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89화 (89/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89화

89. 고창

“그래 잘 들었다.”

왕건은 나와 왕무, 문관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유금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윤비 마마의 계책이 참 괜찮습니다. 정윤비 마마께서 고창에 가서 그곳 사람들의 사기를 올려야 합니다. 고창 사람들이 견훤을 붙들고 있는 동안 우리가 전력을 다해 공격을 하면 됩니다.”

그러자 황보제공이 나서서 반박했다.

“고창 사람들의 사기를 올리는 것은 좋지만 퇴로에 군사들을 배치시켜 놓고 가야 합니다.”

황보제공의 말은 미묘했다. 내가 고창에 가는 것은 황보제공도 찬성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스스로 사지나 다름없는 고창에 간다니 황보제공 입장에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겠지. 하지만 내 입장에서 고창은 사지가 아니다. 난 이 고창 전투에서 고려가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고창의 세 호족은 끝까지 고창을 수비하는 데 성공한다.

그래서 전투가 끝난 뒤 그들은 엄청난 상을 받고 삼한 전체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나는 이 사실을 알고 있어서 망설임 없이 고창에 가겠다고 한 것이다. 내 안전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내가 고창에 가는 문제는 유금필과 황보제공이 모두 찬동했다.

일부분이라도 서로 동의하는 부분이 생기자 방금 전처럼 어조가 격해지지는 않았다. 유금필과 다른 호족들 사이에 비교적 차분하고 지루한 논쟁이 이어졌다.

‘이걸 노리고 내가 고창에 가겠다고 한 거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희생을 해서 갈등을 중재한 것처럼 보이니. 또 가장 위험한 고창에 가 있으면 전투 이후에는 사람들이 내 공을 거론할 거야.’

실질적으로 지금 전장에서 내가 말을 타고 군사를 지휘하는 것은 무리였다. 어떻게 하면 이 기회에 공을 세울까 궁리하다가 나는 이 방법을 썼다.

지금은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정신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잘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나는 덜덜 떨리는 내 손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도무지 손이 진정되지 않았다.

‘왕무가 내 손을 떼어냈어…….’

나는 손에 이상한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왕무가 내 손을 잡고 힘을 줘서 떼어낼 때의 촉감이며 체온이 계속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손이 떨리고 저릿저릿했다. 손이 내 손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소매 속에 손을 숨겼다. 이 시대 옷은 소매가 커서 다행이었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진짜 나와 왕무의 운명이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리 생각하니 갑자기 서글퍼졌다.

‘그런데 왕무 그 녀석이…….’

그러다가 갑자기 왕건이 외치는 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군령을 내리겠다.”

유금필과 여러 호족들은 모두 복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호족들 사이에서 오간 말을 다 놓쳐버렸어.’

내가 딴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논쟁이 끝나버린 것이다. 왕건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지난 2년간 나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나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많다. 또 나 하나만 믿고 근거지를 버린 사람도 있다. 그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제 견훤을 막기 위해 나도 목숨을 걸겠다. 전력을 기울여 고창으로 진군한다! 뒤에 군사를 남기지 않겠다.”

결국 왕건은 유금필의 말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왕건이 말하자 유금필을 비롯해 여러 호족들이 일제히 군례를 올리며 외쳤다.

호족들도 왕건의 말이 떨어진 후에는 더 이상 분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나도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도 사람들을 따라서 군례를 올렸다.

“대장군! 선봉은 그대가 서도록.”

왕건이 유금필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드시 견훤을 섬멸하겠습니다.”

유금필이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윤비도 명을 받들라.”

왕건이 내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폐하.”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병부낭중 임연객과 기병 30기로 정윤비를 호위하게 하겠다. 내가 김선평, 김행, 장길에게 보내는 서신을 가지고 가라! 반드시 고려군이 고창을 구할 것이다. 정윤비는 고창에서 그곳 호족들과 군사들을 격려하라. 우리가 갈 때까지 버텨야 한다.”

“명을 받듭니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내 곁에서 왕무가 나서더니 말했다.

“폐하, 저 역시 고창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을 돕겠습니다.”

“그건 절대 안 됩니다. 정윤 전하께서 고창으로 가시면 기껏 세운 제 작전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유금필이 재빨리 끼어들더니 왕무에게 말했다.

“대장군!”

왕무가 유금필을 바라보면서 외쳤다. 많이 노한 기색이었다.

“지금 모든 전력을 모아 견훤을 쳐야 아슬아슬하게나마 이길 수 있습니다. 정윤 전하께서 고창에 가시면 30기의 호위만 붙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무조건 전력을 집중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정윤 전하는 여기 계셔야 합니다.”

유금필이 말했다.

“나는 기병 30기와 함께 고창에 가도 좋습니다.”

왕무가 고집을 부렸다.

‘얘는 또 지금 상황에서 왜 이래?’

나는 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숨이 막혔다.

“정윤 전하 역시 일군의 대장으로 지금 고려군의 전력에 상당히 도움이 됩니다. 정윤비 마마야 전력이 안 되니 고창에 가서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전하, 사사로운 감정은 버리십시오.”

유금필이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어찌 그런 말을?”

왕무가 격분해서 외쳤다.

‘말려야 하는데.’

평소 같았으면 내가 은근슬쩍 왕무의 손을 잡든지 해서 말을 더 이상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방금 전의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는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나는 힐끔 유긍달, 황보제공 등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은 매우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왕무와 유금필의 언쟁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 많은 호족들이 보고 있는 와중에 왕무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 순간이 왕건이 입을 열었다.

“정윤!”

왕건의 외침을 듣고 왕무는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폐하.”

왕무는 왕건을 바라보며 뭔가 호소를 하려고 하는데 왕건이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미 대장군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전 고려군은 이제 대장군의 뜻대로 움직이면 된다.”

“…….”

왕건의 말에 왕무는 고개를 떨구었다.

“정윤비는 서둘러 가서 짐을 꾸려라. 견훤이 고창을 완전히 포위해 버리면 가는 길이 위험해진다. 오늘 내로 바로 달려가야 안전하게 고창에 입성할 수 있다. 다른 장수들도 모두 각자의 부대로 돌아가 군사들을 정비하라. 곧 견훤과 싸우게 될 것이다.”

왕건은 신속하게 일을 진행시켰다. 여러 호족들은 왕건의 막사를 나섰다. 나 역시 내 막사 쪽으로 돌아갔다.

‘내 막사로 돌아가면 왕무와 단 둘이 있어야 하는데 어쩌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내 막사 앞이었다. 왕건의 명대로 나는 짐을 꾸렸다. 군영에 시녀들을 데려올 수도 없고 이런 일은 내가 스스로 해야 했다.

그 와중에 왕무가 막사에 들어왔다. 왕무는 들어서자마자 나를 보고 외쳤다.

“국선. 국선은 정말 폐하에 대해 모르십니까?”

“내 손을 왜 떼어냈습니까?”

나는 불쑥 그 말이 하고 싶어져서 왕무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외쳤다.

“폐하께서는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며느리라도 희생시킬 수 있는 분입니다. 평소에 아무리 폐하와 친했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찌 국선은 그런 말을 하실 수 있습니까?”

왕무가 계속 말을 하는데 나는 다시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왕무가 내 손을 쥐고 떼어낼 때의 감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아무 말도 안 나왔다. 눈이 따갑고 감기에 걸린 것처럼 코가 막혔다.

“국선!”

놀란 왕무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소맷자락으로 내 얼굴을 닦아주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왕무의 소맷자락이 축축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그걸 깨달았다.

“왜 손을?”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말만 입 밖에 냈다.

“연우야.”

그런데 왕무는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더니 나를 꽉 껴안았다. 진짜 왕무의 힘이 세긴 셌다. 나는 나름 버둥거려봤는데 왕무의 품속에 갇혀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를 감싼 왕무의 두 팔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왠지 내가 꼼짝도 할 수 없는 그 느낌이 좋아서 나는 일부러 몸을 꼼지락거려 봤다.

그런데 한순간 나는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왕무가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춘 것이다.

내 입술에 왕무의 약간은 거친 입술이 느껴졌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왕무라고 해도 힘겨운 군영 생활이 길었으니 입술이 텄구나.’

그러다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가 대체 왜 이 와중에 한가하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미친 건가?’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그대로 왕무에게서 벗어나려고 온힘을 다해 버둥거렸다. 이번에는 왕무도 그대로 나를 풀어줬다.

“어, 국선.”

왕무는 상기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왕무와의 입맞춤이 끝나자 내 머리가 맑아졌다. 왕건의 막사에 있을 때부터 사실 나는 제대로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왕무와 이런 짓을 하다니. 내가 진짜 정신이 나갔어.’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폐하께서 내리신 군령을 따라야 합니다. 서둘러 짐을 꾸려야 합니다.”

나는 왕무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국선이 고창에 가면…….”

왕무가 뭐라 또 말을 하려 하는데 내가 말했다.

“고창에서 우리 고려군이 이길 것입니다. 유금필 장군은 이미 모든 것을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저도 안전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왕무를 차분하게 달랬다.

‘그러고 보면 왕무도 내가 너무 걱정이 돼서 그런 거지.’

그런 왕무의 마음을 생각해서 나는 내가 안전하다고 말해줬다. 다만 이상한 것은 나도 진작부터 왕무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었는데 처음부터 이렇게 달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이런 생각을 하니 정신이 흐트러질 것 같아 나는 고개를 흔들며 짐을 꾸렸다.

“나도 돕겠습니다.”

왕무는 이제는 별말 없이 내가 짐을 싸는 것을 도왔다. 그리고 짐을 다 싸자마자 나와 왕무는 막사를 나섰다.

왕무가 굳이 짐을 들겠다고 우겨서 나는 빈손으로 나왔다. 그런데 막사 밖을 나서자마자 임연객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나는 깜짝 놀랐다.

임연객은 진짜 어색한 표정으로 우리 막사 앞에 서 있었다.

“폐하께서 하도 서두르라고 명을 내리셔서. 정윤비 마마를 모시러 왔습니다.”

임연객이 왕무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 저는 정윤비가 짐을 싸는 것을 도왔습니다.”

왕무도 임연객을 보고 어색해하며 입을 열었다.

‘임연객의 표정을 보니 막사 안에서 우리가 소리를 지른 걸 들은 것 같은데. 아아악.’

그 생각을 하니 나는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어쨌든 임연객은 이미 완전무장을 하고 30기의 기병도 다 준비해 놨다. 그리고 유금필도 나와 있었다. 유금필이 나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쨌거나 이번에는 정윤비 마마께 고맙습니다. 적절하게 절 거들어주셨습니다.”

“꼭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도 폐하께서는 대장군의 계책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나는 진실을 말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왕건은 그런 결단을 내렸다.

‘내가 은근슬쩍 여기에 편승해서 유금필에게 빚을 지워 놨다. 꽤 이득을 얻은 거야. 또 사람들이 보기에는 목숨 걸고 고창에 가서 공을 세운 격이고. 좋아.’

이 일로 내가 얻은 이익을 계산하자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머리도 평소처럼 잘 굴러갔다. 원래 나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어쨌든 조만간 고창에서 또 뵙겠습니다.”

유금필은 그 말을 남기고 물러났다. 유금필도 바쁠 텐데 시간을 좀 내서 나를 만나러 와준 것이다.

“국선.”

미련한 왕무는 또 특유의 갑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금필 장군의 태연한 얼굴을 보세요. 이 싸움에서 지면 유금필 장군의 가문도 끝나는 상황인데도 저런 표정입니다. 이 싸움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는 왕무를 바라보며 씩씩하게 외쳤다. 그리고 나는 바로 말 위에 올랐다.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는 그대로 고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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