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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82화 (82/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82화

82. 7월

‘아 정말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지금이 5월이니 2달 뒤에는 진보성주 홍술이 전사한다. 결판을 내야 하는데.’

나는 나주원의 정원을 정신없이 오락가락하며 생각에 잠겼다. 정원에는 찔레꽃이며 수국, 수련 같은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지만 그것을 볼 겨를이 없었다.

‘왕무를 통해서 어전회의에 내 의견을 전달해 볼까? 아니야. 그건 왕무에게 너무 큰 부담이 갈 거 같아. 그리고 왕무를 견제하는 대호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고. 이거 참.’

미래 지식이 있는 나도 이번에는 어찌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내가 정신없이 정원을 거니는데 시녀 하나가 열심히 정원의 꽃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그 시녀도 내가 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정윤비 마마를 뵙습니다.”

“음, 그래 너는 저녁 식사를 담당하지?”

그 얼굴이 눈이 익어 나는 그리 말했다.

“그렇습니다.”

내 말을 듣고 그 시녀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혼자 일이 많은 것 같구나. 내가 나주원에 들어올 때 내 시녀들도 함께 데리고 왔다. 그 아이들로 하여금 너를 돕게 하겠다.”

“괜찮습니다.”

그 시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사람을 보낼 테니 정원일을 잘 알려줘라.”

나는 산책을 마치고 내 처소로 가서 경란이를 불렀다. 상산 출신의 시녀 경란이도 나를 따라 나주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정윤비 마마.”

“지금 정원에서 홀로 일하고 있는 시녀를 돕도록 해라.”

“예.”

내 말을 듣고 경란이가 황급히 뛰어나갔다.

“참 여러모로 일이 풀리지 않는군.”

나는 한숨을 쉬며 차를 한잔 따라 마셨다. 잠시 차 맛을 느끼며 근심을 잊으려 하는데 또 다른 시녀 하나가 달려와서 말했다.

“병부낭중이 정윤비 마마를 뵙기를 청합니다.”

“오라버니가? 잘 됐다. 서둘러 모셔와라.”

나는 반색을 하며 시녀에게 지시했다.

‘임연객이 왔구나. 그러고 보니 결혼을 하고 나서는 부모님과 오라버니를 한동안 못 봤어. 결혼하고 얼마 안 돼서 명주에 갔다 왔으니.’

곧이어 임연객이 시녀의 안내를 받아 들어왔다. 시녀는 임연객을 안내하고 나서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임연객은 나를 보자마자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연우 네가 돈도 많이 만지는데 아예 여기를 좀 대대적으로 증축하는 게 어떠냐? 여긴 항상 그대로네.”

이 고려초는 조선시대처럼 예법이 빡빡한 게 아니라서 임연객은 여전히 나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리고 나는 돈 없어.”

“아니 돈이 없다니? 은제련소에서 나는 은은 어디 가고?”

임연객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거야 쓸 데도 있고 저축도 해놔야지.”

이미 은제련소의 은은 발해 유민들 정착자금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물론 그 은을 다 발해 유민들을 위해 쓰는 것은 아니지만 훗날을 위해 저축도 열심히 해야지.’

그런데 임연객은 미련이 남은 듯 계속 말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전각 같은 걸 몇 개 더 지어놔야.”

“그래서 오라버니는 왜 왔어?”

임연객을 처음 봤을 때는 반가웠는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지긋지긋해졌다.

‘임연객은 이유 없이 누이동생을 만나러 올 인간이 아니야.’

내 말을 듣자 임연객은 진지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유금필 장군이 연우 너와 한번 만나고 싶대. 흐흐흐.”

“유금필 장군이?”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래 내가 병부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일을 논의하러 오신 유금필 장군이 직접 나에게 그런 말을 하셨어.”

“당연히 유금필 장군이 만나고 싶다면 만나야지…….”

내가 뭐라 말을 이으려고 하는데 임연객이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유금필 장군이 내 이름도 기억하고 계셨어. 이 병부낭중 생활도 곧 끝날 것 같다. 조만간 승진할 수도.”

“아니 그래서 유금필 장군이 언제 어디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말한 거야?”

“음, 내일 오시쯤에 동양원에서 만나자고 하셨어.”

임연객이 그제서야 중요한 말을 했다.

‘내가 동양원에 자주 드나드니 유금필이 동양원에서 나를 만나면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밀 수 있다. 뭔가 심상치 않은데.’

내가 그런 생각에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임연객은 계속 자기 승진에 대해 떠들어댔다.

“내가 10년 안에 병부경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자 오라버니는 병부 일이 바쁘니 가봐야지.”

내가 듣기 싫어서 그리 말하는데 임연객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아예 휴가를 내서 괜찮아. 누이동생을 보러 간다니 군말 없이 휴가가 나왔어. 정윤 전하 눈치를 보는 거지. 앞으로 힘들 때는 여기 온다는 핑계로 휴가를 좀 내야겠다.”

‘안 돼!’

임연객의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 * *

계속 나주원에 머무르며 떠들어 대려는 임연객을 겨우 몰아낸 나는 마음이 급했다.

‘동양원에 가려면 옷을 좀 준비해야 하는데. 또 내일 유금필도 만나야 하니. 이게 한참 걸리는데.’

벌써 오후였다. 임연객이 와서 한참 수다를 떨다 가서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됐다. 허둥지둥 다른 시녀들을 불러서 나는 옷과 장신구를 준비했다.

그러는 와중에 내 명령을 받고 정원일을 하러 갔던 경란이가 돌아왔다.

“일을 다 마쳤느냐?”

“예. 마마.”

“뭐, 밖에 나가지는 않았고?”

“나주원 안에서 정원 일만 했습니다. 원래 정원일을 하던 시녀는 지금은 저녁준비를 하러 갔습니다.”

경란이의 대답을 듣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어쨌든 알았다. 좀 쉬다가 내가 내일 동양원에 가야 하니 그 준비를 좀 도와줘.”

“알겠습니다.”

경란이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 * *

다음 날 아침부터 나는 동양원에 갈 준비를 단단히 했다. 유금필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학관은 안 나가기로 했다.

“언니 또 동양원에 가죠?”

오지수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말했다.

“어떻게 알았나요?”

“동양원에 갈 때마다 언니는 엄청 꾸미잖아요. 어쨌거나 저는 학관이나 갈게요.”

오지수는 그렇게 말하고 나주원을 나섰다.

‘내가 꾸민다고? 그랬나?’

나는 그 생각을 하며 오시가 되기 전에 동양원에 갔다. 동양원에 도착하자 여느 때처럼 동양원 부인이 나를 맞이했다.

“우리 착한 며느리가 오늘도 왔네요. 평소처럼 편하게 놀면 좋은데. 하필 오늘 아버님이 와 계셔서. 어색해도 한번 인사나 해요. 왔는데 인사를 안 하면 이상하잖아요.”

동양원 부인이 평소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 말만 들으면 동양원 부인은 유금필이 나를 부른 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동양원 부인이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걸 수도. 어쨌든 이 언니, 아니 누나도 절대 못 믿어. 구산사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동양원의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정자에는 유금필이 약간은 딱딱한 표정으로 앉아서 꽃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보자 유금필이 일어나서 정중히 예를 올렸다.

“정윤비 마마를 뵙습니다.”

“대장군을 뵙습니다.”

나 역시 유금필에게 예를 표하며 정자에 올라왔다. 나를 여기까지 안내한 동양원 부인은 그대로 물러났다.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다.

나와 유금필이 앉아 있는 정자 안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유금필은 원래 말이 많은 성품이 아니었고 나는 유금필이 나를 왜 불렀는데 궁금했지만 입을 여는 것을 참았다.

그러다가 문득 유금필이 입을 열었다.

“정윤비 마마께서는 견훤이 조만간 군사를 움직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한림원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제가 한림원령과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유금필의 말에 나는 약간 놀랐다. 유금필이 이 문제에 대해 논하려고 나를 불렀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거기다가 내가 한림원에서 했던 말이 밖에 흘러나가는구나. 하긴 수많은 학사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왕건에게 말하는 거니. 당연히 흘러나가겠지. 유금필처럼 최언위를 통해서 말이 전해질 수도 있고.’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유금필이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습니다.”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미래에서 다 보고 왔다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저와 내기 하나 하시겠습니까?”

유금필은 그런 나를 보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기라면?”

내가 뜬금없는 유금필의 말에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견훤이 온다면 몇월에 올 건지 맞춰보는 내기를 하면 어떻습니까? 이 종이 위에 각자가 생각하는 바를 적은 뒤 비교해 보면 좋겠습니다.”

유금필이 서탁 위에 놓인 종이와 붓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금필도 견훤이 언제 군사를 일으킬지 생각하는 바가 있나 보군.’

“좋습니다.”

나는 유금필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들어 유금필이 못 보게 소매로 가리고 글자를 썼다.

七月

나는 이렇게 적었다. 견훤이 7월에 온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7월이라 적은 것이다.

유금필도 역시 소매로 자신의 종이를 가리고 순식간에 글씨를 썼다.

“자 그럼 이제 보여주십시오.”

유금필이 그리 말하며 자신의 종이를 내밀었다. 나도 유금필과 동시에 종이를 내밀었다. 유금필의 종이를 본 나는 경악했다.

유금필의 종이 위에도 그리 적혀 있었다.

‘설마 유금필도 나처럼 빙의한 것인가? 그래서 미래 역사를 알고 움직이는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유금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금필은 두 장의 종이를 보고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과연 정윤비 마마께서 병법에 조예가 깊으십니다. 병법에 능하고 근 수십 년간의 전투들을 살펴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 수 있는 사실이긴 합니다. 그래도 정윤비 마마께서 매우 젊으신데 이 정도로 병법을 연구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과연 상산백의 말대로 정윤비 마마의 학문이 놀랍습니다. 허허허.”

유금필은 그러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유금필의 말을 들으면 병법 연구를 통해 견훤의 움직임을 예상해낸 모양인데 그게 가능한가? 정말 빙의한 게 아니야?’

“저는 병법에 능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나는 정직하게 그 사실을 밝혔다.

“병법에 대한 조예 없이 어찌 견훤이 7월에 올 줄 예상하셨겠습니까? 우리 삼한 땅은 호구수가 적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일으키려면 농민들을 꼭 징발해야 하는데 이 때문에 농사일이 많은 농번기에는 대군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대개는 추수 뒤 겨울에 농사일이 없어서 이때 자주 싸웁니다. 그러나 농사일을 살펴보면 7월 여름에도 잠깐 농사를 쉬는 때가 있습니다. 봄과 초여름에 작물을 심고 잡초를 다 뽑고 쉴 수 있는 기간이 한 달쯤 생깁니다. 삼한 땅의 병법가들은 이 시기를 어찌 활용해 볼 수 없나 다 한 번쯤 생각을 해봅니다.”

‘나는 생각 안 해봤어.’

나는 내심 그런 생각을 했다. 그사이 유금필은 신이 났는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거 평소에는 말이 별로 없다가 병법 관련 이야기가 나오니 연설을 하는 성향이네.’

“특히나 삼한 땅은 남북으로 길어서 남북의 기후차가 심합니다. 견훤의 근거지 완산주는 남쪽에 있어 따뜻합니다. 그래서 작물을 심는 기간이 좀 빠른 편이고 7월에 농사일을 쉴 수 있는 기간이 좀 빨리 옵니다. 이에 반해 우리 고려의 근거지 패서는 북쪽이라 좀 춥습니다. 그래서 여름이 늦게 오고 농한기도 약간 늦게 생깁니다. 즉 7월에 우리 고려가 농사일로 바쁠 때 백제는 한가한 시기가 10여 일쯤 생깁니다. 이때 견훤이 부랴부랴 군사를 움직이면 우리 고려는 꼼짝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시차를 이용하는 것은 병법가라면 누구나 다 한 번쯤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 정윤비 마마께서도 여기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셨겠지요?”

‘아뇨. 그런 생각은 못 해봤는데.’

다만 나는 유금필의 생각이 궁금해서 그 말을 끊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견훤은 지난 30년간 엄청난 명성을 떨치고 사방에서 싸웠습니다. 즉 지난 30년간의 전투를 살펴보면 견훤이 어떤 병법가인지 알 수 있습니다. 견훤은 군사를 급하게 움직입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지금 사벌주의 상황이 급박한 것을 생각하면 결론은 뻔합니다. 7월에 생기는 10여 일의 시차를 견훤은 반드시 이용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정윤비 마마 두 사람이 견훤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금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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