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83화
83. 돼지
나는 유금필의 말을 듣고 어찌 대응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유금필은 내가 무슨 병법의 대가인 줄 알고 있는데. 에라 모르겠다.’
나는 짐짓 태연한 얼굴로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금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장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보기엔 아마 견훤이 진보성의 홍술 공을 노릴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그러자 유금필은 진짜 감탄한 표정이었다.
“정확합니다. 지금 전황을 살펴보면 진보성 외에 견훤이 칠 곳이 없습니다. 허허허, 정윤비 마마의 병법에 놀랄 뿐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아는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니 저는 무척 기쁩니다. 이런 말을 함부로 했다가 새어나가면 문제가 커집니다. 그래서 입을 꽉 다물고 있었는데 정윤비 마마를 만나서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유금필은 이제 손뼉까지 치며 기뻐했다.
‘내가 알긴 뭘 알아? 물론 결과를 알기는 하지만 병법은 모르는데. 그래도 유금필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줘서 다행이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홍술 공이 위험한 만큼 구하러 가야 합니다. 대장군께서 어전에서 나서주십시오. 그럼 저도 대장군을 돕고 아마 정윤 전하께서도 나서주실 것입니다.”
“으하하하. 이거 참. 오늘 정윤비 마마를 만나게 돼서 매우 기쁩니다.”
유금필은 엄청 크게 웃었다.
“내일쯤 대장군이 폐하께 말씀을 올리시면 시간이 맞을 듯합니다.”
나는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하며 그리 권했다. 유금필은 계속 웃으면서 대답했다.
“정윤비 마마와의 대화는 참 즐겁습니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학식이 깊어서 저와 이야기가 통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병법이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늙은이가 가르쳐드릴 것이 있어서 더 기쁩니다. 이번엔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유금필이 밝은 표정으로 말해서 나는 순간 말뜻을 잘 못 알아들었다.
“예?”
“어차피 7월에 우리 고려는 군사를 못 움직입니다. 그때 농사일을 제대로 못 하면 올 한해 농사를 다 망칩니다. 우리 고려는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무리가 안 가는 범위에서 약간의 군사들을 보내든지 다른 계책을 쓴다면…….”
내가 넌지시 권하는데 유금필은 고개를 저었다.
“이 늙은이가 큰 전략을 세우고 있는데 7월에 견훤이 움직여 주는 것이 우리 고려에 더 유리합니다. 견훤의 움직임을 읽었다고 바로 대응하는 것이 상책이 아닙니다. 정윤비 마마께서 섣불리 나서실까 봐 이리 급하게 만났는데 다행입니다. 이 늙은이의 말대로 그냥 가만히 계십시오. 이번에 일이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시면 좋은 공부가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러면 홍술 공이…….”
내가 머뭇거리면서 입을 여는데 유금필은 또 웃으면서 말했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똑똑하시지만 아직 어리고 마음도 약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알려드릴 것이 또 하나 생겨서 기쁩니다. 그런 것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
유금필의 말을 듣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에는 나를 칭찬하기도 하고 웃기도 해서 분위기가 좋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나더러 가만히 있으라는 경고였네.’
나는 힐끔 유금필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여전히 웃는 낯이긴 했다. 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장군의 말을 따르겠습니다. 이번에 대장군께 병법을 배우게 돼서 영광입니다.”
나는 유금필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유금필이 무섭기도 하고 또 역사를 보면 결과가 좋았으니. 유금필은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홍술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보는 건가?’
“하하하. 제 뜻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정윤비 마마를 또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럼 일이 바빠서 저는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유금필은 나에게 예를 갖추더니 그대로 정자에서 나갔다. 나는 힘이 빠져서 의자에 주저앉았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동양원 부인이 정자 안에 들어왔다.
“아버님께서는 군무 때문에 훌쩍 가버리셨어요. 잘 안 웃는 아버님이 오늘 크게 웃으신 걸 보니 기분이 좋으셨나 보네요. 아버님도 가셨으니 편하게 동양원에서 놀다 가요.”
사정을 모르는 동양원 부인은 상냥하게 웃으면서 권했다.
“오늘은 일찍 가보겠습니다.”
나도 원래 유금필과의 용무가 끝나면 놀다 가려 했는데 기력이 없어서 동양원 부인에게 그리 말했다.
‘유금필을 한번 만나고 나니 힘이 쭉 빠지네.’
나는 터덜터덜 나주원으로 돌아왔다.
“오지수 공주 마마께서는 아직 안 돌아오셨니?”
나는 나주원의 시녀에게 물었다. 여러모로 힘도 빠지고 해서 기분전환도 할 겸 오지수와 수다나 떨 생각이었다.
“학관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시녀는 그리 대답했다.
‘아 한동안 혼자서 시간이나 때워야겠네.’
나는 힘없이 내 처소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그런 내 등 뒤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국선!”
놀랍게도 왕무가 성큼성큼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정윤 전하!”
나도 왕무를 만나자 너무 반가워서 외쳤다. 왕무는 항상 군사일을 담당해서 바빴는데 뜻밖에 낮에 이리 만나게 된 것이다.
“국선이 아직 학관에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오늘 약속이 있어서 빠졌습니다. 정윤 전하께서는?”
“요 근래는 군사들을 쉬게 해야 한다며 훈련도 줄여서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찍 왔는데 이렇게 국선을 만날 줄이야.”
왕무가 나에게 말했다.
‘유금필은 이런 식으로 고려군을 푹 쉬게 만든 뒤 결전을 벌일 작정인가? 왕무에게도 좀 정보를 캐내야겠다.’
왕무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뭔가 일이 흘러가는 것이 보일 것도 같았다.
“정윤 전하께서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나 나누고 싶습니다.”
“좋습니다.”
왕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들에게 차를 가져오라 시킨 나는 왕무와 마주 앉았다.
“정윤 전하께서는 유금필 장군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나요?”
나는 앉자마자 왕무에게 물었다.
“참 훌륭한 분입니다. 요 근래에는 유금필 장군이 전군을 감독하고 있는데 그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성격은요?”
“온후하고 정중한 분입니다.”
왕무가 눈치 없이 그리 말했다.
“아니에요. 유금필 장군은 무서운 사람이라고요.”
나는 주위를 살피고 나서 왕무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고 속삭였다.
‘이건 내가 방금 얻어낸 특급정보니 은밀히 알려줘야지. 진짜 동양원 정자에서 얘기할 땐 쫄았어. 웃는 얼굴로 압박을 주고. 선량한 대학원생이 군인에게 압박을 받았으니. 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냐는 말이야!’
시간이 지나니 나는 새삼 분했다.
“유금필 장군이 그런 분은 아닌데.”
왕무가 머뭇거리더니 그리 말했다.
“그게 아닙니다. 정윤 전하께서 모르셔서 그래요.”
나는 답답해져서 가슴을 치며 말했다. 동양원에서 있었던 유금필과의 대화는 함부로 밖에 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무에게도 내가 말해줄 수가 없어서 갑갑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왕무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오랫동안 군부에서 일하셔서 무서운 면모가 있긴 한 것 같습니다.”
“정윤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왕무가 겨우 핵심을 짚었다. 그나마 가슴이 막히던 것이 좀 풀리는 것 같아 나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보다는 국선의 지모가 탁월하니.”
왕무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나는 동양원에 갔다 오고 나서는 싱숭생숭하고 좀 짜증이 났는데 왕무가 이렇게 말해주니 기분이 좋아졌다.
“자 이 다과 좀 드세요.”
나는 다과 하나를 들어서 왕무에게 건넸다. 왕무는 다과를 받아들고 재빨리 먹었다.
이런 식으로 이날 하루는 왕무와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까지 보냈다.
* * *
다음 날 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학관에 갔다. 설렁설렁 학관 수업을 끝낸 나는 한림원으로 향했다.
‘유금필이 어쨌거나 가만히 있어 달라고 했으니 그냥 있어 봐야지. 에잇. 고민 안 하게 되니 좋긴 좋네. 몇 달간은 한림원에서 시간이나 때워야지. 책이나 읽어야겠어. 솔직히 이젠 학관 수업은 너무 시시하게 느껴져. 한림원에서 진짜 공부를 해야지.’
나는 마음을 긍정적으로 먹고 한림원에 나왔다. 왕건은 여느 때처럼 심각한 표정으로 학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으려고 했는데 내가 들어오자마자 왕건이 반색을 했다.
“연우야. 왔구나!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 폐하.”
나는 불안감을 느끼며 예를 갖추었다.
“연우야. 이것 좀 보거라. 서경에서 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아니 새끼 돼지 한 마리가 태어났는데 그 형상이 독특해. 한 마리도 두 마리도 아닌 새끼 돼지가 태어났어. 여기 서경유수가 서신을 보내왔다.”
왕건이 손에 든 서신을 흔들면서 또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머리는 보통 돼지와 똑같은데 몸뚱이가 참 기이하다고 여기 적혀 있다. 돼지 2마리의 몸뚱이가 머리 하나에 붙어 있는 격이라는구나. 허허허. 신기한 일이야.”
‘아 샴쌍둥이구나.’
나는 현대 지식으로 재빨리 무슨 상황인지 눈치챘다. 동물들에게도 이런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매우 좋은 징조 같습니다.”
나는 재빨리 그리 말했다.
“최지몽도 똑같이 말했다. 결국 내가 삼한을 통일하게 될 징조 같다고 말이다.”
왕건이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 시절에는 샴쌍둥이도 이런 식으로 해석됐다. 딱 보면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서경유수 왕식렴도 이게 길조라고 생각해서 보고를 올렸을 거야. 굳이 바빠 죽겠는데 시간을 내서 새끼 돼지 얘기를 적어 보낸 걸 보면.’
내가 그런 계산을 하는데 왕건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래 그게 다냐? 뭐 예전처럼 한번 연우 너의 재주를 보여줘야지?”
“예?”
내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반문하는데 왕건이 외쳤다.
“이 새끼 돼지와 관련해서 뭔가 거창한 일을 한번 해줘야지. 부석사에서 했던 일도 그렇고, 근래에는 손긍훈 구출작전 때도 한 건 했고. 응, 뭐 생각나는 게 없느냐?”
왕건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아니 좋은 징조라고 해석을 하면 끝이지 뭘 또 바라는 거야? 사람이 왜 이리 뻔뻔해?’
나는 기가 막혀서 왕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없습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아무리 내가 현대인이라고 해도 아이디어가 무한정 있는 게 아닌데.’
이 샴쌍둥이 새끼 돼지와 관련해서는 나도 진짜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냥 이 새끼 돼지의 존재 자체가 신기하니 개경에 오면 잘 키우면 되는 거 아니야?’
나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 왕건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았다.
“쩝, 뭐 연우 너도 항상 계책을 짜낼 수는 없겠지. 알았다.”
왕건은 입맛을 다시더니 그리 말했다. 어쨌든 일이 이렇게 마무리되고 왕건은 학사들과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앞으로 왕무가 기반을 굳히기 위해서는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동안은 왕건의 신임을 받아야 하는데 이번에 이리 실망한 기색을 보이니. 아니 나는 죄가 없어. 여태까지 세운 공이 많은데 이번에는 생각이 안 날 뿐이라고.’
그런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했다.
‘아 왜 마음 불편하게 새끼 돼지 얘기를 나한테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