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86화
86. 연전연패
마후라 대사의 말을 들은 왕건이 대답했다.
“다른 천축사람이 온 일은 없습니다. 허허.”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찌 이리 천축국의 음식을 준비해 주셨습니까? 대왕의 은혜에 놀랄 뿐입니다.”
마후라 대사는 왕건에게 합장하며 말했다.
마후라 대사의 말을 듣고 구산사에 모여든 구경꾼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천축국 사람들은 저런 음식을 먹는다고? 왜 그럴까?”
“그건 그렇고 우리 폐하께서는 어찌 알고 음식을 준비하신 걸까? 천축국이 만 리나 떨어진 나라인데 그곳 일을 어찌 아셨지?”
“천축이면 만 리보다 더 멀지 않나? 참 신통한 일이야. 왕실에서는 모든 걸 내다보고 있나 봐.”
그런 주변의 반응을 살피던 왕건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책에서 천축국의 풍속에 관해 읽었습니다.”
그런 왕건의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런 책이 어디 있냐고 무안을 주다가 순식간에 이러다니.’
나는 분통이 터졌으나 왕건이 왕이라서 따질 수도 없었다. 마후라 대사와 몇 마디 주고받던 왕건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연우야. 이리 오너라.”
왕건이 무슨 자애로운 시아버지인 것처럼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확 다 내팽개치고 집에 가버릴까?’
잠시 그런 생각도 했지만 나는 꾹 눌러 참고 왕건 곁에 다가갔다.
“제 맏며느리입니다. 참 학식도 깊고 재주가 많아 내가 평소 아끼는 며느리입니다. 이번에 천축국의 음식을 준비한 것도 이 아이입니다. 어떠냐? 연우야. 내가 네 음식을 뺄 수가 없으니 상에 올리자고 했지?”
왕건이 교묘하게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 물론 왕건이 그런 말을 한 건 사실이야. 그런데 그다음에 다른 음식 뒤에 숨겨서 안 보이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는데.’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왕건의 질문에 우선 대답을 하긴 해야 했다.
“예. 그렇습니다.”
“됐다. 더는 말할 필요 없다.”
왕건은 재빨리 내 입을 그렇게 막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구산사에 모여든 구경꾼들은 모두 감탄하는 표정으로 왕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소년이 음식을 준비했단 말입니까? 참 인연입니다.”
마후라 대사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허허허. 대사같이 총명하신 분도 아직은 우리 고려말에 서투르십니다. ‘소녀’라고 말씀하셔야 할 부분에서 ‘소년’이라고 잘못 발음하셨습니다. 하긴 발음이 비슷해서 외국에서 오신 분들은 구분이 힘들겠지요.”
왕건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폐하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소승이 보기에 아직은…… 아닙니다. 부질없습니다. 하하하.”
마후라 대사도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뜨끔!
나는 마후라 대사의 말을 듣고 몹시 놀랐다.
‘저 천축스님은 뭘 알고 저러는 건가? 아니면 왕건 생각처럼 외국인이라 발음 실수를 한 건가?’
그런 내 앞에 마후라 대사가 다가와서 말했다.
“덕분에 오래간만에 고향 음식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마후라 대사에게 손사래를 쳤지만 마후라 대사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별것 아닌 보답입니다.”
그러더니 마후라 대사는 붓을 들어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방금 전까지 마후라 대사가 설법을 해서 장내에는 문방사우가 준비되어 있었다.
먹이 마르자 종이를 접은 마후라 대사는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주머니 속에는 말린 대추가 담겨 있었다.
마후라 대사의 간식 주머니 같았다. 주머니 속을 비운 마후라 대사는 종이를 그 안에 넣었다.
그리고 마후라 대사는 주머니를 나에게 건넸다.
“나중에 마음이 심란하고 고민이 될 때 한번 열어보십시오. 그 안의 글귀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별것 아닌 선물이라 나는 그냥 받기로 했다.
“연우야. 그런 선물도 받고 참 부럽구나.”
곁에서 왕건이 끼어들었다. 나는 그런 왕건을 보며 말했다.
“마후라 대사께서 드신 진귀한 음식을 폐하께서도 한번 드셔보십시오. 마후라 대사님. 음식을 더 드셔도 됩니다. 양은 넉넉합니다.”
나는 구산사에 올 때 카레를 넉넉히 준비해 왔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기에 그랬다.
“감사합니다. 폐하께서도 드셔보십시오. 기운을 북돋는 음식입니다.”
마후라 대사는 카레가 더 있다는 말에 기뻐하며 왕건에게 말했다.
“허허허.”
왕건은 당황한 듯 웃기만 했다. 시녀들은 카레를 담은 접시 2개를 준비해서 왕건과 마후라에게 올렸다.
잠시 망설이던 왕건은 갑자기 중신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들 함께 먹지. 나만 먹기에는 미안하군.”
“예?”
중신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두가 한 수저씩만 먹으면 순식간에 한 접시를 비울 수 있겠군. 이거 이 귀한 음식을 나만 먹기에는 너무 미안해서.”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어찌 소신들이.”
중신들이 손을 저었으나 왕건이 강력하게 말했다.
“나눠 먹고 빨리 끝내자고.”
“알겠습니다. 폐하.”
마침내 중신들도 모두 왕건의 뜻에 따랐다. 중신들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카레를 한 수저씩 먹었다. 다만 먹고 나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맛이 강렬하지만 의외로 괜찮은 면이?”
‘내가 간을 볼 때 왕무의 입맛에 맞춰서 다른 고려인들이 먹기도 괜찮다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한쪽에 서 있는 왕무 쪽을 바라보았다. 정윤으로서 왕무도 당연히 이 행사에 참가했다.
내가 왕무 쪽을 바라보자마자 딱 눈이 마주쳤다. 왕무는 흐뭇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 왕무를 보면서 나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모든 사람이 처음에 카레를 보고서는 머뭇거렸는데 왕무는 진짜 아무 망설임 없이 카레를 먹었다. 이건…….’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마음이 복잡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어쨌든 마후라 대사 환영행사도 마무리되는 수순이었다.
“공주들이 만든 음식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왕건은 그런 명을 내렸다.
“와아. 용 모양의 음식이 맛보고 싶어.”
“난 저 배춧국 맛이 궁금해.”
구경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음식을 향해 달려왔다. 그 모습을 보며 여러 공주들은 기쁜 기색이었다. 마후라 대사야 고향 음식인 카레에 빠졌지만 다른 고려 사람들은 모두 공주들의 음식에 감탄했다.
내가 만든 카레 쪽에는 오는 사람이 없었다.
‘뭐 모두가 나름 성과를 거두었으니 괜찮네.’
그럭저럭 마후라 대사 환영식도 끝나고 왕건 일행은 모두 궁궐로 돌아갔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서 움직였다.
‘에휴. 왕궁을 왜 언덕에다 지어 가지고 올라가기 힘들게. 피곤해 죽겠구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왕건을 원망했는데 내 바로 뒤에서 왕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우야.”
“예?”
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왕건이 어느 틈에 내 곁에 와 있는 것이다.
“마후라 대사가 너에게 준 주머니를 좀 보여다오.”
왕건은 내 곁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마후라 대사께서 저에게 고민이 있을 때 보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마후라 대사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 말을 따를 작정이었다.
“그러니 연우 너는 안 보고 나만 보면 되지 않겠느냐? 내가 보고 너에게 안 알려주면 되는 거지. 나는 이런 걸 엄청 좋아한다. 그 주머니 안을 못 보면 너무 궁금해서 잠이 안 올 거 같아.”
왕건이 내 곁에서 말했다.
‘아니 뭐 이런 뻔뻔스러운…….’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왕이 이러니 방법이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나는 공손하게 주머니를 바쳤다.
“어디 보자. 도선비기 같은 게 들어 있으려나?”
왕건은 떨리는 표정으로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주머니 속의 종이를 펼쳐 읽은 왕건은 곧 실망한 기색이었다.
“어떻습니까?”
내가 묻자 왕건은 다시 종이를 접어 주머니 속에 넣으며 말했다.
“그냥 좋은 말이 적혀 있다. 흔한 불교 경구야. 확실히 고민이 있을 때 보면 좋겠다만. 마후라 대사는 도선 대사 같은 분은 아니구나. 너한테 지금 말해줘도 상관없을 거 같은데. 그래도 마후라 대사의 말은 지키는 게 좋겠지. 뭐 어쨌든 보여줘서 고맙다.”
왕건은 그러더니 말을 몰아 곧 멀어졌다.
‘진짜 별거 아닌가 보군. 왕건의 반응을 보면 뻔한 좌우명 같은 게 적혀 있나 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주머니를 품속에 넣었다. 그래도 천축고승이 나에게 준 선물이니 잘 보관할 작정이었다.
그런 내곁으로 왕무가 말을 몰아 다가왔다. 우리를 호위하는 군사들을 감독하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정윤 전하께서도 이 주머니 안을 보시겠습니까?”
나는 왕무 얼굴을 보자 나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이 나왔다.
“괜찮습니다. 국선. 마후라 대사께서 국선에게 따로 주신 글이니 함부로 보지 않겠습니다.”
왕건과 달리 왕무는 고개를 저으며 그리 말했다.
* * *
마후라 대사 환영식을 마치고 나자 어느덧 여름이었다.
“아 덥구나.”
내가 한림원에 가면 왕건은 부채질을 하며 일을 봤다. 나는 학관이며 한림원을 오가면 더워서 땀이 났다. 초여름이었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근심에 잠겼다.
‘이제는 7월이다. 조만간 난리가 나겠구나.’
그리고 내 예상대로 일이 흘러갔다.
“견훤이 대군을 동원해 진보성을 급습했습니다. 성은 함락되고 성주 홍술도 견훤의 손에 죽었습니다.”
이 충격적인 소식이 개경에 당도했다.
“…….”
왕건조차 이 이야기를 듣고 한림원에서 말없이 눈만 감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고려 중신들뿐만 아니라 개경 전체가 진보성 함락의 소식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사벌주에서 왕건에게 제일 충직한 호족인 홍술이 무너졌다. 이제는 사벌주가 무너지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했다.
성 하나가 무너진 소식은 통제를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알리는 전령들이 계속 달려왔다.
“순주성도 무너졌습니다. 순주성 장군 원봉은 탈출했습니다.”
순주성 함락의 소식에 왕건은 한림원에서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순주가 무너졌으니 이젠 부석사에 갈 수가 없겠구나. 허허허.”
순주는 오늘날의 영주, 안동 인근이었다. 이제 여기까지 견훤이 점령했으니 영주에 있는 부석사에 가는 것은 위험해진 것이다.
“원봉은 어찌 처벌하실 것입니까?”
한림원령 최언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관직을 낮춰라!”
왕건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유금필이 가만히 있기를 원했기에 나도 이 상황에서 딱히 할 게 없었다. 다만 나는 이 모든 일의 결과를 알고 있었기에 태연할 수 있었다.
‘어차피 고려가 이긴다. 그런데 실제 이 시대에 와서 견훤의 위력을 느껴보니 왕건이 결국 이긴 게 신기하긴 하군. 견훤이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긴 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한림원에서 고뇌하는 왕건과 한림원 학사들을 살펴보았다.
“연우 너는 이런 상황에서도 어찌 평소와 똑같으냐? 진짜 억지로 태연한 척하는 것도 아니고 놀랍구나.”
정신없이 대책을 논의하던 와중에 왕건은 문득 나를 보며 말했다.
“견훤도 결국 폐하께 항복할 것이고 신라도 굴복할 것입니다.”
나는 이 기회를 틈타 또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니 너는 지금 상황에서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왕건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보며 물었다.
“예.”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런 내 모습에 왕건은 약간 힘이 난 듯했다. 다시 왕건은 학사들과 대책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또다시 충격적인 소식에 개경에 전해졌다.
“고사갈이성을 지키며 견훤과 싸우던 성주 흥달이 병사했습니다. 대장이 죽자 고사갈이성의 군사들도 그대로 무너졌습니다.”
“이, 이런.”
패전 소식이 끊임없이 쏟아지자 왕건도 기가 막혀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