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84화 (84/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84화

84. 삼장법사

요새는 매일 학관과 한림원에 나가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학관과 한림원에서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한문실력은 확실히 늘었다. 그건 그렇고 참 평화로워 보이네.’

왕건은 한림원에 앉아서 각 지방에서 올라온 서신을 읽고 있었다. 태평한 얼굴이었다.

‘왕건은 견훤의 7월 대공세에 대해 알고 있을까? 하, 유금필이 모른 척하라고 해서 입을 다물고는 있는데. 왜 이리 마음이 불편한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왕건은 서신 하나를 읽더니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천축국에서 온 삼장법사 마후라 대사가 국경에 당도했다. 고려에 입국을 청한다는군.”

삼장법사는 학문에 뛰어난 고승에게 바치는 칭호였다.

‘엄청난 고승이 고려에 왔군. 인도에서 고려까지 오다니. 정말 대단하다.’

이 시기 고승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배우거나 전파하기 위해 엄청난 거리를 여행했다.

신라나 당나라의 고승들도 천축까지 갔다 온 사람이 있었다. 마후라는 이와 반대로 천축에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이 고려까지 온 것이다.

“삼장법사라고 불릴 정도면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한림원령 최언위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보기 드문 고승이 우리 고려를 방문하는데 환영행사를 열어야지. 내가 개경 교외에서 마후라 대사를 맞이하겠다. 학사들은 고승을 환영하는 절차가 적혀 있는 책을 찾아보도록.”

왕건은 이 일에 열성적으로 나섰다.

‘왕건이 확실히 불교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삼장법사 마후라의 방문을 이용해서 또 선전을 하려는 거 같은데. 하다못해 새끼 돼지 한 마리 태어난 거 가지고도 뭔가를 해보려는 사람이라.’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왕건의 눈치를 봤다.

‘또 이거 가지고 나한테 뭐 없냐고 압박하지는 않겠지.’

그런데 왕건의 말을 듣고 불쑥 대내학사 김악이 끼어들었다.

“외국 승려 하나가 오는데 굳이 그런 거창한 행사를 열 필요가 있겠습니까? 물론 학문이 깊은 사람이라 하니 예는 갖춰야겠습니다만. 굳이 폐하께서 나가실 필요가 있습니까? 한림원령께서 마후라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시는데 한림원령께서 맞이하셔도 되지 않습니까?”

여러모로 불교 행사를 싫어하는 김악은 진짜 일관성 있게 또 나섰다. 왕건이 마후라를 후대하려 하니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니 또 뭐가 문제라서 심통이 났어?”

왕건도 웃으면서 농담조로 김악의 말을 받았다.

“생각을 해보십시오. 폐하께서 마후라라는 사람을 후하게 대접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해외에서 온갖 승려들이 다 고려로 모여들 것입니다. 지금 중원 땅은 혼란한 상태입니다. 중원에 와 있는 천축승이나 서역승들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고려로 오면 감당이 가능하겠습니까?”

김악이 나름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 내는데 왕건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해외의 승려들이 고려에 오는 게 내 소망이다.”

“예?”

“천축이나 서역의 고승들은 사방을 여행해도 의심을 받지 않는다. 거란의 무리들도 그런 고승들은 건드리지 않고 통과시켜 준다. 해외 고승들과 교류하며 거란 치하 요동의 정세도 탐문할 수 있고 결정적일 때 그들을 이용해 중원에 소식도 전할 수 있다.”

왕건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중원에 소식을 전하려면 사신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김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식으로 사신을 보내면 거란의 무리들도 눈치채지 않느냐? 내가 견훤이를 정리하고 나면 야율덕광도 토벌한 뒤 발해 사람들을 구할 마음이 있다. 고려와 중원에서 동시에 군사를 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정식 사신이 아니라 해외 고승을 통해서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아 급습을 하는 거지. 그를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를 해놔야 해. 마후라 같은 사람들이 고려를 계속 오가면 아무도 의심을 안 한다.”

왕건이 당차게 주변을 둘러보며 외쳤다.

“아…… 예, 뭐 알겠습니다.”

왕건의 연설을 들은 김악은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고 물러났다. 다만 왕건의 말을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김악도 왕건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서 간언을 관둔 것 같았다. 다른 학사들도 좀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왕건은 열성적으로 삼장법사 마후라 환영행사를 계획했다.

“그래, 요 근래 창건된 구산사에 공간이 많으니 마후라 대사를 거기에 모시면 되겠다. 공양도 해야 하고. 내 공주들로 하여금 천축고승을 위해 음식을 마련하라고 해야겠다. 그러면 중원에까지 이 소문이 퍼질 거고 해외 고승들이 우르르 고려에 몰려오겠지. 으하하하.”

왕건은 학사들이 바친 책을 대충 훑어보더니 자기 맘대로 결론을 내리고 크게 웃었다.

“그럼 구산사에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여러 왕후와 부인께도 알리겠습니다.”

최언위가 왕건의 눈치를 보며 실무적인 일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웃음을 그친 왕건이 나를 보더니 말했다.

“연우 너의 음식도 기대하마.”

“예? 나주원에서는 오지수 공주 마마가 계십니다. 저는 그냥 공주 마마를 도와서…….”

“아니 너는 돈도 많은데 뭘 지수와 같이하느냐? 너도 따로 한턱내야지. 이번엔 돈 좀 쓰렴. 너한텐 푼돈 아니겠니?”

왕건이 또 악착같이 나도 끌어들였다.

“알겠습니다.”

나는 부담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 * *

이 날 한림원을 나서며 수레에 오른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삼장법사 마후라를 환영하는 일은 왕건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이야. 이번에는 반드시 성과를 내야겠다. 왕건의 신임이 필요한 상황이니.’

한림원 학사들은 해외고승들을 연락책으로 사용하겠다는 왕건의 말을 안 믿는 것 같았지만 미래에서 온 나는 그게 왕건의 진심임을 알고 있었다.

‘왕건은 삼한을 통일하고 난 뒤 진짜 그 계획을 밀어붙였어. 이번에 마후라를 환영하는 것도 그 큰 구상의 일환으로 하는 거니. 소홀히 하면 왕건이 많이 상심할 게 뻔하다.’

그래서 나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마후라 대사에게 공양할 음식에 정성을 쏟는 것을 넘어 소문이 나게 해야 한다. 왕건의 목적은 그거니. 내가 가진 현대인의 지식 중에 쓸 만한 게 없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주원에 있는 내 처소에 들어섰다. 그리고 좋은 방법이 없나 머리를 굴리는데 처소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오지수가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언니. 그거 들으셨어요? 폐하께서 여러 공주들에게 요리 대결을 명하셨어요!”

그 잠깐 사이에 최언위가 사람을 보내 왕건의 명을 궁궐 곳곳에 전한 것 같았다. 하긴 한림원에서 궁궐까지는 거리가 가까웠다.

“요리대결이라니 그건 아니에요. 그저 천축 삼장법사 마후라 대사를 위해 음식공양을 하라는 거죠. 고승인 마후라 대사가 음식을 맛보고 평가를 할 리 있나요? 와전이 됐나 보네요.”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요리대결이죠!”

그런데 오지수는 고집을 부리며 말했다.

“저는 한림원에서 폐하가 말씀하시는 것을 다 듣고 온 사람이에요. 허허.”

나는 기가 막혀서 오지수에게 말했다.

“여러 공주들이 음식을 마련하면 마후라 대사 혼자서 다 먹을 수나 있나요? 그럼 배가 터지실걸요. 이건 동양원 부인의 생일선물을 준비할 때와 똑같아요. 환영행사 때 여러 공주들이 무슨 음식을 공양하나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평가를 할 거예요. 폐하께서 이걸 노리시고 경쟁을 붙이신 거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폐하께서는 이 일을 널리 알리시고 싶은 거예요. 공주들끼리 경쟁이 붙으면 사람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죠.”

오지수가 또박또박 말했다.

“…….”

오지수의 말을 듣다 보니 이치에 맞아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설마 왕건이 이런 궁중암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그런 명을? 하긴 확실히 소문이 널리 퍼지긴 하겠군.’

“그래도 연우 언니가 와서 연고 사업을 넘겨주셔서 나주원에도 나름 자금이 생겼어요. 마후라 대사가 곧 당도할 테니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열심히 준비해야죠.”

오지수가 의젓하게 말했다.

“오지수 공주 마마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아셨나요?”

“저는 나주원에서 태어나서 궁궐생활을 오래 했잖아요.”

오지수의 말을 듣고 나는 새삼 오지수가 많이 컸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마후라 대사를 위한 음식을 진지하게 준비해야겠는데?’

* * *

다음 날 나는 한림원 근무를 마치고 바로 나주원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왕창근의 상단에 들렀다가 가자!”

나는 수레를 모는 사람에게 말했다.

‘마후라 대사가 이미 고려 국경을 넘어 개경에 오고 있으니 시간이 얼마 없다. 서둘러야 해. 왕건의 목적은 소문이 널리 퍼지는 거니 뭔가 독창성을 발휘해야지. 그래 이걸 만들면 고려 사람들의 허를 찌를 수 있다. 왕창근의 상단에서 재료를 구해야겠다.’

왕창근의 상단에 당도하자 역시나 왕 노인이 나를 맞이하기 위해 나왔다.

왕 노인이 나와의 거래는 전담하는 것 같았다. 고마운 일이었다.

“혼인을 치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윤비 마마.”

내 앞에서 왕 노인이 정중하게 예를 갖췄다.

“아이고, 어르신. 예를 거두십시오.”

나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왕 노인에게 답례하며 말했다. 왕 노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요리 재료를 구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강황을 구할 수 있습니까?”

나는 왕 노인에게 물었다.

“그것은 약재가 아닙니까? 고려에서도 자라는 것이고 또 우리 상단은 중국과 교역도 해서 그런 약재들이 있습니다.”

“다행입니다. 강황을 가루로 만들어 되는대로 저에게 주십시오. 돈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질 좋은 생강이며 계피도 필요합니다. 이것들이 다 있습니까? 다른 향신료도 둘러보고 싶습니다.”

“생강은 많이 있고 계피도 양이 적긴 해도 있습니다. 우리 상단이 보유한 향신료들의 목록입니다.”

왕 노인은 안도하는 기색으로 작은 책자를 펴서 나에게 건넸다.

‘다행히도 쓸 만한 향신료들이 많다. 좋아. 카레를 한번 만들어볼 수 있겠군. 마후라 대사도 고향인 천축국의 음식을 보면 감동하겠지. 그리고 고려 사람들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을걸. 확실히 시대를 고려하면 카레가 독창성도 있고 소문도 쫙 퍼질 거야.’

나는 흐뭇하게 내가 원하는 향신료들을 왕 노인에게 알려줬다. 물론 현대식 카레를 만들기 위한 모든 재료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 재료면 현대 카레와 상당히 유사한 카레를 만들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젠장 향신료값이 비싸긴 하네. 은광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도 왕건이 이번 일에 진심인 것을 생각하면 해볼 만한 투자였다.

“정윤비 마마께서 주문하신 재료들은 모두 잘 포장해서 나주원에 올리겠습니다.”

왕 노인은 정중히 말했다.

“그럼 어르신.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나중에 어르신과 시에 대해서 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어렸을 때 만난 기인께서 눈물에 관한 시 말고도 다른 시들을 저에게 알려주셨습니다.”

나도 공손하게 예를 갖추며 대답했다.

“허허허. 알겠습니다. 정윤비 마마.”

왕 노인은 쓴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요리 재료들을 구한 나는 나주원에 돌아왔는데 나주원도 어수선했다. 오지수가 시녀들을 동원해 자기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립밤 사업을 넘겨줘서 오지수도 이제는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무슨 음식을 준비하는 건가요?”

나는 시녀들을 지휘하는 오지수를 보며 물었다.

“채소를 이용해 뭔가를 만들어보려 하는데 아직 고민이에요. 어느 정도 완성되면 언니께 보여드릴게요. 언니는 다 정하셨나요?”

“예.”

“우와 그럼 꼭 보러 갈게요. 연우 언니 음식은 정말 기대돼요.”

오지수는 신이 나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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