
‘운제 사다리 높이가 너무 높은데?’
나는 당황해서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삼태사도 고창성에 모여서 준비를 철저히 한 모양이었다.
고창 군사들 수십 명이 어깨에 커다란 나무 사다리를 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 나무 사다리 위쪽에는 짚방석이 있어서 사람 하나가 그 위에 서 있을 수 있었다. 이것을 미리 만들어둔 모양이다.
목재가 부족해서 성벽 곳곳에 망루를 설치할 수 없으니 이런 이동식 망루 역할을 할 사다리를 만든 것이다.
나무 사다리 위에 선 고창 군사가 긴 창으로 운제를 타고 들어오려는 백제 군사들을 찔렀다.
그러다가 백제군의 화살을 맞고 나무 사다리 위의 고창 군사가 떨어지면 다른 사람들이 기어 올라왔다.
와아아아!
함성 소리가 커지며 전투가 격렬해졌다. 나는 내 계산과 다르게 흘러가는 전투를 보며 심장이 뛰었다.
“나 잠깐 성 아래서 쉬다 올게. 몸이 좀 안 좋네.”
내가 슬쩍 그런 말을 꺼내자 임연객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지금 연우 네가 성 아래로 내려가면 너를 믿는 화엄종 신도들이나 고창 사람들이 놀랄 거야. 좀 힘들어도 참아.”
‘내가 너무 설쳤구나. 그냥 얌전히 고창성에 들어와서 성 가운데 있는 안전한 전각에 들어가 있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나름 공을 세우긴 세운 건데. 괜히 욕심을 부려서. 나도 잘못하다가 죽는 거 아니야? 지금 상황에서 내가 몸을 빼면 확실히 사람들이 동요해서 역사가 바뀔지도. 이거 어쩌지?’
그 와중에 또 발석거에서 돌이 날아와 내 아래쪽에 있는 성벽을 때렸다. 그 충격이 세서 문루 전체가 흔들릴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