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88화 (88/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88화

88. 장인vs장인

‘아이구 힘들어.’

군영에서 나는 온몸이 쑤시는 것을 느끼며 일어났다. 이미 고려군은 사벌주에 진입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지면 끝장이기 때문에 고려군은 매우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백제군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진짜 죽을 맛이었다. 몇 달 동안 긴장 상태로 군영에서 먹고 자고 하니 정말 피로했다.

정윤비라서 불침번 같은 것은 안 서고 잤는데도 너무 힘들었다.

‘내가 이 정도면 보통 군졸들은 얼마나 힘들겠어?’

그런 생각을 하니 나는 걱정이 됐다.

‘실제 역사에서는 고려가 이 전투에서 이긴다고 나와 있다. 그래서 나도 한몫 잡으려고 참전했어. 이기는 거 맞겠지?’

분위기가 하도 안 좋아서 미래를 아는 나도 흔들릴 정도였다. 그때 내가 있는 천막의 입구가 열리더니 왕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국선, 몸은 괜찮습니까? 대치가 이리 길어지니 국선이 걱정입니다.”

나와 왕무는 같은 천막을 쓰고 있었다. 물론 왕무는 다른 침상에서 잤다.

‘거기다가 매일 일이 많아서 새벽에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니 별 부담은 없지. 그러고 보니 왕무는 잠도 조금밖에 못 자는데 괜찮은가?’

나는 약간 걱정스레 왕무를 바라봤는데 왕무의 얼굴은 멀쩡했다. 엄청난 체력이긴 했다. 왕무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오늘도 폐하께서 회의를 여셨으니 정오 전에 함께 가봐야겠습니다.”

“아……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나는 머뭇거리면서 대답했다. 사벌주에 들어오고 나서 왕건은 거의 매일 작전 회의를 열고 있었다. 나도 왕건의 조언자 자격으로 작전 회의에 끼게 되었다.

‘그런데 참 그런 회의에 가고 싶지 않아.’

몇 번 겪어보니 이런 마음이 들었지만 안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옷을 단정히 정돈하고 왕무와 함께 시간에 맞춰서 왕건의 막사에 갔다.

막사 안은 이미 모인 여러 호족들과 장수들로 인해 시끄러웠다. 호족과 장수들은 살벌한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왜 내가 거느린 군사들에게 오는 군량이 부실한 거야? 일부러 그러는 거 아니야?”

“이 와중에 밥타령이야!”

“당신 군영 군졸들이 우리 군졸 하나를 팼는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사방에서 호족들이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아버님의 저런 모습은 처음 본다.’

그 사이에는 임희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임희도 진짜 거친 목소리로 곁에 있는 장수들과 싸우듯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장내에는 내가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이 앉아 있었다. 유긍달, 황보제공 외에도 명지성주 왕충, 파평의 윤신달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개경에 있을 때는 고상하게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이 군영에서는 진짜 거칠어졌다.

‘그나마 한결같은 건 왕무 정도인가?’

나는 곁에 앉아 있는 왕무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드디어 왕건이 막사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건이 들어오니 여러 호족들이 잠잠해졌다.

왕건이 자리에 앉자마자 여러 장수들과 호족들이 군례를 올렸다.

“폐하를 뵙습니다.”

‘나와 왕무에게 아직 왕건이 필요하긴 해.’

그 광경을 보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나와 왕무가 지금 왕건이 앉아 있는 자리에 앉아서 호족들에게 뭐라 해도 말이 안 통할 거 같았다.

왕건은 소매 속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더니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 아침에 전령이 당도했다. 고창의 세 호족인 김선평, 김행, 장길이 보낸 전령이다. 견훤이 그 세 사람에게 군량을 요구했지만 그 사람들이 단호하게 거부했다. 그 3인은 견훤의 횡포에 분노해서 군사들을 일으켜 싸울 작정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

장내에 침묵이 감돌았다.

‘드디어 결전이군.’

나는 내심 그런 생각을 했다. 이 일대의 호족들은 모두 겁먹고 견훤의 명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고창의 호족들이 용기를 내서 들고 일어났으니 견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 고려군도 고창으로 가야 한다. 무조건 그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 그 방도에 대해 제장들이 논의토록 하라.”

왕건이 장내를 둘러보며 외쳤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다만 고창의 호족들이 일으킨 군사들의 수효가 얼마나 됩니까?”

고려의 개국공신 중 하나인 홍유가 물었다.

“이 서신에는 3천 명이라고 적혀 있군.”

“하나 고창의 호구를 따져볼 때 그만한 군사가 있겠습니까?”

홍유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이 시대에 3천 명이면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

보통 군소호족인 김선평, 김행, 장길이 힘을 합쳤다 해도 그만한 대군을 일으켰다고 믿기가 어려웠다.

“우리 고려군이 겁먹고 고창을 구원하지 않을까 봐 고창의 군세를 부풀려서 전한 것 같다. 아마 고창의 어린아이며 노인까지 모든 남자들을 싹 다 긁어모아 3천 군세를 만들었을 것이다. 3천 명이 없는데 있다고 하지는 않아.”

노련한 왕건이 말했다. 전국의 호족들을 만나 본 왕건은 고창 호족들의 심리도 꿰뚫고 있었다.

“선필 공, 고창의 실질적 군세는 얼마나 됩니까?”

홍유는 인근 사정에 정통한 선필에게 물었다.

“고창의 3인에 대해서는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용맹한 사람들이고 적고적의 난이나 여러 변란 때도 그 세 사람이 힘을 합쳐 큰 활약을 했습니다. 1천의 군사는 있을 것입니다.”

선필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장내에 모여 있는 고려 호족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호족들끼리 속삭이며 의견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왕건도 호족들이 합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홍유와 공훤 두 장수가 몸을 일으켜 말했다. 이 두 사람은 왕건이 믿는 공신이기도 했고 나이도 많아서 호족과 장수들의 대표로 나선 것이다.

“고창 사람들이 우리 고려를 위해 용기를 냈으니 구하러 가야 합니다. 다만 퇴각로를 확실히 확보해 놓아야 합니다. 죽령은 작년에도 백제장수 관흔에 의해 차단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길을 개척해야 합니다. 다행히 지리에 능통한 선필 공이 있습니다. 선필 공의 조언을 받아 일부 군사를 남겨 길을 만들고 남은 군사들이 고창으로 가서 견훤을 막아야 합니다.”

나름 전투 경험이 많은 호족들이 그런 작전안을 도출해낸 것이다.

“흐음.”

왕건이 뭔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그렇게 군사들을 움직였다가는 무난히 패할 것입니다.”

한쪽에 가만히 앉아 있던 유금필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대장군. 무슨 말씀을 그리?”

홍유가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 기껏 짜낸 작전을 두고 유금필이 그리 말하니 기분이 상한 것이다.

왕건은 장수들 간의 논쟁이 벌어지자 굳이 자기가 끼지 않고 자기 자리에 등을 기댔다.

“대장군께서 원하시는 작전은 무엇입니까?”

공훤이 슬쩍 홍유를 말리며 물었다.

“퇴로를 확보한다고 길을 닦을 군사를 2천 명쯤 남겨두면 막상 고창에 가서 힘이 달려서 견훤에게 패할 것입니다. 그런 낭비를 하지 말고 전력을 기울여 고창으로 진군해 견훤과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견훤의 군사들도 지쳐 있습니다.”

유금필이 당당하게 일어서서 말했다.

웅성웅성.

유금필의 말을 듣자마자 호족들이 놀라서 동요했다. 그리고 황보제공은 못 참고 일어서서 외쳤다.

“무슨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러자 한쪽에 앉아 있던 왕건이 말했다.

“예를 지켜가며 말을 해.”

그 와중에 역시 왕건의 장인이자 평주의 호족 박수경이 조심스레 말했다.

“유금필 대장군의 지략이 놀랍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퇴로를 확보해 놓지 않고 군사들을 진군시키자는 건 병법에 어긋나는 주장입니다. 일종의 배수진을 치자는 건데 그래서 성공한 사람이 몇이나 있었습니까?”

박수경은 백제군을 이긴 전적도 있고 군략에 몹시 능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라면 박 장군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황이 다릅니다. 견훤의 독특한 성정 탓에 백제군은 쉬지 못해 지쳐 있습니다. 우리 고려의 군사들은 푹 쉬다가 사벌주에 들어와도 이리 힘든데 백제군은 더할 것입니다. 지금이 견훤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때입니다.”

유금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이보시오. 대장군. 우리는 가문이 멸문할 것을 각오하고 여기까지 왔소. 그런데 퇴로를 확보하지 말고 진군하자니. 그게 말이 됩니까?”

평소에는 입을 잘 안 열던 유긍달도 마침내 유금필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외쳤다. 다른 호족들도 흉흉한 표정으로 유금필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광경을 보니 오싹해졌다. 물론 역사를 아는 나는 유금필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유금필의 주장이 비상식적으로 들리기는 하지만 그게 실제 역사에서는 통했어. 물론 대게의 경우에는 퇴로를 확보하고 움직이는 게 옳긴 하지만 이번에는 예외였지.’

그래서 나도 원래는 유금필의 편을 들어서 의견을 제시해 볼 작정이었다. 그런데 호족들의 흉흉한 기세를 보니 입이 안 떨어졌다.

지금 벌어지는 작전회의는 그냥 의견차이로 인한 토론 수준이 아니었다.

호족들은 살기까지 띠고 유금필을 노려보고 있었다.

호족들 입장에서는 유금필이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주장해서 자신들 집안을 망하게 만드는 악마로 보이는 것 같았다.

이 분위기 속에서 유금필을 편들기가 어려웠다.

“나를 믿으십시오. 전력을 기울이면 이길 수 있고 애매하게 군사를 남기고 가면 아슬아슬하게 질 것입니다. 우리가 뒤에 군사를 안 남기고 나가면 견훤의 허를 찌를 수 있습니다.”

유금필도 갑갑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마침내 황보제공이 못 참고 외쳤다.

“야! 유금필.”

그 말을 듣자 유금필도 말없이 벌떡 일어났는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왕의 장인들끼리 한판 붙을 기세였다.

“내가 예를 지켜가며 말하자고 하지 않았나?”

그러자 가만히 있던 왕건이 고함을 질렀다. 평소 목소리의 3배쯤 되는 소리였다. 나는 귀가 아파서 귀를 막았다.

왕건이 호통을 치니 그나마 장내의 호족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물 가져와. 한 잔씩 돌려.”

왕건은 한쪽에 서 있는 군졸에게 그런 명을 내렸다. 그리고 왕건 자신도 소리를 질러 목이 아픈지 물을 벌컥 마셨다.

그러더니 유금필과 황보제공 등을 바라보며 외쳤다.

“당신들이 소리를 질러가며 싸우니 다른 문관들이 입을 못 열잖아!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자.”

그리고 왕건은 문관들 쪽을 바라보며 말을 해보라고 눈짓을 했다. 군영에는 문관들도 여럿 와 있었다.

‘나도 문관으로 분류되겠지? 좋아. 말을 할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문관들은 모두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애매하게 말했다. 실질적 세력을 지닌 왕의 장인들끼리 격돌하는 것을 보고 세력이 없는 문관들은 한쪽을 편들기 난감해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내 차례까지 왔다. 내가 눈을 딱 감고 말했다.

“고창의 사람들이 용기를 내서 일어났습니다. 견훤이 고창을 완전히 포위하기 전에 제가 일부 기병들과 함께 고창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제가 그들을 격려하면 고창 사람들도 우리 고려의 결의를 알 것입니다.”

내 나름대로 교묘하게 유금필을 편든 것이다.

‘왕의 며느리가 고창에 가 있으면 고려군은 그냥 끝까지 싸우는 거 외에 길이 없다. 며느리마저 버리고 도망치면 그게 뭐가 돼? 결국 유금필 말대로 결사적으로 싸워야지.’

다만 다른 호족들도 내 의중을 순식간에 눈치챈 것 같았다. 모두 살벌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임희마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슬쩍 내 곁에 있는 왕무의 왼손을 잡았다. 나에게 힘을 좀 보태 달라는 신호였다. 드디어 왕무도 입을 열 차례였다.

‘왕무는 내가 손만 잡으면 내 말대로 하니.’

여러 일을 겪으면서 나는 그 비법을 깨달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왕무는 오른손으로 내 손을 잡고 떼어내더니 말했다.

“유금필 대장군의 말은 신중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왕무는 심각한 표정으로 왕건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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