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85화
85. 요리
드디어 삼장법사 마후라 대사가 개경에 도착했다. 이날 아침부터 궁궐은 분주했다.
“자, 모두 준비됐느냐?”
왕건이 공주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예, 폐하.”
고려 공주들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입이 잘 안 떨어졌다.
“오래간만에 가족나들이가 됐구나. 우선 개경 교외에서 마후라 대사를 만난 다음 그대로 구산사로 갈 것이다. 구산사에서 마후라 대사의 설법을 듣고 난 뒤 음식 공양을 할 예정이다. 그러니 그 시간에 맞춰 잘 준비하거라.”
왕건이 오늘 일정에 대해 공주들에게 말해줬다.
“알겠습니다.”
공주들은 입을 모아 외치는데 나는 왠지 위축되는 것을 느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국선.”
그런 내 곁에서 왕무가 속삭였다. 왕무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난 며칠간의 일을 떠올렸다.
* * *
“어, 언니. 이게 다 뭔가요?”
오지수는 부엌에서 놀란 얼굴로 물었다.
“천축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에요. 아직 완성은 못 시켰지만 만들어지면 마후라 대사가 깜짝 놀랄 게 확실합니다.”
나는 주걱으로 카레(?)를 저으며 말했다. 원래 내 계획은 시녀들을 시켜서 카레를 만드는 것이었다.
내가 나주원에 들어올 때 나를 따라온 상산 출신 시녀들이 있었다. 나는 지휘만 하면서 푹 쉴 작정이었다.
하지만 평생 카레를 본 적이 한번도 없는 시녀들은 아무리 내 말을 들어도 일을 잘하지 못했다. 감도 못 잡았다. 그래서 정윤비인 내가 직접 나서게 됐다.
“내, 냄새가 이상하지 않나요?”
오지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아직 배합이 잘 안 돼서 그래요.”
나는 씁쓸하게 답했다. 나는 현대에 있을 때 가난한 대학원생이라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경우가 많았다. 카레 같은 경우도 내가 만들어 봤다.
‘현대에 있을 땐 그냥 카레가루를 사서 요리를 하면 됐어. 그런데 지금은 그 카레 가루부터 내가 만들어야 하니.’
강황가루와 여러 향신료를 배합해서 카레 가루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상상외로 어렵다는 것을 실감했다.
“마후라 대사가 곧 도착하실 텐데 아직까지 이러면 큰일 아닌가요?”
오지수가 그 점을 지적했다.
“조금만 더 시험해 보면 될 것 같아요. 공주님도 한번 맛을 보세요.”
나는 카레(?) 아니 아직은 카레 비슷한 것을 한 수저 떠서 오지수에게 건넸다. 그런데 오지수는 그 카레를 보고 혼비백산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제발, 제발 그걸 저에게 먹이지 마세요.”
오지수가 워낙 절박하게 말해서 나는 손을 거두었다.
“…….”
솔직히 오지수의 반응 때문에 나는 마음이 상했다.
“언니,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따로 준비를 잘할게요. 언니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오지수는 나에게 그렇게 외치고는 재빨리 부엌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그런 오지수의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며 계속 카레제조를 계속했다.
그 광경을 발을 구르며 지켜보던 시녀 경란이가 마침내 나섰다.
“정윤비 마마. 이 음식이 참 진귀한 것 같긴 하나 그 형상이 뭔가를 연상시킵니다. 너, 너무 기이해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듯합니다. 차라리 저희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십시오. 시간이 촉박해도 저희들이 그럴듯한 음식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경란이가 간곡하게 나에게 권했다.
‘아니 사학 석사인 내가 야심 차게 떠올린 아이디어인데 반응이 왜 이래? 그럼 내가 지금 만드는 건 그럴듯하지 않다는 말인가?’
나는 오기가 생겨서 고개를 저었다.
“모두들 나가 보거라. 내가 혼자 음식을 완성하겠다.”
기필코 카레를 완성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발을 동동 구르는 상산 시녀들 때문에 정신이 산만해져서 나는 그런 명을 내렸다.
시녀들이 나가고 난 뒤 나는 카레 가루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재료 배합을 계속했다.
“냄새는 그럴듯해졌어. 맛만 괜찮으면 되는데 이제는 혀가 다 얼얼하네.”
나는 혼자 카레를 만들다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계속 카레 맛을 보다 보니 혀의 감각이 둔해졌다.
‘누가 와 줬으면 좋겠는데. 괜히 시녀들을 내보냈다.’
내가 그런 후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국선, 국선이 마후라 대사를 위한 음식을 잘 만들었는지 보러 왔습니다.”
왕무가 때마침 들어왔다.
“정윤 전하! 이걸 한번 맛보십시오.”
나는 왕무의 얼굴을 보자마자 너무 반가워서 카레를 한 수저 퍼주었다. 왕무는 별말 없이 카레를 받아먹었다.
“맛이 강렬합니다. 그런데 확실히 끌리는 면이 있습니다. 아직은 뭔가 허전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왕무는 카레를 먹고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전하께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나는 왕무의 말을 듣고 반가워서 외쳤다. 왕무는 지금 정직하게 맛평가를 해주고 있었다.
‘왕무가 도와주면 먹을 만한 카레를 완성할 수 있어. 왕무 입맛에 맞추면 될 것 같아. 이제 조금만 더 시험해 보면 된다.’
내 말을 들은 왕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후라 대사를 환영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니 내가 당연히 돕겠습니다.”
“그럼, 저기 앉아 계세요. 전하께서는 맛만 봐주시면 됩니다.”
“어찌 그러겠습니까? 간단한 정리 같은 것은 내가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계속 시험을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왕무는 소매를 걷어붙이더니 어수선해진 부엌을 정리했다.
“전하.”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엄청난 고마움을 느꼈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걱을 쥐고 카레를 저었다.
그리고 다른 배합법으로 완성한 카레를 수저로 퍼서 왕무의 입에 가져갔다.
“이것도 한번 맛을 봐주세요.”
왕무는 정리를 잠시 멈추고 내가 먹여주는 카레를 받아먹었다.
“소금을 약간 더 넣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왕무는 또 잠시 생각하다가 그리 답했다.
* * *
‘그런 우여곡절 끝에 카레를 완성하긴 했다. 그런데 반응이 어떨지 걱정이야. 왕무는 맛있다고 했지만…….’
오지수와 시녀들의 걱정스러운 얼굴도 떠올라 나는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오기를 부리지 말고 경란이의 말을 듣는 게 나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일은 잘 진행됐다.
왕건 일행은 그대로 개경 교외에서 삼장법사 마후라 대사를 만났다.
“폐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왕건 앞에서 마후라 대사는 고려말로 그렇게 말했다. 좀 어눌하긴 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고려말이었다.
짝짝짝!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천축고승이 우리말을 한다.”
“참 신기하군.”
왕건도 상당히 감탄한 기색이었다.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나는 한쪽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삼장법사라고 불릴 정도면 어학능력은 기본이지. 이 시대 고승들은 불경을 번역하거나 전파하기 위해 외국어 공부도 많이 했으니. 마후라도 준비를 하고 고려에 입국한 거야.’
잠시 대화를 나눈 왕건은 마후라 대사와 함께 구산사로 향했다. 구산사에도 이미 고려의 고승들과 구경꾼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축에서 온 고승에 대한 개경 사람들의 호응이 좋았다.
‘아 부담되네. 이 많은 구경꾼들 앞에서 음식을 선보여야 한다고?’
나는 그런 생각에 더 움츠러들었다.
그사이에도 일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간단히 차를 마신 마후라 대사는 고려 승려들에게 자신이 가져온 불경을 전해줬다. 그리고 설법이 시작되었다.
왕건은 구산사 한쪽에서 나와 공주들을 불렀다.
“자 설법만 끝나면 음식 공양이다. 너희 음식을 한번 보자. 데워야 하는 음식이면 빨리 데우고 바로 음식을 낼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자 먼저 유설란이 자신만만하게 나서더니 자신의 음식을 선보였다.
‘저게 뭐야? 무슨 예술품 아니야?’
나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채소로 용을 조각해 놨다. 그 용 옆에는 밥알로 사람 비슷한 형상을 정교하게 만들어 놨다.
“이게 뭐냐? 참 놀랍구나?”
“밥과 야채로 천룡팔부 중 중 천신, 신룡의 형상을 만들어 봤습니다.”
“허허허. 잘했다. 네 솜씨가 놀랍구나.”
왕건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맛을 좀 보십시오. 폐하께서 맛을 보실 수 있게 따로 만들었습니다.”
유설란은 조그마한 용 한 마리에 밥을 약간 얹어 바쳤다.
“간이 잘 됐다.”
왕건이 그리 말했다.
다른 공주들도 마찬가지였다. 황보인혜는 야채로 글자를 깎아왔다.
“마후라 대사께서는 천축에서 오셨습니다. 야채로 범어를 표현해 봤습니다.”
“범어라. 그래 무슨 의미냐?”
왕건이 물었다.
“반야심경을 범어로 이리 쓴다고 합니다.”
“아주 좋다.”
왕건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아! 내가 방향을 잘못 잡았구나. 그냥 경란이 도움을 받았어야 했어.’
그 광경을 보고 나는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다른 공주들도 음식으로 탑이나 불상의 모습을 정교하게 만들어왔다.
“지수 너는 뭐냐?”
왕건이 오지수에게도 물었다.
“배추로 수미산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여기에 따뜻한 국물을 부으면 수미산을 감싼 강의 모습이 됩니다. 배춧국을 드시라고 이리 만들어 보았습니다.”
“잘했다. 보기도 좋다.”
왕건의 칭찬에 오지수는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오지수마저 준비를 잘했어. 아 진짜 그냥 빠지고 싶다.’
내가 뒷걸음질을 치는데 왕건이 정확히 나를 보며 말했다.
“연우 너는 무엇을 준비했느냐? 나는 네 기지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래서 나는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준비한 카레가 왕건의 앞에 올라왔다.
웅성웅성.
주변에서 왕건과 함께 음식을 감상하던 중신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니 저게?”
“정윤비 마마께서 대체 왜?”
그런 중신들의 반응에 나는 더욱 긴장했다.
왕건은 카레를 보더니 입을 뗐다.
“이걸 먹으면 내가 월왕 구천이 되는 건가?”
월왕 구천은 중국 춘추시대의 뛰어난 왕이었다. 춘추오패 중의 하나였다.
‘그런 구천의 이름을 거론하다니. 확실히 왕건은 왕답게 보통 사람과 달리 이 카레의 가치를 알아 본 건가?’
나는 그런 기대감을 품고 왕건에게 물었다.
“월왕 구천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고사를 보면 월왕 구천이 오나라 왕 부차에게 대패해서 사로잡혔다. 그 이후 부차를 방심하게 만들려고 구천이 부차가 싼 ‘그걸’ 맛봤다고 들었다. 그래서 방심한 부차가 구천을 풀어줬다고 하지. 혹시 그 심정을 느껴보라고 이걸 만들었니?”
왕건이 나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폐하. 천축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 만들었습니다. 마후라 대사께서도 이 음식을 보면 기뻐하실 겁니다.”
나는 왕건의 말을 듣고 분해서 이 사실을 밝혔다.
“천축에선 이런 음식을 먹는다고? 그럴 리가? 어디에서 들었니?”
“책에서 읽었습니다.”
“무슨 책? 나도 책을 많이 읽었는데 생전 처음 듣는다.”
“…….”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카레에 관한 지식은 현대에서 얻은 거라서 왕건이 이리 꼬치꼬치 캐묻자 답을 하기 어려웠다.
“어허. 이거 참.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정윤비가 준비한 음식만 뺄 수는 없으니. 그냥 다른 음식 뒤에 숨겨서 마후라 대사 앞에 내놓기만 하자.”
왕건은 가차 없이 그리 말했다. 나는 너무 분하고 억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마침내 마후라 대사의 설법이 끝났다.
“내 딸들이 마후라 대사를 위해 준비한 음식 공양입니다. 허허허.”
왕건은 미소를 띠며 마후라 대사 앞에 한상을 차려왔다. 그 상 위에 여러 공주들이 준비한 음식들이 멋지게 펼쳐졌다.
나는 상 위를 보며 허탈감을 느꼈다. 내가 만든 카레는 다른 공주가 만든 탑 모양의 음식 뒤에 가려져서 보이지도 않았다.
‘왕건이 진짜 매몰차네. 자기 눈에 안 찼다고 그냥 대뜸 이러니. 그동안 내가 세운 공은 생각도 안 하나? 나 같으면 미안해서 이렇게는 못 하겠다.’
내가 마음속으로 한탄하는 사이 공주들이 만든 음식을 보고 주변에서 감탄성이 들려왔다.
“정말 대단하다.”
“어쩜 저리 정교하게.”
구경꾼들이 수군거렸다.
“저 혼자 다 먹을 수 없는 양입니다.”
마후라 대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남는 음식은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것입니다.”
왕건은 그렇게 대답했다.
“와, 만세!”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구경꾼들이 환호했다. 마후라 대사는 천천히 여러 음식을 한 수저씩만 맛보았다.
킁킁.
그러다가 마후라 대사가 갑자기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어찌 이 냄새가 고려 땅에?”
어눌한 어조로 그렇게 중얼거리던 마후라 대사가 허겁지겁 상을 둘러보더니 탑 뒤에 숨겨진 카레를 꺼내 들었다.
“대사. 다른 음식들도 많은데 왜 굳이? 그 음식은 실수로 올라왔습니다.”
왕건이 당황해서 마후라 대사에게 말했다.
“저건 또 뭐야?”
“저런 게 왜 상 위에 올라왔지?”
주변의 구경꾼들도 일제히 외치는데 마후라 대사는 주저 없이 카레를 수저로 떠서 먹었다.
그리고 수저를 내려놓더니 주변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으로 밥과 카레를 정신없이 먹기 시작했다.
마후라 대사는 알뜰하게 카레를 다 먹었다.
그러더니 마후라 대사는 왕건을 돌아보며 물었다.
“천축을 떠난 지 40년이 지났고 이제 소승이 이 고려 땅에서 생을 마칠 운수입니다. 그런데 이 먼 고려에서 고향의 음식을 보게 되니 이것도 인연인 듯합니다. 혹시 소승이 오기 전에 다른 천축 사람이 이 고려에 온 적이 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