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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87화 (87/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87화

87. 결전

“연우야, 참 간만에 이리 보게 됐구나.”

임희가 따뜻한 어조로 말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개경에 살아도 상산저를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왠지 모르게 그렇게 됐다.

“아버님.”

임희의 얼굴이 좀 마른 것 같아 안타까웠다. 오늘은 임희가 나주원에 찾아와서 만나게 됐다.

“폐하의 명을 받아 내가 남쪽으로 내려가게 됐다. 우리가 아는 재암성주 선필 공이 도저히 못 버티고 망명을 결심했다. 사벌주를 견훤의 대군이 거의 장악해서 선필 공도 엄청난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지. 견훤이 계속 우리 폐하의 명령이 사벌주에 전달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수색하고 있다더구나. 선필 공과 안면이 있는 내가 마중을 나가는 게 좋겠다고 폐하께서 말씀하셨다.”

임희가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전황은 고려에게 절망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진보성, 순주성, 고사갈이성을 연이어 격파한 견훤에게 겁먹고 재암성주 선필은 고려로 망명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나마 재암성은 고려 땅에서 멀지 않고 선필은 신라 승부 출신으로 샛길을 잘 안다. 무사히 빠져나오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혜 아가씨를 만나게 되면 안부를 전해주십시오.”

나는 가벼운 어조로 임희에게 말했다.

“참 연우 너는 내 딸이지만 대단하구나. 이 상황에서도 평소와 다름없다. 아마 이번에 내가 사벌주 근처에 내려가 선필 공을 만나게 되면 한동안 개경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조만간 사벌주에서 견훤과 한판 결전을 벌어야 한다. 나와 선필 공도 그 결전에 참전해야 하고. 그사이에 연우 네 얼굴을 못 볼 거 같아 이리 너를 만나러 온 것이다.”

임희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임희는 어쩌면 그 전투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래서 나를 이리 보러 온 거야.’

나는 임희의 언행을 보고 그 속내를 알 수 있었다.

‘하긴 이 시대를 사는 고려인들에게 지금 상황은 견디기 어렵겠지.’

그러나 이미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나는 그런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

“아버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 고려가 이깁니다. 견훤도 신라도 우리에게 굴복할 것입니다.”

“허허허, 그리되면 좋겠지만.”

임희는 내 말을 듣고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저도 조만간 사벌주 쪽으로 내려가게 될 것 같습니다. 어차피 또 볼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나는 임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도 내려온다고? 하긴 우리 고려가 쓸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해야 하니. 그래.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마.”

임희는 내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매일 나가는 한림원의 분위기도 엄중했다. 학사들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자료를 모으고 있었다. 나도 그 사이에 껴서 문서 작업을 했다.

“가을 농사일이 끝나면 동원할 수 있는 전군을 모아 남하할 것이다. 학사들은 여기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하라.”

왕건은 단호한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명을 받듭니다.”

최언위를 필두로 한 학사들도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연우야. 너도 함께 출전할 테니 준비해라. 너의 기책이 필요한 때가 올지도 모르니 네가 내 며느리지만 출전시킬 수밖에 없다.”

왕건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나는 왕건에게 예를 올리며 씩씩하게 대답했다.

‘엄청난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출전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동안 내가 보여준 실적이 있으니 왕건도 나를 참전시킬 수밖에 없지.’

왕건과 견훤은 구 신라령, 오늘날의 경상도 지방을 두고 여태 싸워왔다. 이 경상도 지방은 소백산맥으로 둘러쳐진 땅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경상도로 들어가려면 소백산맥을 넘어야만 했다.

이 시대에 소백산맥을 넘을 때 사용하는 고개는 몇 개 되지 않았다. 즉 이 소백산맥의 고개들만 장악하면 경상도 지방을 안정적으로 수비할 수 있었다.

지금 견훤이 무너뜨린 순주성, 고사갈이성 등은 소백산맥 바로 남쪽에 있는 성이었다. 견훤이 여기까지 온 이상 소백산맥의 고개들을 장악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견훤이 소백산맥의 고개들을 통제하기 시작하면 고려군은 앞으로 경상도 지방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그대로 삼한 땅 전체가 견훤 손에 들어가는 격이지.’

견훤이 지금 연전연승하는 것은 오늘날의 전라도와 경남 지역을 장악한 덕이었다.

지도로 보기에는 고려 땅이 넓어 보이고 백제 땅은 작아 보였다.

하지만 농업이 주요 산업인 시대에 백제가 차지한 땅이 기후가 따뜻하고 농사가 잘됐다. 그래서 백제의 인구나 생산력이 막강했다.

그 힘을 바탕으로 견훤은 군사를 모아 계속 이기고 있었다.

‘이 와중에 견훤이 소백산맥의 고개들을 점거하고 경상도 전역을 장악하면 그 인구와 생산력을 고려는 도저히 못 따라간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왕건과 고려 조정은 모든 전력을 쏟아부어 이 사태를 막을 작정이었다.

그야말로 결전이 벌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이 결전에서 왕건이 이긴다. 내가 해야 할 것은 이 결전에서 무슨 수를 써서든 돋보이고 왕무와 함께 공을 압도적으로 세우는 거야. 다른 고려 사람들은 이길 확률이 낮다고 예상하고 있다. 그런 만큼 나와 왕무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 돼. 흐흐흐.’

나는 열심히 그쪽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며 왕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와중에도 연우 너는 미소를 짓는구나. 참 대단하긴 대단하다!”

아무래도 내가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는 와중에 표정 관리를 못 한 모양이다.

* * *

개경에는 엄청난 대군이 모이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왕건의 직계 부하들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달려왔다.

“정윤 전하, 사방에서 모인 군사들의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나는 엄청난 전투가 벌어지는 만큼 열심히 정보를 캐고 다녔다. 정윤 왕무도 군부 내에서는 상당한 영향력이 있었기에 왕무를 통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요새는 매일 밤마다 왕무를 붙들고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폐하의 장인들이 총동원됐고 패서 호족들도 전력을 다해 군사를 일으켜서 그 숫자가 1만 8천 명에 이릅니다. 오랫동안 집에서 은거하던 정주 유씨의 유천궁 공도 직접 나서고 있습니다.”

“유천궁이라. 흐음.”

나는 이 정보를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유천궁은 왕건의 장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유천궁의 딸인 정주 왕후는 일찍 병사했다.

‘유천궁의 딸이 죽은 이후에 왕건이 정주 유씨 집안의 다른 여인과 또 결혼했다. 그게 지금의 정주 왕후지.’

만약 유천궁의 딸이 오래 살았다면 지금처럼 왕위계승 경쟁이 치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천궁은 재산이 엄청난 호족이고 왕건을 처음부터 도왔다. 거기에 유천궁의 딸은 고려를 개국할 때 엄청난 공을 세웠다.

‘유천궁의 딸이 살아 있고 아들을 낳았다면 걔가 정윤이 됐겠지. 후계구도도 안정적이었을 거고.’

하지만 유천궁의 딸이 아들을 못 낳고 일찍 병사해서 지금 같은 구도가 만들어졌다.

‘유천궁 입장에서는 고려의 모든 권력을 쥐기 일보 직전에 모든 게 무산됐다. 거기에 왕건이 정주 유씨의 다른 여인과 결혼하는 과정에서 상심해서 아예 은거했다고 들었다.

정치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그런데 그런 유천궁이 다시 움직일 정도면 왕건의 처가들이 전력을 다해 움직이는 건 맞군.’

하긴 견훤이 삼한을 통일하면 왕건과 혼인관계를 맺은 가문들은 다 도륙당할 게 뻔했다. 견훤의 성격상 그 가문들을 용서해 줄 리 없었다.

그 가문들이 이제는 살려고 적극적으로 움직여 1만 8천 명이란 엄청난 대군이 모인 것이다.

내가 이 와중에 어떻게 움직이는 게 가장 이득인지 계산하고 있을 때 내 손이 따뜻해졌다.

놀라서 바라보니 왕무가 내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정윤 전하!”

내가 당황해서 외치는데 왕무가 입을 열었다.

“국선이 꼭 참전해야 합니까? 국선이 참전하지 않기로 결심만 하면 내가 폐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국선은 개경에 있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왕무는 아마 내가 걱정되는 모양이다.

“전하, 어차피 이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면 개경도 무너질 것이 뻔합니다. 차라리 사벌주에 가서 힘을 보태는 게 가장 낫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왕무의 손에 깍지를 끼며 찬찬히 말했다.

“국선!”

왕무는 짧게 외쳤다. 하지만 내 말을 듣고 납득한 모양이었다. 그 이후에는 그저 내가 묻는 대로 대답만 할 뿐 더 이상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 * *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빨리 갔다. 어느덧 고려군은 출정준비를 마쳤다. 나 역시 나름대로 열심히 짐을 꾸렸다.

“그럼 모두 가자. 우선은 충주에 가서 집결한다. 거기서 대오를 정비하고 사벌주로 들어간다.”

왕건은 침통한 표정으로 그런 군령을 내렸다. 고려군은 수륙으로 나뉘어 충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해 왕건, 왕무와 주요 수뇌부들은 배를 타고 남한강을 따라 충주로 나아갔다. 수로를 통해 내려가면 속도도 빠르고 편했다.

배에 탄 순간 왕건은 사람이 변한 것 같았다. 농담을 단 한마디도 안하고 선실에서 지도만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기는 일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같이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왕무도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분위기에선 함부로 설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게 좋겠다.’

나도 그런 생각에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있었다. 며칠 안 되어 일행은 그대로 충주에 당도했다.

충주에는 이미 임희, 선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필은 일가족을 데리고 무사히 빠져나온 것이다.

“상보!”

선필을 보자마자 왕건이 외쳤다.

“폐하를 뵙습니다.”

선필은 몇 년이 지나도 왕건이 자신을 그렇게 불러주자 감동한 표정이었다.

“나 때문에 상보께서 재암성을 떠나게 됐으니 마음이 무겁습니다.”

“아닙니다. 폐하.”

선필은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왠지 그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졸지에 선필은 근거지를 잃은 호족이 된 것이다.

“상보께 청을 하나 드릴까 합니다. 정혜 누이에게 청혼하고 싶습니다.”

왕건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지금 상황에선 어쩔 수 없지. 선필은 왕건 하나만 바라보고 연락책을 맡다가 성이고 뭐고 다 버리고 망명해 왔으니. 왕건이 선필의 일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순리고. 그러기 위해선 혼사를 해야지. 그런데 나이 차이가 좀.’

나는 그 생각을 하니 좀 못마땅해졌다.

“소신의 영광입니다.”

선필은 왕건의 말을 듣자 오히려 감격한 기색이었다. 당연히 왕건의 청혼은 받아들여졌다.

“지금은 사정이 급해서 정혜 누이를 만날 겨를이 없습니다. 곧 군사들을 수습해 사벌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상보께서 우리 대군의 길잡이를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왕건은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왕건이 사벌주에서 전투를 벌이려면 신라 승부 출신인 선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예 청혼까지 한 것이군.’

나는 비로소 왕건의 뜻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소신이 그러기 위해 재암성에서 빠져나오면서 이 지도만은 다 챙겨왔습니다.”

그러면서 선필은 하인들을 시켜 엄청난 양의 지도를 왕건에게 선보였다.

“모두 하루만 쉬며 대오를 정비한다. 그리고 바로 사벌주로 들어간다.”

왕건은 그 지도들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군령을 내렸다. 왕건은 망설임 없이 사벌주에서 결전을 벌일 각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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